악질 시화
이월란(09/10/31)
활자는 이미 조악한 그림 위에 새겨져 있다 여백은 흡사 목숨처럼 눈부시다 제목도 소재도 주제도 나의 취향이 아니다 활자들에게 계절마저 선택당한 사각의 은막,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지휘봉 아래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오케스트라의 합주 속에 행간마다 새어나오는 통곡과 오열의 음향효과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코 들리지 않는다 일정한 속도로 한 행씩 올라오는 자동 스크린이 장착된 시화 앞에 독대하듯 마주 앉았다 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속도계기판은 교묘히 은폐되어 있다 제한 속도 또한 비밀에 붙여져 있다 두서너 행쯤 읽고나면 어렴풋이 속도가 감지된다 행간의 물살은 넘쳐도 넘치지 않아도 밤을 꼴딱 새워서라도 무조건 건너야 한다 단시인지 장시인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끝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진, 절벽 위에서 뛰어내리라 밀어주기 전까진, 한 번 더 읽고 싶은 행이어도 다음 행이 올라오고 있어 늘어져 감상할 시간 따윈 없다 출퇴근 시간처럼, 뜨고 지는 해처럼 칼같이 지나가는 세월의 행들, 스크린은 한 번 올라가면 다신 뜨지 않는다 감상문으로 배부된 백지는 그때 그때 머릿속에 새겨야만 한다 항간의 모니터를 점령한 조잡한 시화들처럼 클릭 한 번으로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을 수 없다 오늘의 눈물이 흐르다 치고 올라오는 또 다른 오늘의 행간에 지워져 버리기 일쑤다 스크린 뒤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자꾸만 빨라지는 행과 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