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이월란(09/11/07)
어느 작가의 서문에서, 그녀는
달빛 찬연한 밤이면 아버지가 찾아와
세상 사는 지혜를 알려 주실 거란다
쫓기듯 차려 입으시던 검은 그림자
골목 모퉁이를 유연하게 훑고 꺾이며 사라지던
이국의 꽃내음 같은 살내 나던 봄날
저 양반은 절대로 살림은 안차린다
영혼의 냄새는
시리고 부어터진 풍치환자의 입바람 같아서
사카린처럼 교묘히 뿌려 놓은 담장 안의 웃음소리 같아서
어린 날들은 그리 길고만 아득해서
밀봉된 고통이 문지방을 넘나들 때마다
휘휘 새어나와 헛발을 딛곤 했던 것인데
한 번도 길이라 여기지 못했던 길들이
돌아보면 넘보며 살아온, 바로 그, 길
아버지가 지나간 자리마다 피어난 꽃들은 왜
속속들이 밉지 않았는지
그 꽃들이 오래도록 모여 사는 정원에 왜
침을 뱉지 못했는지
묻지 않아도 대답해버린 생의 한가운데
정수리에 탄 가르마처럼 선명하기도
폐교된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바람처럼 휑하기도
펑, 폭파된 산속 터널처럼 눈앞에 명시된
나의 길
바람의 그림자가
가려진 빛을 서늘히 들여다 볼 때마다
이름도 짓고 팻말도 세워 놓아야 할
낯설게도 걸어온, 익숙한 외길
블랙홀 같은 자궁 속에서 육신을 입은 것이
이미 외도의 시작이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