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여, 말 좀 해다오

2015.12.31 08:43

최미자 조회 수:461

겨울 바다여, 말 좀 해다오

집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반 시간 달리면 드넓은 태평양이 남북으로 뻗어있다. 남쪽으로는 관광지 시포트 빌리지(Seaport Village)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여객선들이 늘어선 다운타운 항구. 근처 비행장의 하버 길(Harber Drive)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면 푸른 바다에 작은 쉘터(Shelter Island) 섬을 만난다. 종종 낚시꾼들이 경합을 벌이는 큰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고 멋진 식당과 요트 클럽(Yacht club)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특별하다. 2000년 겨울, 이십여명의 가족이 배를 빌려 타고 어머니의 부탁대로 화장한 뼛가루를 뿌렸기 때문이다. 종종 찾아와 해변을 걸으며 나는 남편과 미래의 죽음도 준비한다. 장례는 조용히 화장하고 가족장으로. 집 근처 산에다 재를 한 줌씩 날려달라고 부탁하자고. 그냥 하루하루 충실히 살자고. 부끄럽지 않은 우리의 삶이었노라고 고마운 우주를 향해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지난봄에는 공군 훈련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해 있는 걸 보았다. 바닷물 속에 잠긴 비행기를 찍으려고 방송국의 취재진도 왔다. 교각(pier)에 서서 낚싯줄에 걸려온 생선들이 겁에 질려 숨 막히게 요동치는 모습을 우연히 나는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잡고 신이 나기도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재미로 잡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또 약삭빠르게 날아온 고니(pelican)에게 먹이로 주기도 한다. 나는 인생탐구에 대한 호기심으로 낚시꾼의 눈빛과 얼굴을 찬찬히 본다. 펄떡거리던 생선의 눈빛과 교차하기 때문이다.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인과와 윤회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다로 돌아가는 한 마리 생선을 유유히 바라본다. 쉘터섬 근처 바다에 와 있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친정어머니의 삶. 지난날 막내를 낳은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펄펄 뛰던 가물치를 보약으로 사 왔는데 안 드시고 강물에 넣어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마터면 뜨거운 물 속에 산 가물치를 넣고 끓여 죽일 뻔했다는 말씀을 두고두고 들려주셨다. 지금도 생낙지와 미꾸라지를 뜨거운 물속에 넣고 끓이는 사람들을 본다.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인간의 잔혹성으로 서로 먹고 먹히며 살아가는 슬픈 세상이다. 약한 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커녕 너무나 모두 무감각하다. 우리의 생애가 단 한 번으로 끝이 날까. 예고 없이 닥치는 참혹한 불의의 사고들은 어디에서 무슨 까닭으로 찾아오는 것일까.

 

내 어머니의 서러운 중년. 쉰하나에 반신불수가 된 남편과 술주정뱅이로 변신한 자식과의 고통 속에서 세상을 탓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와 함께 나도 한때 울며 살았다. 40대 후반에 어머니는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을 뵈면서 시작한 마음공부로 그런 고통을 이겨냈다. 다행히 긴 세월이 지나 그 질긴 악인연은 후회와 더불어 선한 인연으로 다시 돌아섰다.

어머니는 늘 책을 읽은 탓인지 지혜로우셨다. 머리에 쓰는 모자는 사람의 인격이나 직업을 의미하니 함부로 아무 데나 놓지 말아라. 잠자리에 들 적이면 아랫도리옷은 아래쪽 발밑에 개어놓고 자라. 흐르는 물도 아껴 써라. 우리 집에는 세숫대야도 사용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고, 얼굴과 발을 닦는 수건도 따로 있었다. 지금은 넉넉해져서 깨끗한 휴지를 화장실에서 사용하지만, 1950-70년대는 종이가 귀했다. 대부분 신문지를 사용했기에 아이들 항문이 거무튀튀하여 웃곤 했다. 사람은 배워야 하기에 글이 써진 종이로 항문을 닦아서는 안 된다며 어머니는 갱지(포장지)를 모아 화장실에 두셨다. 집 마당에서 키운 쪽파와 참기름 양념간장이 두뇌에 좋다며 밥상에서 우리의 건강도 챙기셨다.

여성이 홀대를 받던 시대였지만, 효령대군 후손임을 새기며 품위 있는 삶을 보여주셨다. 줄곧 최우등 학생으로 지방에서 서울대학 의예과를 일 등으로 합격시킨 자식을 기른 것도 그런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숙제하는 내 곁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거나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

학창시절에는 어머니는 치마폭에 돌을 나르며 선배 언니들과 광주학생의거사건(1929113)에도 참석했다. 일본이 한국인의 씨를 말리려고 강제로 조선 왕가를 일본으로 잡아간 슬픈 역사 이야기며, 놋쇠 숟가락과 산에 울창한 소나무와 한국말까지 몰살시키려던 일본의 야만적인 만행을 확실히 우리에게 경각시켜주셨다. 어머니는 간사스러운 일본인의 두 얼굴을 싫어하셨다. ,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같은 배신자 동족들에게도 분노했다. 남자 못지않은 당당한 의리의 여인이었고 존경어로 후배들을 사랑했다. 늘 약한 사람의 편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분이었다. 치렁치렁 긴 한복 치마를 입고 분주히 자원봉사를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깔끔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마음으로 가꾸던 정겨운 우리 집. 영양이 부족하여 몸이 허약했던 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실직했을 때는 고구마와 밀가루 빵으로 끼니를 연명했었지만, 부자가 전혀 부럽지 않았다. 탐욕과 이기심으로 자녀를 길러낸 부모가 한숨을 쉬는 불효막심한 이 시대, 누구를 탓하랴. 하늘에 침을 뱉기 전에 스스로 국가를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돌아볼 일이다.

어머니! 큰 며느리로 해외에 사시니 선산을 모시지 못하는 죄송함과 얼굴도 모르는 후손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마지막 떠나시는 길을 너른 바다로 선택하셨지요. 그래도 말년에는 모든 자녀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으셨으니 위안하십시오. 미국에 살며 한국산 우리 차를 사서 타라던 당부를 지금 저희는 이행하고 있답니다.

생전의 어머니 교훈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오늘, 이 불효녀는 바다에 찾아와 눈물을 또 훔칩니다. 올바르고 투철했던 내 어머니 혼은 어디로 영영 떠나셨단 말인가.

겨울 바다여, 말 좀 해다오.

(수필 계간지 '에세이포레' 2015 겨울호에 발표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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