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2014.10.12 14:01

최미자 조회 수:587 추천:51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합니다." 라는 법정 스님의 생전 메시지가 적혀있는 소식지가 매달 한국에서 날아온다. 내 손바닥크기보다는 조금 큰 책 속에는 향기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2000년 나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나는 뉴욕에 머무시는 법정 스님께 혹시 로스엔젤러스에도 오실까 하고 사십구제일 법회를 청하며 비행기값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스님은 로스앤젤러스 고려사의 초청에도 못 오시던 때라 다음 기회를 보자는 다정한 편지와 함께 내가 보낸 개인수표를 샌디에고로 돌려보냈다.
스님께서 페이지마다 지우고 고친 흔적을 보니 법회에서 만난 인편에 급히 전한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는 매년 한국으로 백 달러의 시주금을 보냈는데, 그 돈을 맑고 향기롭게 사무국장에게 전달했는지 답장과 소식지가 날아왔다. 그 책자 속에서 나는 홀로 사는 노인과 결식아동을 위해 목요일마다 도시락을 만들고 배달하는 봉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후원금을 여태 보낸다. 또 뉴욕에서 발행되는 미주현대불교를 통하여 많은 후원자를 찾으려고 나는 글을 써서 한 동안 사람들에게도 알렸다.
        1993년 여름, 법정스님은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이유(김영삼 대통령때)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이 없어진 기막힌 사실에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고 순수시민운동을 주창하게 된다. 당시 동화작가 정채봉, 방송작가 윤청광, 방송인 이계진, 불교 미술가 고현 교수, 기업가 박수관, 청학 스님등 뜻있는 분들이 모였다. 1994년 3월 26일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맑고 향기롭게'라는 구호가 적힌 스티커를 나누며 첫 출발을 했다.
이 절 저 절 신세지면서 사무실 임대료와 운영비에 부담이 컸던 시기였는데, 서울에서 유명한 요정 대원각을 김영한 사장이 시주하겠다는데도 법정스님이 거절한 일은 10여 년간 두고두고 화제였다. 당시 대원각은 40여 동의 건물에 7,000평 땅과 1,000억대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스님은 1997년 12월 14일 비종교인이었던 김영한 보살에게 백팔 염주와 길상화 라는 불명으로 큰 시주의 고마움을 전했다. 개원식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 종교계의 어른들이 참석했고, 법정스님은 누구나 드나드는 가난한 절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장소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은 불교와 가톨릭의 만남으로 빚어낸 최종태 교수의 오묘한 관세음보살 조각상은 방문객을 반겨주며 길상 음악회도 널리 알려졌다. 또 김영한 사장과 백석 시인과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눈물겹다. 그는 시인과의 일편단심 사랑과 그리움을 백석문학상으로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한복을 짓는 이효재선생의 사무실에는 이 큰 손 할머니의 생전 사진이 걸려있다고 한다. 나도 김영한 사장을 뵌적이 없지만 책속에서 수려한 얼굴을 보았다. 내생이 있다면 그분은 더욱 큰일하는 사업가로 환생할 것만 같다.

        1989년 이었다. 남가주의 가드 그로브에 있는 법왕사 법회에서 질문하던 나를 느낌으로 알아보시며 눈을 반짝거리던 법정 스님. "반야행보살님 딸이지요!" 맙소사. 너무나 놀랍고 반가웠다. 광주 원각사에서 1970년대에 점심을 드시던 스님을 자주 뵐 수 있었지만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다. 당시 나는 중앙여고 화학 교사였고 원각사의 불교학생회를 조직하여 봉사하고 있었는데, 스님은 불임암에 머물며 중앙지의 조간신문에 칼럼을 쓰는 유명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스님과의 진짜 인연은 반야행 보살의 딸로 그렇게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 소중한 인연은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던 내 딸까지 이어졌다. 어느날 길상사 법회에 참석한 딸의 손전화로 스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어느날, 친정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법정 스님이 한국에서 보낸 파란 항공엽서를 보았다. 곧은 성품처럼 단정하고 독특한 스님의 글씨체. 내 부모님은 1950년대 광주광역시에서 실력있고 양심적인 의사로 유명했던 한약방, 손동출 원장님과의 인연으로 송광사의 방장 구산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으며 불자가 되었다. 법정 스님은 구산스님과 불법으로 사형지간(형제사이) 이었다.
나는 광주여고 옆에 있던 일본절(동광사)에서 윤주일 선생님의 일요 법회에 종종 부모님을 따라갔다. 또 흥용사나 신광사에서 큰 스님들이 법회하면 좋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모두 이치에 맞고 긍정이 가는 말씀이었다. 결코 부모님은 자녀들을 종교라는 테두리에 가두지 않았고, 우리가 스스로 창의적인 선택과 생활을 하도록 늘 안내해 주셨다.

        고생하면서 대학에 다닐 때 내가 선택한 불교는 마음에 깊숙이 와 닿았다. 1973년 나를 친정 아버지처럼 걱정해주시던 구산 스님으로부터 송광사의 삼일 암에서 대련성이라는 불명과 오계를 받으며 신도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나는 무종교 생활이었다. 나름대로 바른 철학으로 살아가는 남편과 종교로 집안이 시끄러우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불교의 길을 가라고 남편이 권하는 게 아닌가.
미국에는 절이 없기에 일상에서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뿐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부처님이요. 하는 일마다 불공드리듯 정성을 바치며 도를 닦는 과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에게 이로운 짓을 못할지라도, 최소한 가족과 남을 헤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사는 게 참 종교인이이라고.
작은 바람이 있다면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 흐뭇한 이야기가 있는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를 받아보며 고국에 사는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면 한다. 일 년에 오십에서 백불 정도를 베풀면 된다 (서울 전화 2-741-4696, 4697). 다음 나의 고국 방문길엔 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독거 노인과 결식아동을 위한 도시락을 만드는 일에 꼭 참석하고 싶다.
날마다 아침잠에서 깨면 두 손을 모으며 오늘은 나는 무엇을 한 가지 실천해 볼까. (2013년 1월)

* 다음은 법정스님이 종교를 초월하여 펼치는 시민운동이다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며 삽시다.
        화내지 말고 웃으며 삽시다.
        나 혼자만 생각말고 더불어 삽시다.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나누어 주며 삽시다.
        양보하며 삽시다.
        남을 칭찬하며 삽시다.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우리 것을 아끼고 사랑합시다.
        꽃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가꾸며 삽시다.
        덜 쓰고 덜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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