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동네를 걷는다 2018년 미주문학 겨울호
2019.03.13 03:13
펜으로 쓴 편지를 부치려고 집에서 우체국까지 산책을 나선다. 해도 일찍 서산으로 저무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사색하기도 좋다. 한 두어 달 전부터 이웃들이 꾸며 놓은 크리스마스 장식등이 이채롭다. 가지가지 색깔의 별빛 모양 전등불들이 정원의 작은 나무부터 큰 나무까지 호사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어느 집은 가장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은 지붕위의 둘레 선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재주도 부려 놓았다. 썰매를 끌고 가는 루돌프 사슴과 아이들이 좋아 하는 가지가지 커다란 인형 동물들이 정원에 서 있기도 하고, 오리 부부 전등이 웃고 있다. 우리들도 썰매를 타고 지붕위에서 내려오는 인자한 산타 할아버지 얼굴처럼 닮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스러울까.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걷다가 봡 선생님 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마침 현관문을 열고 나온 집주인이 오랜만에 본 나를 반긴다. 자동차를 현관도로에서 빼주며 사진을 찍도록 도와준다. 그는 88세여서 금년엔 지붕위로 못 올라갔지만, 51세 딸을 데리고 아내랑 꾸몄다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1967년 8월에 새로 지은 이집에 이사 와 살았다 한다. 당시 핏덩이 두 딸을 입양하여 하나는 결혼하여 잘사는데, 다른 아이는 정신장애자라 함께 산다며 푸념한다. 낳은 자식도 기르기 쉽지 않은데 그런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들려주는 아저씨, 본능적인 자애 없이 어찌 가능한 일일까! 비록 그의 걸음걸이는 뒤뚱거려도 여태 테니스를 치고 한국전쟁 중에는 해군으로 근무했다고 한국인인 나에게 자랑했다. 초등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로도 실험실의 혈액을 운송하는 일을 하며 늘 커다란 개 두 마리랑 사는 것도 한결 같다.
가지가지의 크리스마스 장식등을 보며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장인들의 손길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상가의 진열대로 뽑혀와 개성이 담긴 집주인의 창의적인 예술적인 솜씨로 집집마다 은하계의 고운 별빛처럼 다시 피어나고 있다. 또 응접실이 들여다보이는 창문 안에 켜놓은 크리스마스트리의 귀여운 반짝거림을 보며 참으로 아름다운 미국을 본다. 높아지는 전기 사용료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등불 축제를 위해 겨울마다 즐거움과 함께 정성을 바치는 마음이 넉넉한 우리 이웃들.
그런데 나는 지난해도 올해도 왜 이리 맥이 빠지고 마음이 썰렁할까. 불바다에서 미사일로 무기를 바꾸어가며 늘 협박하던 북한과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질까. 현 정부는 탱크를 막는 방호벽과 경계하던 초소, 바다에 있는 북방 한계선도 일방적으로 모두 활짝 열어 놓았다.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인권과 자유는 없고, 심심하면 핵과 무기로 공갈 협박하던 북한정부를 어떻게 믿는다는 건지. 만약 한국 전쟁 때처럼 일요일 새벽 깜깜한 밤에 약속을 안 지키는 북한군이 내려온다면 남한의 안보는 어찌될까.
두 해전 촛불 집회 속에 보았던 ‘재벌타파’와 ‘사회주의가 답이다’라는 섬뜩한 문구들. 지난 선거판에서 본 “보수를 불태워버리겠다, 궤멸 시키겠다”던 무시무시한 구호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 참 민주주의 나라가 아닌가. 정치적 제제 없이 자유롭게 남북한 사람들이 이산가족을 만나고 문화교류도 한다면 그것이 진정 통일의 길로 가는 첫 단계가 아닐까.
탄핵 무렵이던가. 표현의 자유라며 국회의사당 실내 벽에 유럽 명화에 한국의 여성대통령 얼굴을 붙여놓고 모욕하던 나체 그림.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을 연약한 몸인데도 확실한 근거 없이 두해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고 재판하는 잔인한 법조인들. 반미와 친 중국을 외치는 주사파와 전교조의 사상에 물이든 한국의 사오십 대들. 지금은 잘사는 나라이기에 고생도 모르고 자란 젊은이들의 아리송한 국가 정체성. 부정직하고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의 수준은 아직도 후진국. 우리나라 헌법에서 ‘자유’라는 글자를 빼려했던 그들은 어디서 온 대한민국 국민인지 나는 묻고 싶다.
한국전쟁 후, 1950-60년대 희망이 보이지 않던 가난한 조국을 부지런함으로 일으켜 세운 지도자와 부모님, 그리고 우리들. 지난 오랜 역사로부터 작은 나라가 당파싸움으로 갈라지는 슬픔은 언제면 사라질까.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국민이 온 힘을 합쳐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인데, 설마 헌법이 무너지고 자유와 인권을 빼앗기는 사회주의 치하의 대한민국, 남한 땅이 되지는 않겠지!
전기를 무척 아끼는 나는 지구를 사랑하기에 전등불 장식엔 동참하지 못해도, 숨이 막히는 내 조국의 상황과 복잡한 우리 삶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새해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빈다. 이웃들이 켜놓은 고운 불빛을 바라보며 혼동스러운 조국을 걱정하는 동안 어느 사이 나는 우리 집 문 앞에 서있다.
최미자
2005년 현대문예와 수필시대 수필 신인상
2011년부터 현재까지 컬럼니스트로 활동
저서 방일영 문화재단 언론인 출판지원금으로 발행한
세 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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