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그 아름다움

2005.02.23 13:15

이영열 조회 수:63 추천:10

여백, 그 아름다움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중급반 이영열


잎새를 다 떨궈버리고 빈 마음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배경이 되어주는 그림이 있기 때문일 게다. 찬란하게 비춰주는 햇빛과 푸드득 푸드득 날아드는 새들이 있고, 맑고 푸른 하늘과 두둥실 떠있는 구름, 이런 여백이 있기에 나무는 더욱 아름답다. 나무들로만 빽빽이 들어차 있다면 답답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림이 되어주는 허공과 솟아오르는 빛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앙증맞은 화초들이 즐비한 내 뜰이 새삼 아름답다. 큰 화분이 햇빛 스미는 창가를 다 가렸다면 거대한 앞 동의 창문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산자락에서 복숭아꽃이 활짝 필 때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며, 은은하게 퍼져오는 향기를 맡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가을에 황금물결을 이루는 풍경 또한 볼 수 없을 것이다. 확 트인 시야가 있고 빈 공간이 있어서 여백의 풍경은 한층 빛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그림들을 볼 수 있게 버티칼을 항상 열어 놓는다. 개나리와 벚꽃이 피고 진달래, 철쭉을 비롯한 온갖 들꽃이 피는 봄이 오면 산이 아름다워서 상춘객들의 발길은 바빠진다. 그러나 꽃이 피어서 산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지저귀는 새들과 빈 하늘, 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배경이 되어 꽃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들이 산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는 것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꽃만 보아서는 아니 되고, 산의 아름다움도 산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꽃과 산의 배경이 되는 허공과 여백을 함께 볼 수 있어야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 아는 눈을 뜰 수가 있다. 거실 한 자리를 차지한 낡은 소파를 눈 딱 감고 치워버렸다. 그런 뒤에 넓은 공간을 참 요긴하게 활용한다.

둥글둥글 게으름도 피워보고, 한쪽에선 낮잠도 자고, 닮은꼴인 두 부자가 텔레비전을 보아도 그리 싫지만은 않다. 내가 어릴 적에 넓은 바다와 푸른 산을 배경으로 살아서인지 폐쇄공간이나 집안에 물건을 가득 채워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서랍장, 주방수납장, 책장 등 아직도 빈 공간이 많다. 냉장고도 김치 몇 통만 꺼내면 텅 빈다. 이러한 빈 공간은 많을수록 좋을 듯하다. 어떠한 자리, 무언가가 꼭 중요하게 들어갈 자리가 비워있지 않으면 허탈하고 서글픔이 밀려올지 모르니까.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빈 마음 없이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주려는 마음과 받으려는 마음이 엉키고 할퀴며 서로 상처만 줄지 모른다. 싸움터로 나가는 중무장한 무사보다는 조금은 틈이 보이는 누구나 포용할 수 있는 헐렁한 마음이 더 정겹고 아름답다. 가진 것이 많으면서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내는 것이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마음일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황폐해져간다. 버릴수록 우리 마음도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잘 모른다. 비워진 마음과 여백이 많을수록 우리의 삶도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얼마의 세월이 더 흐르고, 얼마나 더 비우고 버려야 알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2005.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