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의 억새
2005.03.11 10:01
전주천의 억새꽃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중급반 이선운
전주천의 산책로는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칼바람이 불어 몹시 춥다. 때로는 냇물이 얼기도 하고 시내보다 더 추위를 느끼게 된다.
겨울에 이 길을 걷노라면 위안을 주는 꽃이 있다. 억새꽃이다. 억새꽃은 주로 산기슭 비탈진 양지바른 언덕배기에서 주로 살지만 전주천 산책로 주변의 억새꽃은 전주천을 살리려고 일부러 심은 것이다. 천변 산책로는 원래 습지이기 때문에 갈대꽃이 많이 있어야하는데 갈대꽃은 별로 없다. 그 대신 억새꽃이 성하여 가을과 초겨울 천변 길을 걷다보면 산에 오른 기분이 든다. 산에 가지 않고도 억새꽃을 볼 수가 있어 더더욱 이색적이다. 억새 잎은 가장자리에 칼날 같은 미세한 톱니바퀴가 있어 잎새를 잘못 만지면, 쏘가리에게 쏘이듯 손을 베기도 한다. 잎과 줄기가 억세어 강인함을 보여주지만 꽃은 부드러운 새하얀 솜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억새꽃은 초가을에 보들보들한 순한 얼굴을 내밀고, 바람결에 흔들리며 하늘하늘 손짓을 한다. 가을이 깊어 갈 무렵이면 억새꽃은 만발한다. 서리가 내리고 나면 꽃송이의 모양새가 부풀어 하얀 솜사탕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사먹던 솜사탕을 연상케 한다. 초등학교시절 운동회 때마다 학교 운동장 앞에서 솜사탕을 팔았다. 나무젓가락에 하얀 솜털 같은 설탕연사를 뽑아 둘둘 말아서 부풀려 만든 그 모양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한 입에 먹지 못하고 조금씩 베어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아 꿀맛이었다.
나에겐 이 전주천 산책길이 얼마나 좋은가. 한가한 산책길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여 너무나 즐겁다. 나는 이 솜사탕 같은 길을 한없이 걷는다. 내 어린 시절로 줄달음질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잠시나마 티 없이 맑고 고운 그 시절로 되돌아가 내 마음도 때묻지 않은 억새꽃 홀씨처럼 바람 타고 뜬구름처럼 둥둥 떠가는 듯하다. 내 고향에서는 억새를 베어다가 발을 엮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볏짚 지붕보다 수명이 10년 이상이나 더 길어서 지붕재료로 쓰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느 시골을 가도 억새지붕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억새꽃은 열매가 없이 꽃씨와 뿌리로 대물림하며 번식한다. 다른 꽃들은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를 먹게 하여 그 속의 씨앗으로 종족보존을 하지만, 억새꽃은 다른 꽃에 비하여 화려하지 않고 향기도 없다. 그러나 갈대꽃은 갈색인데 비하여 억새꽃은 색깔이 은백색이어서 더 화려하다. 키를 넘는 억새는 기린의 목처럼 길다랗고 하얀 공작의 깃털 같은 깃발을 세우고 있다. 나를 보고 환영하듯 눈부신 햇살 아래 바람의 장단과 가락에 따라 부드러운 몸짓으로 너울너울 춤을 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정겹고 환상적이다. 나는 건강을 위해 전주천 산책로에 가면, 반겨주는 억새가 있어서 행복하다.
억새꽃은 번식의 수단으로 꽃씨 알갱이가 다 익게 되면 바람이 불 때마다 홀씨가 되어 제 둥지를 떠나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 내리면 거기에 터를 잡고 다음해에 발아하여 번식한다. 억새꽃대는 홀씨와의 이별이 슬퍼서 바람이 불 때면 그토록 슬피 우는 지도 모른다.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이 노랫말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슬픈 소리를 묘사하여 만든 가사이리라. 그렇다. 역시 가을은 슬프고 쓸쓸한 계절이다. 또 이 추운 겨울, 생명이 떠난 억새꽃줄기는 바싹 말라 버린 노인처럼 텅 빈 둥지만 지키고 있다. 억새꽃도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과 같은 게 아닐까. 아직도 씨앗을 다 날려보내지 못한 억새꽃들은 생명이 다한 마른 줄기에 매달려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 있다.
뒤늦게 핀 억새꽃에 서리가 내리자 억새는 성장을 멈추고 여물지 못한 씨앗은 줄기에 단단히 말라붙어 바람이 불어도 날지 못한 것 같다. 때를 놓치면 씨앗으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공해에 찌든 도심 속의 땅이 아니라 척박한 자갈 땅 하천부지에 강제로 이주해온 억새의 삶이 안쓰럽다.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고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잘 적응하여 강인하게 살아가는 억새가 부럽기도 하다. 고향의 향수가 마냥 그리워지겠지만 이곳에 정붙이고 살면 또 고향이 되리라. 갈대꽃의 고향인 습지에 억새꽃이 이사와서 살고 있는 전주천은 아름다운 시민의 쉼터다.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는 전주천은 날마다 나를 유혹한다. (2005. 2. 17)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중급반 이선운
전주천의 산책로는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칼바람이 불어 몹시 춥다. 때로는 냇물이 얼기도 하고 시내보다 더 추위를 느끼게 된다.
겨울에 이 길을 걷노라면 위안을 주는 꽃이 있다. 억새꽃이다. 억새꽃은 주로 산기슭 비탈진 양지바른 언덕배기에서 주로 살지만 전주천 산책로 주변의 억새꽃은 전주천을 살리려고 일부러 심은 것이다. 천변 산책로는 원래 습지이기 때문에 갈대꽃이 많이 있어야하는데 갈대꽃은 별로 없다. 그 대신 억새꽃이 성하여 가을과 초겨울 천변 길을 걷다보면 산에 오른 기분이 든다. 산에 가지 않고도 억새꽃을 볼 수가 있어 더더욱 이색적이다. 억새 잎은 가장자리에 칼날 같은 미세한 톱니바퀴가 있어 잎새를 잘못 만지면, 쏘가리에게 쏘이듯 손을 베기도 한다. 잎과 줄기가 억세어 강인함을 보여주지만 꽃은 부드러운 새하얀 솜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억새꽃은 초가을에 보들보들한 순한 얼굴을 내밀고, 바람결에 흔들리며 하늘하늘 손짓을 한다. 가을이 깊어 갈 무렵이면 억새꽃은 만발한다. 서리가 내리고 나면 꽃송이의 모양새가 부풀어 하얀 솜사탕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사먹던 솜사탕을 연상케 한다. 초등학교시절 운동회 때마다 학교 운동장 앞에서 솜사탕을 팔았다. 나무젓가락에 하얀 솜털 같은 설탕연사를 뽑아 둘둘 말아서 부풀려 만든 그 모양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한 입에 먹지 못하고 조금씩 베어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아 꿀맛이었다.
나에겐 이 전주천 산책길이 얼마나 좋은가. 한가한 산책길이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여 너무나 즐겁다. 나는 이 솜사탕 같은 길을 한없이 걷는다. 내 어린 시절로 줄달음질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잠시나마 티 없이 맑고 고운 그 시절로 되돌아가 내 마음도 때묻지 않은 억새꽃 홀씨처럼 바람 타고 뜬구름처럼 둥둥 떠가는 듯하다. 내 고향에서는 억새를 베어다가 발을 엮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볏짚 지붕보다 수명이 10년 이상이나 더 길어서 지붕재료로 쓰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느 시골을 가도 억새지붕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억새꽃은 열매가 없이 꽃씨와 뿌리로 대물림하며 번식한다. 다른 꽃들은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를 먹게 하여 그 속의 씨앗으로 종족보존을 하지만, 억새꽃은 다른 꽃에 비하여 화려하지 않고 향기도 없다. 그러나 갈대꽃은 갈색인데 비하여 억새꽃은 색깔이 은백색이어서 더 화려하다. 키를 넘는 억새는 기린의 목처럼 길다랗고 하얀 공작의 깃털 같은 깃발을 세우고 있다. 나를 보고 환영하듯 눈부신 햇살 아래 바람의 장단과 가락에 따라 부드러운 몸짓으로 너울너울 춤을 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정겹고 환상적이다. 나는 건강을 위해 전주천 산책로에 가면, 반겨주는 억새가 있어서 행복하다.
억새꽃은 번식의 수단으로 꽃씨 알갱이가 다 익게 되면 바람이 불 때마다 홀씨가 되어 제 둥지를 떠나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 내리면 거기에 터를 잡고 다음해에 발아하여 번식한다. 억새꽃대는 홀씨와의 이별이 슬퍼서 바람이 불 때면 그토록 슬피 우는 지도 모른다.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이 노랫말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슬픈 소리를 묘사하여 만든 가사이리라. 그렇다. 역시 가을은 슬프고 쓸쓸한 계절이다. 또 이 추운 겨울, 생명이 떠난 억새꽃줄기는 바싹 말라 버린 노인처럼 텅 빈 둥지만 지키고 있다. 억새꽃도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과 같은 게 아닐까. 아직도 씨앗을 다 날려보내지 못한 억새꽃들은 생명이 다한 마른 줄기에 매달려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 있다.
뒤늦게 핀 억새꽃에 서리가 내리자 억새는 성장을 멈추고 여물지 못한 씨앗은 줄기에 단단히 말라붙어 바람이 불어도 날지 못한 것 같다. 때를 놓치면 씨앗으로서 제구실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공해에 찌든 도심 속의 땅이 아니라 척박한 자갈 땅 하천부지에 강제로 이주해온 억새의 삶이 안쓰럽다.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고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잘 적응하여 강인하게 살아가는 억새가 부럽기도 하다. 고향의 향수가 마냥 그리워지겠지만 이곳에 정붙이고 살면 또 고향이 되리라. 갈대꽃의 고향인 습지에 억새꽃이 이사와서 살고 있는 전주천은 아름다운 시민의 쉼터다. 억새꽃이 장관을 이루는 전주천은 날마다 나를 유혹한다. (2005. 2. 17)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 | 전주천의 억새 | 이선운 | 2005.03.11 | 42 |
| 33 | 보석 같은 친구 | 김경녀 | 2005.03.11 | 42 |
| 32 | 첫 수업 첫 느낌 | 이인기 | 2005.03.11 | 50 |
| 31 | 지붕을 수리하는 집 | 조명택 | 2005.03.10 | 119 |
| 30 | 고향에 온 봄 | 김병규 | 2005.03.09 | 60 |
| 29 | 곁에 있기만 해도 미더운 사람 | 김정자 | 2005.03.09 | 53 |
| 28 | 세탁기 | 박영임 | 2005.03.08 | 37 |
| 27 | 3월에 띄우는 편지 | 이은재 | 2005.03.08 | 48 |
| 26 | 입학의 달 3월은 | 김학 | 2005.03.08 | 90 |
| 25 | 당돌한 10대 | 유영희 | 2005.03.08 | 48 |
| 24 | 103강의실을 찾아가던 날 | 신영숙 | 2005.03.07 | 36 |
| 23 | 섬김의 향기 | 조명택 | 2005.03.04 | 44 |
| 22 | 토실이 | 박영임 | 2005.03.03 | 36 |
| 21 | 새벽 아르바이트 | 유영희 | 2005.02.27 | 132 |
| 20 | J씨의 꿈 | 유영희 | 2005.02.27 | 45 |
| 19 | 어머니의 세뱃돈 | 고재흠 | 2005.02.27 | 38 |
| 18 | 수필과 음식솜씨에 대하여 | 이정림 | 2005.02.26 | 49 |
| 17 | 여백,그 아름다움 | 이영열 | 2005.02.23 | 63 |
| 16 | 색연필 이야기 | 김정희 | 2005.02.23 | 68 |
| 15 | 할아버지 보시옵소서 | 김학 | 2005.02.20 | 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