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세뱃돈
2005.02.27 11:27
어머니의 세뱃돈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고급반 고 재 흠
설날 세뱃돈으로 지폐 2장을 받았다. 해마다 설날이면 어머니로부터 세뱃돈을 받는다. 이렇게 세뱃돈을 받아온 것이 벌써 70여 년이 넘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고르라면 사랑·평화·행복·희망 등 수많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라 할지라도 시간과 장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입지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를 것이다. 때로는 싫증을 느끼기도 하고 단어 자체를 바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단어는 동서양을 떠나서 어떠한 시대상황이나 변천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영국의 문화원이 비 영어권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가장 친근감이 가는 영어단어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1위를 차지한 단어가 바로 마더(mother) 즉 어머니란 단어였다고 한다. 그 조사에서 아버지란 말은 70위 권 밖으로 밀려났다고 하니 어머니란 말은 아버지란 말에 견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친근감을 준다.
"어머니, 어머니!"
언제 어디서 불러 보아도 한없이 포근하고 항상 가슴이 따뜻해지는 단어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라는 단어 속에는 평화와 사랑·행복·희망이란 말이 모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집은 전통적으로 유교를 숭상하는 대가족제도다. 설날은 할아버지 아래 손들만 수십 명이 모여 세배를 드린다. 어린 시절에는 세뱃돈 받는 재미로 설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고, 설날이면 공손히 절을 하였다. 어른이 된 이후로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세뱃돈을 지갑에 잘 보관하였다가 또 다음 해를 기다렸다. 이것은 연례행사처럼 이어져왔다.
학자로서 위엄을 갖추신 아버지는 설날이면 가슴에 깊이 간직해야 할 덕담을 주셨다. 항상 정의를 지키고, 형제자매간에 화목하며, 인간의 도리를 다해야한다는 교훈을 주셨다. 술을 아주 좋아하셨지만 88세를 일기로 9년 전 세상을 뜨셨다. 그 후 나에게 세뱃돈을 주실 분은 오직 어머니 한 분밖에 아니 계신다. 나는 올 설날에 자녀 손자손녀 조카 등 수십 명에게 세뱃돈을 주고 덕담도 건넸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의 순환의 이치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세수 94세가 되신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텔레비전도 보지 않으시고,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으시던 귀거래사도 잊으셨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숱한 삶의 편린들이 거의 삭제되어버린 듯싶다. 나의 노모는 그저 먹고 자며 고향집에 데려다 달라는 말만으로 일관하신다. 정말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이실 뿐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뇌 세포가 많이 손상된 어머니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자가 누려야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셨다.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에서 검불 같은 노구(老軀)로 활동하기도 귀찮고 힘겨워하시며 많은 날을 방안에서만 지내신다.
정체된 삶 닫혀 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 채 겨울을 건너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신다. 생명공학이 고도로 발달되었어도 뇌 세포의 생성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니 정말 아쉽기 짝이 없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따스한 감정이 또 모든 사람들과 공통된다는 점에서 어머니 사랑이 태산같다고 표현할 것이다.
나는 유달리 어렸을 적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많다. 깊은 밤 어머니 등에 업혀 칭얼거리면 곶감 하나 주시며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하나 둘 세어 보라고 하신 말씀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인간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최초의 스승이 어머니다. 어머니의 품안은 어린이의 학교요 교과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요, 내가 가진 많은 결점은 어머니의 교훈을 저버린 내 탓이리라…….
어머니의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다고 되뇌면서도 그 은혜와 사랑을 잊은 채 살고 있다. 현대와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년 이맘때도 어머니로부터 또 세뱃돈을 받을 수 있을까? 오늘도 세뱃돈으로 받은 지폐 두 장을 지갑 속에 부적처럼 간직하고 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빌고 또 빈다.
(2005. 2. 12)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고급반 고 재 흠
설날 세뱃돈으로 지폐 2장을 받았다. 해마다 설날이면 어머니로부터 세뱃돈을 받는다. 이렇게 세뱃돈을 받아온 것이 벌써 70여 년이 넘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고르라면 사랑·평화·행복·희망 등 수많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라 할지라도 시간과 장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입지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를 것이다. 때로는 싫증을 느끼기도 하고 단어 자체를 바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단어는 동서양을 떠나서 어떠한 시대상황이나 변천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다. 영국의 문화원이 비 영어권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가장 친근감이 가는 영어단어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1위를 차지한 단어가 바로 마더(mother) 즉 어머니란 단어였다고 한다. 그 조사에서 아버지란 말은 70위 권 밖으로 밀려났다고 하니 어머니란 말은 아버지란 말에 견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친근감을 준다.
"어머니, 어머니!"
언제 어디서 불러 보아도 한없이 포근하고 항상 가슴이 따뜻해지는 단어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라는 단어 속에는 평화와 사랑·행복·희망이란 말이 모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집은 전통적으로 유교를 숭상하는 대가족제도다. 설날은 할아버지 아래 손들만 수십 명이 모여 세배를 드린다. 어린 시절에는 세뱃돈 받는 재미로 설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고, 설날이면 공손히 절을 하였다. 어른이 된 이후로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세뱃돈을 지갑에 잘 보관하였다가 또 다음 해를 기다렸다. 이것은 연례행사처럼 이어져왔다.
학자로서 위엄을 갖추신 아버지는 설날이면 가슴에 깊이 간직해야 할 덕담을 주셨다. 항상 정의를 지키고, 형제자매간에 화목하며, 인간의 도리를 다해야한다는 교훈을 주셨다. 술을 아주 좋아하셨지만 88세를 일기로 9년 전 세상을 뜨셨다. 그 후 나에게 세뱃돈을 주실 분은 오직 어머니 한 분밖에 아니 계신다. 나는 올 설날에 자녀 손자손녀 조카 등 수십 명에게 세뱃돈을 주고 덕담도 건넸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의 순환의 이치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세수 94세가 되신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텔레비전도 보지 않으시고,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침이 마르도록 읊으시던 귀거래사도 잊으셨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숱한 삶의 편린들이 거의 삭제되어버린 듯싶다. 나의 노모는 그저 먹고 자며 고향집에 데려다 달라는 말만으로 일관하신다. 정말 원초적인 본능에 따라 움직이실 뿐이다.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뇌 세포가 많이 손상된 어머니는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자가 누려야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셨다.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에서 검불 같은 노구(老軀)로 활동하기도 귀찮고 힘겨워하시며 많은 날을 방안에서만 지내신다.
정체된 삶 닫혀 버린 시간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한 채 겨울을 건너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신다. 생명공학이 고도로 발달되었어도 뇌 세포의 생성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니 정말 아쉽기 짝이 없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따스한 감정이 또 모든 사람들과 공통된다는 점에서 어머니 사랑이 태산같다고 표현할 것이다.
나는 유달리 어렸을 적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많다. 깊은 밤 어머니 등에 업혀 칭얼거리면 곶감 하나 주시며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하나 둘 세어 보라고 하신 말씀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인간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만나는 최초의 스승이 어머니다. 어머니의 품안은 어린이의 학교요 교과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이요, 내가 가진 많은 결점은 어머니의 교훈을 저버린 내 탓이리라…….
어머니의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다고 되뇌면서도 그 은혜와 사랑을 잊은 채 살고 있다. 현대와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년 이맘때도 어머니로부터 또 세뱃돈을 받을 수 있을까? 오늘도 세뱃돈으로 받은 지폐 두 장을 지갑 속에 부적처럼 간직하고 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빌고 또 빈다.
(200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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