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씨의 꿈

2005.02.27 15:28

유영희 조회 수:45 추천:3

J씨의 꿈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유영희


J씨는 올해 45세를 맞는 전신마비 환자이다. 교통사고로 경추를 다쳐 온몸이 마비된 지가 올해로 꼬박 18년째인가 보다. J씨는 그래도 복이 많은 남자이다. 긴 세월을 변함 없이 남편 곁을 지극 정성으로 지키는 아내가 있으며, 튼실하게 성장한 두 아들이 있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게 무에 큰복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전신마비가 되어버린 남편과 아빠의 곁을 지키는 가족은 참으로 드물지 싶다. 어쨌든 J씨를 볼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마누라 복을 타고 난  건 확실하다.

그는 손발을 전혀 쓸 수가 없다. 밥을 먹거나 물을 마시는 일도 전부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야 한다. 그의 아내는 아침이면 남편을 업어 전동 휠체어에 앉혀 안전띠로 정성스럽게 묶어준다.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만 보아도 큰 키에 좋은 등치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을 업어 차에 태우고 내리는 아내의 체구는 암만 봐도 고목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아담한 사이즈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터득한 18년의 노하우가 있어서 남편을 거뜬히 업어 나른다. 누군가 남편을 찾아오면 그녀는 늘 식사준비를 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천성도 있지만 남편 곁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묶어두려는 배려임이 분명하다.

고생스럽다느니 혹은 살아온 세월을 한스러워할 법도 한데 그의 아내는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다. 남편이 요구하면 요령 좋게 남편을 봉고 차 앞에 태우고 뒤칸에 전동 휠체어를 싣고는 드라이브를 나간다. 전북 도내 차가 다닐 수 있는 곳에 J씨의 휠체어가 지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언뜻 보면 무표정한 것 같은 아내의 얼굴은 사실은 변함이 없는 특유의 표정이다. 웬만해선 화를 내는 법이 없고, 조금 좋다고 경망스레 좋다는 티를 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열어준 사람을 향해서는 백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듯한 신뢰를 주는 그녀이다.

그런 아내와 가족이 있어서 J씨가 늘 당당하게 사는 줄 알았다. 물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때도 없지는 않다. 한창 일할 수 있는 이십대 후반에 전신마비 환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의지해서 살아야만 하는 삶. 의식은 멀쩡해 오감[五感]에 대한 뇌의 반응은 참으로 왕성하지만 마음뿐이며 따를 수 없는 몸. 그가 처한 조건만 듣고는 처음에는 J씨를 만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혹여 그를 만났을 때 잘못된 처신으로 가뜩이나 아픈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만 만나고 나면 이후엔 그를 만나는 걸 아무도 꺼려하지 않는다. 거침없는 유머와 그의 넉살에 마음마저 후련함을 느끼게 된다.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 나는 남편과 함께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공원 입구에 들어섰을 때 전동 휠체어를 타고 빵 모자에, 마스크를 착용한 J씨가 보였다. 이름을 부르는 우리를 향해 그는 눈이 다 감기는 웃음을 보내주었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다섯 손가락에 공들여 아내가 끼워준 장갑을 낀 채 남편과 악수를 주고받는다. "흠! 내가 이 시간에 J씨를 만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 그는 힘겹게 마스크를 벗기며 가지런한 이를 다 드러내 보인다.

"웬만하면 건강을 위해서 바깥바람 쐬러 나와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건강을 지켜야 나중에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이식할 수 있잖아요?" 그는 TV에서나 보았던 줄기세포 이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희망을 말한다. 나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만 같아 코웃음을 웃었다. "저요. 그 날을 위해서 지금 발 마사지 받아요. 신경이 다 죽었는데도 받고 나면 온 몸에 땀이 줄줄 흘러요. 한달 정도 받았는데 꺼멓던 다리랑 발이 색깔이 변했어요." 남편은 J씨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열심히 노력해서 꼭 줄기세포 이식 받고 두 발로 걸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손을 꼭 쥐어 준다.

그가 가진 희망 앞에서 경건한 기분마저 느꼈다. 조금만 아픔이 찾아오면 스스로 넘어지길 자청하는 나와, 그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가올 투병의 두려움에 젖어 발을 내딛기를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는 언제가 될지도 모를 꿈의 의학을 희망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밝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동터오는 햇빛을 보듯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J씨를 이끌어 가는 힘은 절망 속에서도 그의 가슴 안에서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희망인 것이다.

저녁나절 남편의 타박이 이어졌다. "J씨 좀 본 받아봐. 그 친구는 당신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도 줄기세포 이식을 꿈꾸며 희망을 안고 사는데, 당신은 걸핏하면 주저앉을 생각부터 하드라." J씨가 안고 있는 희망에 경건한 기분을 느꼈는데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J씨가 꼭 줄기세포 배양과 이식에 성공하여 튼튼한 두 다리로 뚜벅뚜벅 걸을 날을 기다려 본다. 그가 보여 주었던 아침햇살 같은 희망을 받아들여 나도 2005년 올해에는 힘찬 발걸음을 찍어 볼 참이다.(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