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법원의 가을편지
2005.09.12 07:16
대전법원의 가을편지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이은재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
.............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에메랄드 빛 하늘이 출렁이는 그리운 날엔 유치환의 '행복'이란 詩를 읊는다. 가을의 음표가 그려진 오선지에 편지를 쓰고, 시크릿 가든의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다. 가을은 기다리고 아끼는 이에게 먼저 온다고 하였던가. 태풍 나비가 살며시 즈려밟고 지나간 하늘 저편엔 가을이 있었다. 여름내 청사 뜨락에서 뽐내던 채송화도 사위어 가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폭포처럼 함성 치던 매미 소리도 멀어져 가는 9월에 대전시민과 법조가족을 위한 '대전법원가족 열린음악회'가 대전법원청사 5층 대 회의실에서 열렸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조영창 초청공연에서 세련된 앙상블로 호평을 받고, 풍부한 화성감과 견고한 균형감각으로 실내악의 정수인 바로크 음악을 집중분석, 연주하는 정열적인 ‘챔버플레이어스21’ 실내악단이 연주하는 엘가의 '사랑의 인사'와 드보르작 '유모레스크’를 시작으로 음악회의 서막이 울렸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그의 아내 '앨리스'가 약혼녀였을 때 작곡한 것으로 엘가를 음악가로 대성하게 도와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래서인지 흐르는 음악의 선율 속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그윽한 시선이 잔잔히 묻어 있다. 민족적 의식이 투철한 국민악파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는 익살, 우스꽝스러움을 뜻하는 유머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도 항상 고국, 체코를 그리워했다. 미국 국립 음악원장으로 재직 중 휴가차 들른 고국에서 그리움에 사무쳐 작곡한 곡이 ‘유모레스크‘이다. 고국에 대한 향수가 담겨져서인지 익살스럽고 경쾌한 리듬 사이로 간간이 슬픔이 묻어 난다. '신세계교향곡' 중 ‘꿈속의 고향’도 조국을 향한 드보르작의 향수가 짙게 배어 애틋하다.
이어서 현소영 첼리스트의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과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첼로독주가 연주되었다. ‘자클린의 눈물’을 들으면 애처롭게 살다간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의 삶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겁다. 항간에는 오펜바흐가 자클린을 추모하기 위해 자클린의 눈물을 작곡하였다고 하나, 자클린 뒤프레는 1946~1987에 생존했던 인물이고, 오펜바흐는 1819~1880년에 생존했던 인물임을 비추어 볼 때 오펜바흐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추측은 낭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자클린의 눈물'을 들으면 자클린 뒤프레의 기구한 삶이 연상된다.
그녀가 족적을 남긴 삶의 궤적은 불운한 어느 예술가와는 또 다른 슬픔이 증폭되어 있다. 모든 근육이 마비되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점점 조여 오는 근육과 싸우며 투병 중에 있을 때 남편도 떠나고 명성마저 외면당한 채 홀로 버려졌던 비련의 첼리스트, 그녀는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분신인 첼로를 놓은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곡 전체에 흐르는 서정적인 아름다움도 자클린 뒤프레의 삶과 접목되면 몽환적인 페시미즘에 빠져들어 흐느끼게 된다. 현소영 첼리스트가 연주한 ‘자클린의 눈물’ 독주는 첼로만이 연주할 수 있는 묵직한 저음 위로 끓어오르는 슬픔의 선율이 반복되면서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비탈리'의 ‘샤콘느’ 만큼이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자클린이 누군지 오펜바흐에게 묻고 싶다는 사회자의 말처럼 나 또한 묻고 싶었다. 도대체 자클린이 누구이기에 이토록 슬픈 눈물을 흐르게 하느냐고……. 첼리스트 ‘장한나’는 자클린 뒤프레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듣고서 피아노에서 첼로로 바꿔 오늘날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는 뜻의 라틴어 ‘탄게레’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의 산물인 탱고음악은 ‘자유’를 의미했다. 아르헨티나 하층민 지역에서 시작된 대담하고 섹슈얼한 탱고 음악이 유럽으로 수출되어 사교계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란한 몸의 움직임에서 귀로 듣는 음악으로 격상시킨 사람이 '리베르탱고'를 작곡한 '피아졸라'다. 이로써 춤곡으로만 인식되었던 탱고는 피아졸라의 천부적인 변혁으로 당당히 음악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리베르탱고는 타이완계 프랑스 첼리스트 ‘요요마’가 연주해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첼로의 음색과 탱고의 중심악기인 ‘반도네온’의 환상적인 조화를 오늘은 현소영의 첼로 독주로 감상하며 탱고의 날개에 푹 빠졌다.
숨소리조차 소음이 될까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하게 하는 첼로 연주가 끝나고 노금선 시인과 김명동 시인의 자작시 낭송과 듀엣으로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시 낭송이 있었다. 농염한 조명과 운치 있는 음악의 배경 속에 아름다운 언어를 속삭이는 시 낭송에 마음이 헤집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삶을 살아가면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 보고 싶으면 꺼내보는 흑백 사진 속에 담겨있는 반가운 얼굴, 시린 강을 건너는 바람으로 달려가 불화로 같은 가슴으로 한 아름 보듬어주고 싶어지는 사람, 길을 가다가 왠지 함께 걷고 싶어지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좋겠다.”는 김명동 시인의 '그리움이 담긴 사람'의 시 낭송을 들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이 가을에 함께 걷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재대학교 음악과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남성 4명으로 구성된 ‘딤색소폰 콸텟’의 색소폰 연주로 아일랜드 민요 런던데리의 노래와 렛잇비, 테이크 화이브가 연주되었다. 하얀 연주복을 갖춰 입은 색소폰 연주자들은 의상부터 매혹적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니보이'의 원제는 'Londonderry Air'이다. 아일랜드의 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소 떼와 목동의 피리소리는 목가적인 평화로운 전원풍경을 연상하게 하지만 애틋한 배경이 있는 애상의 노래다. 처음엔, 시골목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랑하는 소녀와 헤어지기 안타까워 부르는 이별의 노래였으나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애틋한 사랑노래로 개사되었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하며 듣노라면 왠지 모를 슬픔이 도사린다. 60년대 세계적인 대중음악을 풍미했던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의 ‘렛잇비’는 그룹의 멤버 중 하나인 폴 매카트니가 일찍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위해 만든 곡이다. ‘렛잇비, 그대로 두거라’ 간섭받기 싫던 젊은 시절에 비틀즈의 렛잇비를 보루로 내세우며 흥얼대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인 ‘데이브 브루벡’의 ‘Take five’는 5분간의 휴식처럼 흥겨운 휴식을 준다. 스윙재즈에서 보다 자유로운 재즈의 미학을 제시하고 있는 데이브 브루벡의 테이크 화이브는 유연하게 펼쳐지는 터치와 감미로운 멜로디에 어깨가 절로 흥겹다. 무대의 색소폰 연주자들도 흥겨운 듯 무희처럼 발을 구르고 관객도 어깨춤이 덩실거리는 흥겨운 한마당이었다.
“구름 가네 구름 가네 강을 건너 구름 가네/그리움에 날개 펴고 산 너머로 구름 가네/ 구름이야 날개 펴고 산 너머로 가련만은 /그리움에 목이 메어 나만 홀로 돌이 되네…….” 박목월 작시 이수인 작곡 ‘그리움’을 듣노라면 인생무상을 느낀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인생도 정처 없이 흘러가다가 우연히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 속에 돌아보면 그리움만 남게 된다. 훤칠하게 잘 생긴 균형 잡힌 몸매와 또 목소리까지 고운 테너 박영범을 사회자가 몹시 부러워했다. ‘그리움’과 ‘넌 왜 울지 않고’를 부른 테너 박영범의 우아하도록 감미롭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소프라노 신수정이 부른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는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알미레나’와 십자군의 영웅 ‘리날도’의 사랑 이야기다. 또 영화 ‘파리넬리’에서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가 부른 노래다. 파리넬리는 실존하는 카스트라토이다. 카스트라토란 거세된 남성 소프라노를 말한다. 18세기의 유럽 교회에서 여성은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소프라노 음역을 대신할 남성 소프라노를 만들기 위해 변성기가 오기 전 거세당한 남성가수가 카스트라토이다. 파리넬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카스트라토였다. 음악을 위해 남성을 잃어야 했던 파리넬리의 순교자적인 예술의 혼이 애틋하기만 하다. 헨델은 파리넬리의 목소리에 감동해서 그를 위한 오페라 ‘리날도’를 작곡했다고 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명 작사, 김동진 작곡 ‘내 마음’을 부른 소프라노 신수정의 고운 자태에 눈이 부셨다. 맨살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와 긴 머리를 한 소프라노 신수정의 섬세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몰입되었다. 가냘픈 몸짓에서 어떻게 저런 높은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아름다운 건 축복이다. 고운 자태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도 덩달아 행복했다. 테너 박영범과 소프라노 신수정이 듀엣으로 부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는 음악회 축제의 극치를 이뤘다.
귀족들의 오락을 위하여 작곡된 디베르티멘토는 기분전환이란 뜻으로 희유곡(嬉遊曲)이라고도 부르는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이 유명하다. 생동감 있고 경쾌한 선율 속에 들어와 있으면 정말 진부하고 우울한 기분이 말끔히 전환된다. 아침에 아이들이 졸릴 때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디베르티멘토 1번을 틀어주면 졸린 눈을 번쩍 뜨곤 했다. 챔버플레이어스21 악단이 모차르트 작곡 디베르티멘토 1번을 경쾌하게 수놓으며 무대의 조명은 서서히 꺼졌다.
음악이 오선지에 적힌 악보를 따라 규칙적인 선율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법원의 재판은 육법전서에 적힌 법규를 현실화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고,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성을 착하게 만드는 효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 사회를 편안하고 밝게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작은 음악의 향연이 아름다운 선율로 아로새겨져 시민으로부터 사랑 받는 대전법원이 되기를 바란다는 초대의 글과 함께 대전 MBC 전문MC 김주홍의 사회로 1시간 30여 분간 진행된 음악회는 대 성황이었다. 클래식과 재즈음악, 가곡, 시 낭송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장르를 망라해 가을의 정서를 한껏 충족할 수 있었던 음악회는 대 만족이었다.
수많은 훈계보다 한 곡조의 음악이 마음을 더 사로잡는다. 아들 녀석이 다녔던 중학교 화장실에선 음악이 흘렀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아이들이 폭발물을 터트릴 수 있는 장소가 화장실이었나 보다. 교장선생님은 그 점을 감지하고 화장실에 음악이 흐르도록 했다. 용변을 보는 동안 대립과 분노로 점철되었던 아이들의 마음은 평온한 음악과 함께 녹아졌다는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학부모교육 때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우리 법원도 법정에서 당사자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이나 휴정 때 잠깐 음악을 들려준다면 당사자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시민들에게는 딱딱하다는 느낌을 주는 법원의 모습도 음악이라는 예술적 정서를 시민들과 공유하며 밀착될 때 그 이미지가 달라질 것이다. 좀 더 시민에게 다가가는 열린 사법부의 모습을 보여준 대전법원의 열린 음악회는 이런 맥락에서 참신한 열정의 소산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대전법원의 가을편지와 노래를 받은 대전 시민과 법조가족들의 올 가을은 그 어느 해보다도 풍요로울 것이다. 사각사각 단풍드는 갈잎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이은재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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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에메랄드 빛 하늘이 출렁이는 그리운 날엔 유치환의 '행복'이란 詩를 읊는다. 가을의 음표가 그려진 오선지에 편지를 쓰고, 시크릿 가든의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다. 가을은 기다리고 아끼는 이에게 먼저 온다고 하였던가. 태풍 나비가 살며시 즈려밟고 지나간 하늘 저편엔 가을이 있었다. 여름내 청사 뜨락에서 뽐내던 채송화도 사위어 가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폭포처럼 함성 치던 매미 소리도 멀어져 가는 9월에 대전시민과 법조가족을 위한 '대전법원가족 열린음악회'가 대전법원청사 5층 대 회의실에서 열렸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조영창 초청공연에서 세련된 앙상블로 호평을 받고, 풍부한 화성감과 견고한 균형감각으로 실내악의 정수인 바로크 음악을 집중분석, 연주하는 정열적인 ‘챔버플레이어스21’ 실내악단이 연주하는 엘가의 '사랑의 인사'와 드보르작 '유모레스크’를 시작으로 음악회의 서막이 울렸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그의 아내 '앨리스'가 약혼녀였을 때 작곡한 것으로 엘가를 음악가로 대성하게 도와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래서인지 흐르는 음악의 선율 속엔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그윽한 시선이 잔잔히 묻어 있다. 민족적 의식이 투철한 국민악파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는 익살, 우스꽝스러움을 뜻하는 유머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도 항상 고국, 체코를 그리워했다. 미국 국립 음악원장으로 재직 중 휴가차 들른 고국에서 그리움에 사무쳐 작곡한 곡이 ‘유모레스크‘이다. 고국에 대한 향수가 담겨져서인지 익살스럽고 경쾌한 리듬 사이로 간간이 슬픔이 묻어 난다. '신세계교향곡' 중 ‘꿈속의 고향’도 조국을 향한 드보르작의 향수가 짙게 배어 애틋하다.
이어서 현소영 첼리스트의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과 피아졸라의 ‘리베르탱고’ 첼로독주가 연주되었다. ‘자클린의 눈물’을 들으면 애처롭게 살다간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의 삶이 생각나 눈시울이 뜨겁다. 항간에는 오펜바흐가 자클린을 추모하기 위해 자클린의 눈물을 작곡하였다고 하나, 자클린 뒤프레는 1946~1987에 생존했던 인물이고, 오펜바흐는 1819~1880년에 생존했던 인물임을 비추어 볼 때 오펜바흐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추측은 낭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자클린의 눈물'을 들으면 자클린 뒤프레의 기구한 삶이 연상된다.
그녀가 족적을 남긴 삶의 궤적은 불운한 어느 예술가와는 또 다른 슬픔이 증폭되어 있다. 모든 근육이 마비되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점점 조여 오는 근육과 싸우며 투병 중에 있을 때 남편도 떠나고 명성마저 외면당한 채 홀로 버려졌던 비련의 첼리스트, 그녀는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분신인 첼로를 놓은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곡 전체에 흐르는 서정적인 아름다움도 자클린 뒤프레의 삶과 접목되면 몽환적인 페시미즘에 빠져들어 흐느끼게 된다. 현소영 첼리스트가 연주한 ‘자클린의 눈물’ 독주는 첼로만이 연주할 수 있는 묵직한 저음 위로 끓어오르는 슬픔의 선율이 반복되면서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비탈리'의 ‘샤콘느’ 만큼이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자클린이 누군지 오펜바흐에게 묻고 싶다는 사회자의 말처럼 나 또한 묻고 싶었다. 도대체 자클린이 누구이기에 이토록 슬픈 눈물을 흐르게 하느냐고……. 첼리스트 ‘장한나’는 자클린 뒤프레가 연주한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듣고서 피아노에서 첼로로 바꿔 오늘날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는 뜻의 라틴어 ‘탄게레’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의 산물인 탱고음악은 ‘자유’를 의미했다. 아르헨티나 하층민 지역에서 시작된 대담하고 섹슈얼한 탱고 음악이 유럽으로 수출되어 사교계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현란한 몸의 움직임에서 귀로 듣는 음악으로 격상시킨 사람이 '리베르탱고'를 작곡한 '피아졸라'다. 이로써 춤곡으로만 인식되었던 탱고는 피아졸라의 천부적인 변혁으로 당당히 음악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리베르탱고는 타이완계 프랑스 첼리스트 ‘요요마’가 연주해서 더욱 사랑을 받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첼로의 음색과 탱고의 중심악기인 ‘반도네온’의 환상적인 조화를 오늘은 현소영의 첼로 독주로 감상하며 탱고의 날개에 푹 빠졌다.
숨소리조차 소음이 될까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하게 하는 첼로 연주가 끝나고 노금선 시인과 김명동 시인의 자작시 낭송과 듀엣으로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시 낭송이 있었다. 농염한 조명과 운치 있는 음악의 배경 속에 아름다운 언어를 속삭이는 시 낭송에 마음이 헤집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삶을 살아가면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사람, 보고 싶으면 꺼내보는 흑백 사진 속에 담겨있는 반가운 얼굴, 시린 강을 건너는 바람으로 달려가 불화로 같은 가슴으로 한 아름 보듬어주고 싶어지는 사람, 길을 가다가 왠지 함께 걷고 싶어지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좋겠다.”는 김명동 시인의 '그리움이 담긴 사람'의 시 낭송을 들으며 나도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이 가을에 함께 걷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재대학교 음악과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남성 4명으로 구성된 ‘딤색소폰 콸텟’의 색소폰 연주로 아일랜드 민요 런던데리의 노래와 렛잇비, 테이크 화이브가 연주되었다. 하얀 연주복을 갖춰 입은 색소폰 연주자들은 의상부터 매혹적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니보이'의 원제는 'Londonderry Air'이다. 아일랜드의 넓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소 떼와 목동의 피리소리는 목가적인 평화로운 전원풍경을 연상하게 하지만 애틋한 배경이 있는 애상의 노래다. 처음엔, 시골목동이 도시로 떠나는 사랑하는 소녀와 헤어지기 안타까워 부르는 이별의 노래였으나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애틋한 사랑노래로 개사되었다.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생각하며 듣노라면 왠지 모를 슬픔이 도사린다. 60년대 세계적인 대중음악을 풍미했던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의 ‘렛잇비’는 그룹의 멤버 중 하나인 폴 매카트니가 일찍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위해 만든 곡이다. ‘렛잇비, 그대로 두거라’ 간섭받기 싫던 젊은 시절에 비틀즈의 렛잇비를 보루로 내세우며 흥얼대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인 ‘데이브 브루벡’의 ‘Take five’는 5분간의 휴식처럼 흥겨운 휴식을 준다. 스윙재즈에서 보다 자유로운 재즈의 미학을 제시하고 있는 데이브 브루벡의 테이크 화이브는 유연하게 펼쳐지는 터치와 감미로운 멜로디에 어깨가 절로 흥겹다. 무대의 색소폰 연주자들도 흥겨운 듯 무희처럼 발을 구르고 관객도 어깨춤이 덩실거리는 흥겨운 한마당이었다.
“구름 가네 구름 가네 강을 건너 구름 가네/그리움에 날개 펴고 산 너머로 구름 가네/ 구름이야 날개 펴고 산 너머로 가련만은 /그리움에 목이 메어 나만 홀로 돌이 되네…….” 박목월 작시 이수인 작곡 ‘그리움’을 듣노라면 인생무상을 느낀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인생도 정처 없이 흘러가다가 우연히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 속에 돌아보면 그리움만 남게 된다. 훤칠하게 잘 생긴 균형 잡힌 몸매와 또 목소리까지 고운 테너 박영범을 사회자가 몹시 부러워했다. ‘그리움’과 ‘넌 왜 울지 않고’를 부른 테너 박영범의 우아하도록 감미롭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소프라노 신수정이 부른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는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알미레나’와 십자군의 영웅 ‘리날도’의 사랑 이야기다. 또 영화 ‘파리넬리’에서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가 부른 노래다. 파리넬리는 실존하는 카스트라토이다. 카스트라토란 거세된 남성 소프라노를 말한다. 18세기의 유럽 교회에서 여성은 무대에 설 수 없었다. 소프라노 음역을 대신할 남성 소프라노를 만들기 위해 변성기가 오기 전 거세당한 남성가수가 카스트라토이다. 파리넬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카스트라토였다. 음악을 위해 남성을 잃어야 했던 파리넬리의 순교자적인 예술의 혼이 애틋하기만 하다. 헨델은 파리넬리의 목소리에 감동해서 그를 위한 오페라 ‘리날도’를 작곡했다고 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명 작사, 김동진 작곡 ‘내 마음’을 부른 소프라노 신수정의 고운 자태에 눈이 부셨다. 맨살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와 긴 머리를 한 소프라노 신수정의 섬세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몰입되었다. 가냘픈 몸짓에서 어떻게 저런 높은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아름다운 건 축복이다. 고운 자태와 고운 목소리에 내 마음도 덩달아 행복했다. 테너 박영범과 소프라노 신수정이 듀엣으로 부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중 '축배의 노래‘는 음악회 축제의 극치를 이뤘다.
귀족들의 오락을 위하여 작곡된 디베르티멘토는 기분전환이란 뜻으로 희유곡(嬉遊曲)이라고도 부르는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이 유명하다. 생동감 있고 경쾌한 선율 속에 들어와 있으면 정말 진부하고 우울한 기분이 말끔히 전환된다. 아침에 아이들이 졸릴 때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디베르티멘토 1번을 틀어주면 졸린 눈을 번쩍 뜨곤 했다. 챔버플레이어스21 악단이 모차르트 작곡 디베르티멘토 1번을 경쾌하게 수놓으며 무대의 조명은 서서히 꺼졌다.
음악이 오선지에 적힌 악보를 따라 규칙적인 선율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법원의 재판은 육법전서에 적힌 법규를 현실화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고,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성을 착하게 만드는 효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 사회를 편안하고 밝게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작은 음악의 향연이 아름다운 선율로 아로새겨져 시민으로부터 사랑 받는 대전법원이 되기를 바란다는 초대의 글과 함께 대전 MBC 전문MC 김주홍의 사회로 1시간 30여 분간 진행된 음악회는 대 성황이었다. 클래식과 재즈음악, 가곡, 시 낭송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장르를 망라해 가을의 정서를 한껏 충족할 수 있었던 음악회는 대 만족이었다.
수많은 훈계보다 한 곡조의 음악이 마음을 더 사로잡는다. 아들 녀석이 다녔던 중학교 화장실에선 음악이 흘렀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아이들이 폭발물을 터트릴 수 있는 장소가 화장실이었나 보다. 교장선생님은 그 점을 감지하고 화장실에 음악이 흐르도록 했다. 용변을 보는 동안 대립과 분노로 점철되었던 아이들의 마음은 평온한 음악과 함께 녹아졌다는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학부모교육 때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우리 법원도 법정에서 당사자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이나 휴정 때 잠깐 음악을 들려준다면 당사자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시민들에게는 딱딱하다는 느낌을 주는 법원의 모습도 음악이라는 예술적 정서를 시민들과 공유하며 밀착될 때 그 이미지가 달라질 것이다. 좀 더 시민에게 다가가는 열린 사법부의 모습을 보여준 대전법원의 열린 음악회는 이런 맥락에서 참신한 열정의 소산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대전법원의 가을편지와 노래를 받은 대전 시민과 법조가족들의 올 가을은 그 어느 해보다도 풍요로울 것이다. 사각사각 단풍드는 갈잎의 아름다움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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