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잘 지냄
2005.10.02 19:49
아주 잘 지냄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이금주
‘아주 잘 지냄 106641****’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다. 처음으로 객지에 아들을 보낸 터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한 번씩 전화를 하면 귀찮은 듯 받더니만 지난번 내려와서 휴대폰 문자조합방법을 알려 주었다. 전화를 받을 형편이 못되는 경우가 많으니 꼭 필요할 때는 문자메시지를 이용하라고 했다. 전화도 내 맘대로 못하는구나 싶어 자존심이 상했다. 기계작동에 영 관심이 없고 문자조합도 서툴렀기에 내가 연락 안 하면 제가 하겠지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되어도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혹 무슨 일이 있는지, 학교는 제대로 다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궁금해서 참다못해 메시지를 보냈다. 가장 조합이 쉽고 짧은 단어로 내 마음을 전달할 문장을 궁리하다가 ‘무소식이 희소식? 엄마’라고 문자를 썼다. 그것도 여러 차례의 실수를 번복하며…….
한달 만에 엄마의 메시지를 받았으면 전화를 걸든지 아니면 ‘죄송해요. 바빠서 연락 못 드렸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라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지 ‘아주 잘 지냄’은 마지못해 보낸 답신 같았다. 너무 사무적이고 딱딱해 모자의 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건조한 내용이었다.
친정어머니께서 인편으로 고추장과 멸치, 참기름을 보내 주셨다. 고추장은 아직 큰 통 가득 남아있고, 멸치는 지난 추석에 선물로 받은 것이 있어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참기름 역시 이웃돕기 바자회에서 산 것이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보내려면 미리 보낸다고 전화를 주시면 필요할 때 가져갈 것이라 말씀드렸을 텐데, 당신 생각으로는 별 것도 아닌 것을 전화까지 하면서 번거롭게 보내는 것이 싫으셨던 것 같다. 이런 식 어머니의 정성은 매번 잉여식품으로 우리 집에 들이닥친다.
자식이 나 하나가 아니고 8남매나 되니 멸치 한 통씩만 돌리려 해도 기십 만원의 목돈이 들고, 이는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아버지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근면 성실을 무기로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무한정 퍼주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시며 돈을 내주실 때마다 한두 마디 잔소리를 하신다.
“지난번 막내네 집에 갔을 때 자꾸만 나방이 나와 찾아봤더니 뒤 베란다에 있는 고추가 다 상해 있더라.” “물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름병이 몇 개나 묵혀 있더라.” “애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때 주어라.” 등등…….
집에서 살림하는 나야 남아도는 잉여식품은 상태가 좋을 때 얼른 이웃에게 돌려 동네인심이라도 얻지만 직장 일에 바쁜 막내는 구석구석 살림을 챙길 시간이 없다보니 이런 저런 실수들이 눈에 띈 것이다.
문득 내 아들의 ‘아주 잘 지냄’ 이란 답신은 딸에게 잘 먹으라고 보낸 식품들이 잉여식품이 되어 이웃에 돌려지는 내 행동과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졌다. 내가 아니면 누가 챙겨줄까, 혼자서 잘 지낼까 하는 염려는 고추장은 방부제 넣은 것을 사서 먹지나 않는지, 값이 싼 중국산 참깨로 기름을 짜 먹지나 않는지 하는 염려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넘치는 정성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아들의 건조한 반응에는 몹시 서운해했다. 딸 역할에는 무심하면서 엄마 역할에는 제 몫의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유년시절 나는 어머니에게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고프겠다. 어서 밥 먹어야지.”라는 말보다는 “오늘은 하늘이 참 맑구나. 꽃밭에 작약이 탐스럽게 피었단다.” 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내 머리를 감기 편한 짧은 단발로 깎아 주시기보다는 길게 양 갈래로 따주셨으면 했다. 손마디가 거칠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시기보다는 손톱 끝에 봉숭아물이 들여진 보드라운 손이길 바랐다.
나의 어린 시절 이렇게 모자랐던 점들을 내 아들에게 채워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워낙 자의식이 강하고 간섭받기를 싫어해 나의 감성적인 호의는 여지없이 묵살 당했다. 방학이면 바다에 데리고 가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들은 방구석에 틀어 박혀 만화책 읽기를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전날 무슨 일인가로 마음이 상해 도시락에 화해편지를 넣었더니 “유치하게 편지를 쓰기는……. 도시락을 열다 창피해서 혼났어요.”라고 화를 냈다. 늦잠을 깨우려고 경쾌한 음악을 틀어주면 시끄러우니 제발 편히 좀 살자며 나를 극성맞은 엄마로 내몰았다.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들에게 뭔가 교훈이 되겠지 싶었으나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뭘 그리 정신 없이 사십니까?”라고 해서 기운이 빠졌다. 좋은 엄마가 되려는 의도적 시도들이 아들에게는 쓸데없는 잔소리요, 성가신 참견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보다는 훨씬 좋은 내 아들의 엄마가 되고 싶었다. 먹이고 입히는데 급급했던 내 어머니보다는 아들과 함께 삶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고상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상한 엄마는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고, 제 할 일 알아서 잘 처리하는 등의 기본요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가능했다. 문제는 이런 기본요건이 내 아들에게는 버거웠던 것이다.
엄마의 눈높이에 함량미달이었던 아들은 매사를 지겨워하며 반항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갈등구조에서 나는 지쳐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란 아들인지라‘아주 잘 지냄’이란 답신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내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본능적이었던 데 반해 아들에 대한 엄마로서의 내 사랑은 지나치게 기교적이 아니었나 싶다.
자식농사는 평생농사라고 한다. 쌀 농사야 한 해 흉년이 들면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지만 자식농사는 물릴 수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이 일회성으로 마무리된다. 어떻게 해야 자식농사를 잘 짓는 것인지 아무도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 부모는 자신들의 가치기준에서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하겠지만 부모의 최선이 자식에게 최적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자식이 잘 자라도록 지켜보기보다는 잘 키워내려는 욕심이 앞서기에 자식문제는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는 한없이 어려운 화두인 성싶다.
내 아들이 보낸 ‘아주 잘 지냄’이란 답신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게 했다. 엄마 없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거리고 싶은 잘난 체일 수도 있고, 집 생각이야 깡그리 잊어버리고 산다는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발 신경 좀 끄라는 옐로카드일지도 모른다.
‘아주 잘 지냄’은 행복하다는 의미일 텐데 내가 자꾸만 허탈해하는 것은 아들 속에 비집고 들어갈 내 공간이 없다고 확인됐기 때문이리라. 자식사랑은 짝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선배님의 말씀이 곰곰이 되씹어진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은 주어도 좋지만 생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의 육체는 만들었지만 내 아들의 영혼은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은 뒤로 가는 것이 아니고 어제와 함께 머물러도 안 되기에 내가 아들을 좋아하도록 애쓸 뿐 아들이 나를 좋아하도록 애쓰지는 않아야겠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조금씩조금씩 세상을 놓아 버리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이번 주말엔 따뜻한 내복을 준비하고 좋아하시는 잡채도 만들어 팔순을 넘기신 부모님을 뵈러 가야겠다. 하루해가 다 질 때까지 마루에 앉아 모녀간에 잔잔한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돌아오는 길목이 어둠에 깔릴지라도 마음만은 넉넉해지겠지?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이금주
‘아주 잘 지냄 106641****’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다. 처음으로 객지에 아들을 보낸 터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한 번씩 전화를 하면 귀찮은 듯 받더니만 지난번 내려와서 휴대폰 문자조합방법을 알려 주었다. 전화를 받을 형편이 못되는 경우가 많으니 꼭 필요할 때는 문자메시지를 이용하라고 했다. 전화도 내 맘대로 못하는구나 싶어 자존심이 상했다. 기계작동에 영 관심이 없고 문자조합도 서툴렀기에 내가 연락 안 하면 제가 하겠지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되어도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혹 무슨 일이 있는지, 학교는 제대로 다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궁금해서 참다못해 메시지를 보냈다. 가장 조합이 쉽고 짧은 단어로 내 마음을 전달할 문장을 궁리하다가 ‘무소식이 희소식? 엄마’라고 문자를 썼다. 그것도 여러 차례의 실수를 번복하며…….
한달 만에 엄마의 메시지를 받았으면 전화를 걸든지 아니면 ‘죄송해요. 바빠서 연락 못 드렸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라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지 ‘아주 잘 지냄’은 마지못해 보낸 답신 같았다. 너무 사무적이고 딱딱해 모자의 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건조한 내용이었다.
친정어머니께서 인편으로 고추장과 멸치, 참기름을 보내 주셨다. 고추장은 아직 큰 통 가득 남아있고, 멸치는 지난 추석에 선물로 받은 것이 있어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참기름 역시 이웃돕기 바자회에서 산 것이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보내려면 미리 보낸다고 전화를 주시면 필요할 때 가져갈 것이라 말씀드렸을 텐데, 당신 생각으로는 별 것도 아닌 것을 전화까지 하면서 번거롭게 보내는 것이 싫으셨던 것 같다. 이런 식 어머니의 정성은 매번 잉여식품으로 우리 집에 들이닥친다.
자식이 나 하나가 아니고 8남매나 되니 멸치 한 통씩만 돌리려 해도 기십 만원의 목돈이 들고, 이는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아버지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근면 성실을 무기로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무한정 퍼주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시며 돈을 내주실 때마다 한두 마디 잔소리를 하신다.
“지난번 막내네 집에 갔을 때 자꾸만 나방이 나와 찾아봤더니 뒤 베란다에 있는 고추가 다 상해 있더라.” “물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름병이 몇 개나 묵혀 있더라.” “애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 때 주어라.” 등등…….
집에서 살림하는 나야 남아도는 잉여식품은 상태가 좋을 때 얼른 이웃에게 돌려 동네인심이라도 얻지만 직장 일에 바쁜 막내는 구석구석 살림을 챙길 시간이 없다보니 이런 저런 실수들이 눈에 띈 것이다.
문득 내 아들의 ‘아주 잘 지냄’ 이란 답신은 딸에게 잘 먹으라고 보낸 식품들이 잉여식품이 되어 이웃에 돌려지는 내 행동과 같은 맥락이라고 여겨졌다. 내가 아니면 누가 챙겨줄까, 혼자서 잘 지낼까 하는 염려는 고추장은 방부제 넣은 것을 사서 먹지나 않는지, 값이 싼 중국산 참깨로 기름을 짜 먹지나 않는지 하는 염려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넘치는 정성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아들의 건조한 반응에는 몹시 서운해했다. 딸 역할에는 무심하면서 엄마 역할에는 제 몫의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유년시절 나는 어머니에게 아쉬운 점이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고프겠다. 어서 밥 먹어야지.”라는 말보다는 “오늘은 하늘이 참 맑구나. 꽃밭에 작약이 탐스럽게 피었단다.” 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내 머리를 감기 편한 짧은 단발로 깎아 주시기보다는 길게 양 갈래로 따주셨으면 했다. 손마디가 거칠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시기보다는 손톱 끝에 봉숭아물이 들여진 보드라운 손이길 바랐다.
나의 어린 시절 이렇게 모자랐던 점들을 내 아들에게 채워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워낙 자의식이 강하고 간섭받기를 싫어해 나의 감성적인 호의는 여지없이 묵살 당했다. 방학이면 바다에 데리고 가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들은 방구석에 틀어 박혀 만화책 읽기를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전날 무슨 일인가로 마음이 상해 도시락에 화해편지를 넣었더니 “유치하게 편지를 쓰기는……. 도시락을 열다 창피해서 혼났어요.”라고 화를 냈다. 늦잠을 깨우려고 경쾌한 음악을 틀어주면 시끄러우니 제발 편히 좀 살자며 나를 극성맞은 엄마로 내몰았다.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들에게 뭔가 교훈이 되겠지 싶었으나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뭘 그리 정신 없이 사십니까?”라고 해서 기운이 빠졌다. 좋은 엄마가 되려는 의도적 시도들이 아들에게는 쓸데없는 잔소리요, 성가신 참견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 어머니보다는 훨씬 좋은 내 아들의 엄마가 되고 싶었다. 먹이고 입히는데 급급했던 내 어머니보다는 아들과 함께 삶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고상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고상한 엄마는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고, 제 할 일 알아서 잘 처리하는 등의 기본요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가능했다. 문제는 이런 기본요건이 내 아들에게는 버거웠던 것이다.
엄마의 눈높이에 함량미달이었던 아들은 매사를 지겨워하며 반항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는 갈등구조에서 나는 지쳐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란 아들인지라‘아주 잘 지냄’이란 답신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내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본능적이었던 데 반해 아들에 대한 엄마로서의 내 사랑은 지나치게 기교적이 아니었나 싶다.
자식농사는 평생농사라고 한다. 쌀 농사야 한 해 흉년이 들면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지만 자식농사는 물릴 수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이 일회성으로 마무리된다. 어떻게 해야 자식농사를 잘 짓는 것인지 아무도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다. 부모는 자신들의 가치기준에서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하겠지만 부모의 최선이 자식에게 최적으로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자식이 잘 자라도록 지켜보기보다는 잘 키워내려는 욕심이 앞서기에 자식문제는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는 한없이 어려운 화두인 성싶다.
내 아들이 보낸 ‘아주 잘 지냄’이란 답신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게 했다. 엄마 없이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며 어깨를 으쓱거리고 싶은 잘난 체일 수도 있고, 집 생각이야 깡그리 잊어버리고 산다는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발 신경 좀 끄라는 옐로카드일지도 모른다.
‘아주 잘 지냄’은 행복하다는 의미일 텐데 내가 자꾸만 허탈해하는 것은 아들 속에 비집고 들어갈 내 공간이 없다고 확인됐기 때문이리라. 자식사랑은 짝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어느 선배님의 말씀이 곰곰이 되씹어진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은 주어도 좋지만 생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의 육체는 만들었지만 내 아들의 영혼은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은 뒤로 가는 것이 아니고 어제와 함께 머물러도 안 되기에 내가 아들을 좋아하도록 애쓸 뿐 아들이 나를 좋아하도록 애쓰지는 않아야겠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조금씩조금씩 세상을 놓아 버리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이번 주말엔 따뜻한 내복을 준비하고 좋아하시는 잡채도 만들어 팔순을 넘기신 부모님을 뵈러 가야겠다. 하루해가 다 질 때까지 마루에 앉아 모녀간에 잔잔한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돌아오는 길목이 어둠에 깔릴지라도 마음만은 넉넉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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