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 사랑
2005.09.23 11:33
보따리 사랑
한 경 선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 분홍빛이나 하늘색으로 느껴진다면 좋겠다. 굳이 회색까지 들먹일 마음은 없다. 무거운 발걸음에 얼굴까지 굳어지게 하는 걸 보면 조금 어두운 코발트색에 가깝지 않나 싶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목소리를 높여 인사를 하는데, 재치 있는 이가 시 한 편을 읽어 주었다.
시골 버스 삼백 리 길/ 덜컹거리며/과장으로 승진한 아들네 집에/쌀 한 가마/입석 버스에 실었것다.//읍내 근처만 와도/사람 북적거린다./ 뚱뚱한 할매/울 엄마 닮은 할매/커다란 엉덩이 쌀가마 위에/자리 삼아 앉았것다.// <이눔우 할매 좀 보소./울 아들 과장님 먹을 쌀가마이 우에/여자 엉덩이 얹노? 더럽구로>/하며 펄쩍 하였것다. <아따 별난 할망구 보소./좀 앉으마 어떠노./차도 비잡은데....../내 궁딩이는/과장 서이 낳은 궁딩이다.>//버스 안이 와그르르/한바탕 하하하....../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이렸것다.// (민담3. 과장님 먹을 쌀. 류근삼)
우리도 한 바탕 웃으며 찬 기운을 몰아내는데 머릿속을 스치는 풍경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 그러니까 택배와 자가용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때, 역이나 버스 정류장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든 할머니들이 참 많았다. 젊은이들이 그냥 스쳐지나가기 민망할 정도였다. 늙으신 어머니들이었을 것이다. 짐을 가지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길을 묻고, 누군가를 기다리다 만나서 가곤 했다.
그 울퉁불퉁하던 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 있다. 농사지은 쌀과 곡식도 주고 싶었겠지만 무거워서 맘껏 가져가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참기름, 깨,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이거나 제철 푸성귀와 아들, 딸이 즐겨먹던 시골 밑반찬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라도 더 넣어보려고 꾹꾹 다지며 보따리를 여몄을 터이다.
시집살이 하는 딸에게 오는 어머니 손에도 늘 불룩한 보따리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보따리 속 물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었다. 새 각시 때는 바늘 쌈, 색실, 고무줄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밑반찬이 살짝 들어 있었다. 양 쪽 발에 실타래를 걸고 한참을 풀어 감았을 무명 실 꾸리도 여러 개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머리 핀, 머리 띠, 머리 고무줄, 옷, 장난감, 양말, 색색의 군것질감을 가져 오셨다. 가끔 사위의 티셔츠가 있었으며 사돈 양주의 입막음용 사탕은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약장사 구경 갔다 사온 희한한 물건이 있을 때는 자세한 용도와 사용법 설명을 덧붙이셨다.
딸과 달리 도시에 사는 어머니는 애틋함을 보따리보따리 싸매 두었다가 한 번씩 풀어놓는 것이었다. 자식 생각이 한 시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낳은 딸과 그 딸이 낳은 딸, 아들이 보따리를 놓고 둘러앉아 내 것, 네 것 챙기며 웃기도하고 환호를 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보따리부터 챙기는 척하면 어머니도 웃으셨다. 아이들은 커가고 어머니는 늙어가며 보따리는 점점 가벼워졌다. 어머니도 갈수록 나들이를 번거로워 하신다. 오랜만에 오신다기에 애들 양말도 없고 내 스타킹도 다 떨어졌다고 엄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보따리에 익숙해 있었다. 어렸을 적에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어보던 즐거움이 떠오른다.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던 과일이라도 굴러 나오면 나를 위해 사온 것임을 알고 행복했었다. 어머니의 몸속 보따리 속에서 고이고이 키워 세상을 보게 하신 것은 더 오래된 인연이다. 자식을 기르며 숱한 가슴앓이를 싸매고 싸안으면서 힘든 내색하지 않은 것은 잴 수 없는 큰 사랑이다.
처음엔 어머니도 평면인 보자기처럼 맘껏 펄럭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되는 순간부터 보자기 끝을 여미듯 자신을 묶어서 안으로 가두었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 끝없이 보따리를 꾸리고 풀어내는 어머니로 살았다.
도시로 나와 살게 되자 시어머니의 보따리를 받게 되었다. 아욱 한 줌, 마늘, 간장, 된장, 호박 잎, 애호박, 삶은 시래기, 파 몇 뿌리, 찐 밤 한 봉지...... 가끔 목이 메기도 한다. 시어머니도 어머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보따리 앞에서야 사무치게 느껴지다니.
세상이 변하면서 모정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나부터도 적당히 이기적인 엄마가 되었다. 그 때마다 무조건 주기만 하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떠올리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는 게 많고, 계산이 빠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자꾸자꾸 주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나도 아이들에게 보따리를 건네주며 또다시 어머니의 사랑을 추억해 내겠지. 어머니의 사랑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보따리 사랑이다.
한 경 선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 분홍빛이나 하늘색으로 느껴진다면 좋겠다. 굳이 회색까지 들먹일 마음은 없다. 무거운 발걸음에 얼굴까지 굳어지게 하는 걸 보면 조금 어두운 코발트색에 가깝지 않나 싶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목소리를 높여 인사를 하는데, 재치 있는 이가 시 한 편을 읽어 주었다.
시골 버스 삼백 리 길/ 덜컹거리며/과장으로 승진한 아들네 집에/쌀 한 가마/입석 버스에 실었것다.//읍내 근처만 와도/사람 북적거린다./ 뚱뚱한 할매/울 엄마 닮은 할매/커다란 엉덩이 쌀가마 위에/자리 삼아 앉았것다.// <이눔우 할매 좀 보소./울 아들 과장님 먹을 쌀가마이 우에/여자 엉덩이 얹노? 더럽구로>/하며 펄쩍 하였것다. <아따 별난 할망구 보소./좀 앉으마 어떠노./차도 비잡은데....../내 궁딩이는/과장 서이 낳은 궁딩이다.>//버스 안이 와그르르/한바탕 하하하....../사람 사는 재미가 이런 것이렸것다.// (민담3. 과장님 먹을 쌀. 류근삼)
우리도 한 바탕 웃으며 찬 기운을 몰아내는데 머릿속을 스치는 풍경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 그러니까 택배와 자가용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때, 역이나 버스 정류장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든 할머니들이 참 많았다. 젊은이들이 그냥 스쳐지나가기 민망할 정도였다. 늙으신 어머니들이었을 것이다. 짐을 가지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길을 묻고, 누군가를 기다리다 만나서 가곤 했다.
그 울퉁불퉁하던 보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 있다. 농사지은 쌀과 곡식도 주고 싶었겠지만 무거워서 맘껏 가져가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 참기름, 깨,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이거나 제철 푸성귀와 아들, 딸이 즐겨먹던 시골 밑반찬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라도 더 넣어보려고 꾹꾹 다지며 보따리를 여몄을 터이다.
시집살이 하는 딸에게 오는 어머니 손에도 늘 불룩한 보따리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보따리 속 물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었다. 새 각시 때는 바늘 쌈, 색실, 고무줄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밑반찬이 살짝 들어 있었다. 양 쪽 발에 실타래를 걸고 한참을 풀어 감았을 무명 실 꾸리도 여러 개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머리 핀, 머리 띠, 머리 고무줄, 옷, 장난감, 양말, 색색의 군것질감을 가져 오셨다. 가끔 사위의 티셔츠가 있었으며 사돈 양주의 입막음용 사탕은 필수품이었다. 그리고 약장사 구경 갔다 사온 희한한 물건이 있을 때는 자세한 용도와 사용법 설명을 덧붙이셨다.
딸과 달리 도시에 사는 어머니는 애틋함을 보따리보따리 싸매 두었다가 한 번씩 풀어놓는 것이었다. 자식 생각이 한 시도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낳은 딸과 그 딸이 낳은 딸, 아들이 보따리를 놓고 둘러앉아 내 것, 네 것 챙기며 웃기도하고 환호를 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보따리부터 챙기는 척하면 어머니도 웃으셨다. 아이들은 커가고 어머니는 늙어가며 보따리는 점점 가벼워졌다. 어머니도 갈수록 나들이를 번거로워 하신다. 오랜만에 오신다기에 애들 양말도 없고 내 스타킹도 다 떨어졌다고 엄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보따리에 익숙해 있었다. 어렸을 적에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어보던 즐거움이 떠오른다.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던 과일이라도 굴러 나오면 나를 위해 사온 것임을 알고 행복했었다. 어머니의 몸속 보따리 속에서 고이고이 키워 세상을 보게 하신 것은 더 오래된 인연이다. 자식을 기르며 숱한 가슴앓이를 싸매고 싸안으면서 힘든 내색하지 않은 것은 잴 수 없는 큰 사랑이다.
처음엔 어머니도 평면인 보자기처럼 맘껏 펄럭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되는 순간부터 보자기 끝을 여미듯 자신을 묶어서 안으로 가두었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 끝없이 보따리를 꾸리고 풀어내는 어머니로 살았다.
도시로 나와 살게 되자 시어머니의 보따리를 받게 되었다. 아욱 한 줌, 마늘, 간장, 된장, 호박 잎, 애호박, 삶은 시래기, 파 몇 뿌리, 찐 밤 한 봉지...... 가끔 목이 메기도 한다. 시어머니도 어머니라는 당연한 사실이 보따리 앞에서야 사무치게 느껴지다니.
세상이 변하면서 모정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나부터도 적당히 이기적인 엄마가 되었다. 그 때마다 무조건 주기만 하던 우리들의 어머니를 떠올리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는 게 많고, 계산이 빠르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자꾸자꾸 주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나도 아이들에게 보따리를 건네주며 또다시 어머니의 사랑을 추억해 내겠지. 어머니의 사랑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보따리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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