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대 가는 길

2005.10.27 08:22

김인순 조회 수:78 추천:7

사선대 가는 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김인순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빗길 나들이를 삼가는 터라 부슬비라 할지라도 예외일 순 없었다.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에 빗발까지 굵어지자 이내 병이 도졌다. 낯선 노선과 신입회원 처지를 감안해 달라는 그럴듯한 핑계에 K선생님은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회초리라도 드실 듯한 목소리였다. "야 임마! 이 나이에 내가 꼭 해야겠냐?"

제43회 소충, 사선문화제가 열리는 사선대(四仙臺)에서 임실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시 낭송대회' 진행요원으로 참석하기 위하여 버스를 탔다. 남부시장서부터 가다서다를 반복하던 버스는 좁은목 약수터를 지나자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젖은 옷의 물기를 털고 우산의 주름을 세우는 동안 차창은 승객들이 주고받는 갖가지 사연들로 뿌옇게 흐려있었다. 빈속의 울렁거림도 잊을 겸 창을 닦았다.

들판 가득히 가을빛이 완연했다. 욕심껏 낟알을 부풀린 벼이삭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고, 논둑의 콩대는 벌써 잎을 떨군다. 무리 지어 늘어선 억새 잎새 위로 연신 빗방울이 구른다. 샐비어는 여전히 붉고 맨드라미 백일홍이 수놓은 꽃길은 굽이마다 이어졌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의 한 가운데에 머물고 있다. 산골의 가을은 깊은 골짜기 뙈기밭까지 풍요롭다. 고목에 매달린 감에서도 가을빛은 묻어난다. 껑충 솟은 수숫대가 수런거린다. 이 가을, 내게서는 무엇이 익어가고 또 무엇을 거둬들일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밤을 지새며 분주했을까?  그것이 단풍이라면 어떤 빛깔일까? 해마다 되풀이되는 똑같은 질문에 한결같은 대답이어야 하는 오늘이 싫다.

가을비가 사선대 광장을 적시고 바람마저 잦아든 10월의 오후, 드디어 행사가 시작됐다. 낭송되는 시구(詩句)마다 바스락거리는 내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하나둘씩 빈자리가 늘어갈 무렵, 행사를 마무리하는 기념사진을 찍고 현수막을 내렸다. 곡예를 하듯 바람이 불었다.

곧 가을걷이도 끝이 날 것이다. 올해 가난한 내 농사를 내년이라고 포기할 순 없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얻어지는 다양한 경험과 작은 것에도 소홀함이 없는 철저한 준비· 예행연습만이 성공적인 행사의 개막을 기대할 수 있듯이 내년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나는 여전히 잡초를 뽑으며 땅을 일굴 것이다.

그새 K선생님은 메일까지 보내주셨다. 궂은 날씨를 염려하면서도 굳이 불러들인 이유야 좋은 기회이니 열심히 배우라는 애정 어린 배려임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미미한 나의 역할에 '수고했다'는 갈무리는 살아가면서 처신해야 할 자세를 일러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무엇보다 혈기 방자한 내 의중을 꿰뚫고 계신 듯이 행하시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풀리지 않은 숙제하나를 해결한 느낌이었다. 지금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일상적인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 새삼스레 느껴지는지…….

해질 녘 오원천 맑은 물에 드리워진 코스모스 꽃길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둑길 따라 피어난 구절초 꽃송이는 또 얼마나 탐스럽던지. 사선대 광장엔 무수한 애드벌룬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2005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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