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2005.09.17 06:21
시간여행
행촌수필문학회 이양기
유홍준 씨는 ‘우리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짧은 문장은 사실이다. 이 문장은 사실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다녀왔다.
지난 토요일. 여름이 꼬리를 내리고 가을이 얼굴을 살짝 내미는 9월 10일이었다. 가는 여름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듯 땅 위, 나무 위, 물 위 어디나 할 것 없이 모두를 태우고 말 것인 양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삼복더위 같은 가을 속에서 모처럼 멀리서 찾아 온 친구와 약수터 근처 양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창 밖으로는 여름의 짙은 녹음이 조금씩 뒷걸음을 치고 가을 색이 주춤 주춤 무릎걸음을 하며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파란 색을 마구 칠해 놓은 듯 눈부셨다. 빨간색 백일홍과 노란색 메리골드는 파란 하늘과 맑은 햇빛 속에서 투명하고 깨끗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맑고 깨끗한 가을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화장사를 찾았다. 화장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소박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절 마당이 좋아서 가끔 찾아가는 곳이었다. ‘가든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주차장은 음악회 준비로 야단법석이었다. 마이크를 설치한다, 스크린을 설치한다, 어수선한 주변은 정갈하고 적막하던 절 마당을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 헤집어 놓고 있었다. 절 마당을 가로질러 오른 쪽 숲길로 접어들었다. 그 곳은 ‘가침박달나무’가 자생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군락을 이루면서 자생하는 곳이라고 한다. 봄이 되면 너울너울 흰색 꽃이 가지마다 묻어나면서 흰나비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 곳도 잡초와 범꼬리 꽃만 무성하게 우거지고 너울거리던 꽃의 흔적은 없었다. 다시 절 마당으로 돌아 나오니 흰색의 옥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내뿜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잠시 옥잠화의 향기에 서운한 마음을 달래고 화장사를 나섰다.
국립청주박물관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한가로웠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 틈새로 박물관의 화강암 벽이 육중함을 드러내며 햇빛을 받고 있었다. 어른 한 사람이 400원의 입장료를 내면 과거로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입장권을 산다. 400원! 이렇게 헐값으로 사는 입장료가 있다니……. 두 장의 표를 산 우리는 먼 옛날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시작하였다. 언제나 박물관 유물 전 앞에 서면 당혹스럽다. 특히 선사시대 또는 아주 먼 옛날 앞에서는 더욱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머리와 가슴을 죄어 온다. 뭉툭한 돌멩이를 손도끼라고 하고, 조금 날카롭게 잘려 나간 돌멩이를 칼이라고 하며, 그리고 화살촉 등등이 그랬다. 해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갸웃하기도 하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도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긴 시간여행을 하였다. 삼국시대를 지나고 고려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제법 반듯한 그릇들과 생활 도구들이 눈앞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너희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뿌리가 바로 우리들이야!’라고 하듯이. 고려청자, 상감 자기들, 구슬목걸이, 금반지, 농기구 등이 지금의 것과 비교하여도 디자인이 전혀 손색이 없었다. 투박하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조선시대의 그릇은 조상들의 절제와 검소를 엿볼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금은 여전히 장식용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목판에 조각된 불경은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어떻게 그 많은 글자들을 거울에 비추듯 뒤집어서 조각할 수가 있는지. 또 글씨는 얼마나 작은지. 그러면서도 정갈하고 섬세하고 힘이 있는 글자들……. ‘옛날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익힌다.’라고 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참 뜻을 다시금 체험하였다.
지나간 시간들 앞에서 자꾸 작아지는 우리들을 느끼면서 박물관을 나왔다. 박물관을 나서니 초가을 토요일의 햇빛이 저만큼 산밑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할 일 없이 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드레스로 성장한 꼬마 아가씨들이 화사하고 소란스런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대 앞에는 커다란 펼침막이 달려있었다. ‘ㅇㅇ피아노 학원 연주회’ 아! 그랬었구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부리듯 앉았다. 꼬마 아가씨들은 멋진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투명한 가을 빛 같은 소리가 튀어 오르기도 하고, 보라색 벌개미추 꽃 같은 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기도 하였다. 때론 음이 틀리고, 기교도 모자라며, 자신의 감정을 음에 실어 내지 못하는 작은 음악회였다. 그래도 머리에 꽃을 꽂고 얼굴에 반짝이를 뿌린 꼬마 아가씨들은 행복감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로 참새처럼 재잘대며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래, 엄마와 아빠가 카메라를 터뜨리고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너희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과 꿈, 그리고 힘을 실어 주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흐뭇한 미소가 입술에 번졌다. 공연히 박물관을 나서는 우리들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초가을의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다. 모처럼 시작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마무리 짓고자 청원군 문의면 가산리에 있는 ‘대머리 한씨 시조묘’를 찾아 나섰다. 길을 따라 달리는 차창 너머로 가을 색이 출렁이고 있었다. 누렇게 익은 벼와 연두색 잎의 조화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성급히 피어 난 코스모스가 바람에 가녀린 손짓을 하고 고추잠자리는 하늘을 높이 날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으려고 하였던 묘는 길을 잘못 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침묵의 소리에 마음 맡기고 조용히 시간여행을 하려고 하였던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차를 돌려 고속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차 속에도 과거의 소리를 꽉 채우고 우리들은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황제’는 피아노 소리가 비누방울처럼 가을하늘에 떠올랐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보랏빛 현의 소리가 청명한 공기를 뚫으며 하늘로 쏟아졌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박물관에서, 음악 소리에, 친구와의 우정 속에서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혹 먼 과거의 시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투명하고 맑은 가을햇빛 속에서 잠시 정지된 시간을 가졌던 토요일 오후의 한 때였다.
행촌수필문학회 이양기
유홍준 씨는 ‘우리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짧은 문장은 사실이다. 이 문장은 사실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다녀왔다.
지난 토요일. 여름이 꼬리를 내리고 가을이 얼굴을 살짝 내미는 9월 10일이었다. 가는 여름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듯 땅 위, 나무 위, 물 위 어디나 할 것 없이 모두를 태우고 말 것인 양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삼복더위 같은 가을 속에서 모처럼 멀리서 찾아 온 친구와 약수터 근처 양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창 밖으로는 여름의 짙은 녹음이 조금씩 뒷걸음을 치고 가을 색이 주춤 주춤 무릎걸음을 하며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파란 색을 마구 칠해 놓은 듯 눈부셨다. 빨간색 백일홍과 노란색 메리골드는 파란 하늘과 맑은 햇빛 속에서 투명하고 깨끗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맑고 깨끗한 가을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화장사를 찾았다. 화장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소박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절 마당이 좋아서 가끔 찾아가는 곳이었다. ‘가든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주차장은 음악회 준비로 야단법석이었다. 마이크를 설치한다, 스크린을 설치한다, 어수선한 주변은 정갈하고 적막하던 절 마당을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 헤집어 놓고 있었다. 절 마당을 가로질러 오른 쪽 숲길로 접어들었다. 그 곳은 ‘가침박달나무’가 자생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군락을 이루면서 자생하는 곳이라고 한다. 봄이 되면 너울너울 흰색 꽃이 가지마다 묻어나면서 흰나비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 곳도 잡초와 범꼬리 꽃만 무성하게 우거지고 너울거리던 꽃의 흔적은 없었다. 다시 절 마당으로 돌아 나오니 흰색의 옥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를 내뿜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잠시 옥잠화의 향기에 서운한 마음을 달래고 화장사를 나섰다.
국립청주박물관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한가로웠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 틈새로 박물관의 화강암 벽이 육중함을 드러내며 햇빛을 받고 있었다. 어른 한 사람이 400원의 입장료를 내면 과거로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입장권을 산다. 400원! 이렇게 헐값으로 사는 입장료가 있다니……. 두 장의 표를 산 우리는 먼 옛날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시작하였다. 언제나 박물관 유물 전 앞에 서면 당혹스럽다. 특히 선사시대 또는 아주 먼 옛날 앞에서는 더욱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머리와 가슴을 죄어 온다. 뭉툭한 돌멩이를 손도끼라고 하고, 조금 날카롭게 잘려 나간 돌멩이를 칼이라고 하며, 그리고 화살촉 등등이 그랬다. 해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갸웃하기도 하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도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긴 시간여행을 하였다. 삼국시대를 지나고 고려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제법 반듯한 그릇들과 생활 도구들이 눈앞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너희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의 뿌리가 바로 우리들이야!’라고 하듯이. 고려청자, 상감 자기들, 구슬목걸이, 금반지, 농기구 등이 지금의 것과 비교하여도 디자인이 전혀 손색이 없었다. 투박하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조선시대의 그릇은 조상들의 절제와 검소를 엿볼 수 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금은 여전히 장식용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목판에 조각된 불경은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어떻게 그 많은 글자들을 거울에 비추듯 뒤집어서 조각할 수가 있는지. 또 글씨는 얼마나 작은지. 그러면서도 정갈하고 섬세하고 힘이 있는 글자들……. ‘옛날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익힌다.’라고 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참 뜻을 다시금 체험하였다.
지나간 시간들 앞에서 자꾸 작아지는 우리들을 느끼면서 박물관을 나왔다. 박물관을 나서니 초가을 토요일의 햇빛이 저만큼 산밑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할 일 없이 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드레스로 성장한 꼬마 아가씨들이 화사하고 소란스런 공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대 앞에는 커다란 펼침막이 달려있었다. ‘ㅇㅇ피아노 학원 연주회’ 아! 그랬었구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부리듯 앉았다. 꼬마 아가씨들은 멋진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투명한 가을 빛 같은 소리가 튀어 오르기도 하고, 보라색 벌개미추 꽃 같은 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기도 하였다. 때론 음이 틀리고, 기교도 모자라며, 자신의 감정을 음에 실어 내지 못하는 작은 음악회였다. 그래도 머리에 꽃을 꽂고 얼굴에 반짝이를 뿌린 꼬마 아가씨들은 행복감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로 참새처럼 재잘대며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래, 엄마와 아빠가 카메라를 터뜨리고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너희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과 꿈, 그리고 힘을 실어 주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니 흐뭇한 미소가 입술에 번졌다. 공연히 박물관을 나서는 우리들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초가을의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었다. 모처럼 시작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마무리 짓고자 청원군 문의면 가산리에 있는 ‘대머리 한씨 시조묘’를 찾아 나섰다. 길을 따라 달리는 차창 너머로 가을 색이 출렁이고 있었다. 누렇게 익은 벼와 연두색 잎의 조화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성급히 피어 난 코스모스가 바람에 가녀린 손짓을 하고 고추잠자리는 하늘을 높이 날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으려고 하였던 묘는 길을 잘못 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침묵의 소리에 마음 맡기고 조용히 시간여행을 하려고 하였던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차를 돌려 고속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차 속에도 과거의 소리를 꽉 채우고 우리들은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황제’는 피아노 소리가 비누방울처럼 가을하늘에 떠올랐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보랏빛 현의 소리가 청명한 공기를 뚫으며 하늘로 쏟아졌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박물관에서, 음악 소리에, 친구와의 우정 속에서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혹 먼 과거의 시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투명하고 맑은 가을햇빛 속에서 잠시 정지된 시간을 가졌던 토요일 오후의 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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