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강

2005.10.26 08:30

김영옥 조회 수:74 추천:9

세월의 강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김영옥


  찔끔거리던 초가을의 장마도 그치고 실로 오랜만에 티 없이 파란 하늘을 쳐다보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 잠까지 설쳤다. 아침 일찍 서울 사는 열 세살 아래 막내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네 살 때 엄마를 여의고 자랐기에 늘 안쓰러운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동생이다. 동생과 함께 자랐던 고향으로 추억여행을 떠나자고 했더니 쾌히 맞장구를 친다.

  우리들은 경상도 함양에서 만나 고향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동생은 그곳에서 태어나서 20여 년을 살았고 나는 11세부터 결혼할 때까지 10여 년을 산 곳이다. 나는 떠나온 지가 반 백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아련한 추억에 가슴 설레며 생각할수록 코끝이 찡해온다. 이곳을 잊지 못한 것은 성장기를 보내면서 기쁨과 슬픔을 맛본 곳이기에 그 체취가 묻어 있을 것만 같다. 그립고 보고싶은 마음이 진하게 가슴밑바닥에 깔려 있어 이곳에 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읍내서 걸어서 40분 거리인 마을은, 철연봉 산자락에 자리한 약간 비탈진 동향 마을이다. 봄이면 살구꽃이 온 마을을 분홍색으로 치장할 정도로 살구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그 옛날에 길은 오솔길이었는데 버스도 들어가는 포장길로 변했다. 고개를 넘어서자 빨갛게 익은 감들이 눈에 안기며 제일 먼저 우리들을 반겼다. 마을 앞 저수지는 꽤나 넓어서 모심고 난 후에 물이 마르면 붕어와 미꾸라지가 온 마을 사람들의 영양보충을 톡톡히 해주었는데, 절반은 메워져 연 밭으로 변했다.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은 양옆으로 도랑물이 흘러 여름밤이면 아낙들의 목욕탕이었건만 복개하여 자동차 길로 바뀌었다. 물이 좀 귀한 편이어서 마을에는 네모진 대형우물이 아랫마을 윗마을에 2곳이 있었는데 가뭄이 잦을 때는 저녁 무렵이면 물이 달려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지금은 수도시설로 인해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낯익은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손까지 잡고 반긴다. 나를 중매한 친족언니의 오빠였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갔다. 만나는 사람들은 서로가 바로 알아 볼 수 없어 말을 하면 그제야 알아보고 반갑게 맞는다. 코흘리개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들이 다 되었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 세월이 지났으니 변하기도 했겠지……. 우리 집이 보이자 동생의 눈에 이슬이 맺히면서 말을 잊는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그 옛날 우리 집 앞에 다가서자 집은 사람이 살고있지 않아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넓은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한 채 늙은 호박들만 이리저리 뒹굴고 낯익은 장독들이 잡초 속에서 말없이 옛 주인들을 맞았다. 우리 집은 30년 전 동생이 도시로 떠나면서 농기구, 장독 등 다음 주인에게 주고 갔다. 남편은 죽고 부인은 서울로 자식들 따라가고 집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집 모양은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외양간 앞에 걸려있는 농기구, 부엌에 자리하고 있는 내 손때 묻은 것들, 내가 쓰던 작은방, 돼지우리 위의 화장실 등 이곳저곳 둘러 봐도 크게 변한 것이라고는 없다
.
  나는 잠깐 몇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할아버지께서 여름철이면 사랑채마루에서 ‘운현궁의 봄’이라는 소설책을 큰소리로 읽으시던 모습, 머슴까지 아홉 식구 대가족들이 어울려서 북적이던 모습들, 아래채 넓은 양잠 방에서 밤이면 친구들이 몰려와 재잘거리며 수도 놓고 공부도 하며 꿈을 키우던 모습들, 그 후 할아버지 할머니 동생의 죽음이 그곳에서 있었으니 영화 필름 돌아가듯 장면 장면들이 휙휙 지나간다. 자랄 때 별명이 새침데기였던 동생은 말없이 이곳저곳을 훑어보기만 한다. 말을 하지 않는 그 속은 오죽하랴. 아무도 없는 큰집에서 큰소리로 통곡이라도 실컷 하고싶은 심정을 억지로 참았다.

  윤이 나도록 닦았던 마루도 주인의 손맛을 못 본지 오래여서 앉기도 어설프다. 먼지를 훔치고 잠시 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사립문 앞에서 말없이 이 집을 지키고 선 감나무 밑으로 갔다. 밑에서부터 두 가지로 뻗은 감나무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고목이 되었다. 잘 익은 홍시 몇 개를 주워서 출출함을 때웠다. 그 맛은 고향 찾은 두 나그네를 달콤하게 위로해 주었다. 감나무는 말은 못해도 무척 반가웠는지 잘 익은 홍시 두 개를 살짝 더 내려준다. 하얀 옷을 입은 우리 할아버지가 긴 장대로 홍시를 따서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손으로 받으라고 감을 던져주던 옛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상기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자갈밭길이던 마을길은 포장길로 바뀌고, 현대식 건물의 집 모양들이 바뀌어 누구 집인지 알 수가 없다. 젊은 사람은 잘 모르고 나이든 분들은 만나는 분마다 친딸만큼 반가워했다. 아버지도 면장이었고 2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집안 아저씨 댁은 마을에서 한 쪽을 차지한 것 같았는데 다 서울로 가고 없고, 주인 바뀐 집은 초라해 보였다. 90이 넘은 우리어머니 또래였던 집안 아주머니는 우리 엄마이야기까지 하며 눈물을 찍어낸다. 한사코 자고 가라고 붙든다. 세월의 강은 흘러서 한 때 마을을 주름잡던 인걸들은 간데 없고, 고향 찾은 나그네의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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