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유럽여행작품
2011.05.14 16:15
<파리 풍경> 목판에 유채 23.5 x 33cm 개인 소장
<스페인 국경> 1928, 목판에 유채 23.5 x 33cm 개인 소장
<스페인 해수욕장> 1928, 32.5 x 43cm
<무희> 1927~28, 41 x 33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신준려·황애시덕·김마리아 등과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9월에는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1935년 <신생활에 들면서>(<삼천리>, 1935. 2)를 발표하여 구습과 인습에 얽매인 정조 개념의 해체를 다시 주장한다.
1936년 소설 <현숙(玄淑)>(<삼천리>, 1936. 12)을 발표하고, 1937년 소설 <어머니와 딸>(<삼천리>, 1937. 10)을 발표한다. 김일엽을 찾아가 수덕사 밑의 수덕 여관에 기거하면서 해인사·다솔사 등을 돌아다니며 지인을 찾아 서울을 오가기도 한다. 이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그림 작업과 산문 쓰기를 병행한다. 1940년 김우영이 아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방해하자 실의에 빠지고, 1944년 수덕사를 떠난 나혜석은 아이들이 있는 서울에 자주 나타나고, 딸 나영에게 얼마간 의탁하기도 하고, 서울의 오빠 집에 갔다가 쫓겨나기도 한다. 10월 오빠 경석의 주선으로 서울 인왕산 청운 양로원에 맡겨졌다. 1948년 12월 10일 원효로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한다. / 오형엽 수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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