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픈 남자, 화가 이중섭 생애
2011.05.18 14:55
이중섭의 생애
1) 유년기
2) 청년기 이중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너무나 귀족적이고 화려한 관료적 분위기가 싫어서 보다 진취적이고
이중섭화가는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부농의 (부자농가) 가정에
막내로 태어났다 중섭이 그림에 눈을 뜬건 보통학교 4학년때이며 그때부터
닥치는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조만식과 함석헌 선생님들이 있는 오산학
교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에 눈을떴다.
이중섭화가가 오산학교시절 화가이자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선생
님과 백남순 부부로부터 미술의 기초를 배웠다.
임용련화가는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주요 작품으로 《에르블레 풍경》
과 개인소장의 《금강산》(1940) 등이 있으며 오산학교 재직 당시 그는
이중섭을 비롯한 제자들에 밑그림(드로잉)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이중섭에게 수없이 강조했다는 "밑그림을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이 하여라. 그런 다음에 네 예술이 있다."는 말이 이중섭 전기에 등장
하고, 이중섭은 일본 유학 중에도 드로잉 작업을 매우 열심히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중섭의 드로잉이 습작이라기 보다 완성된 작품형태가 많은 이유는
스승인 임용련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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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련>
자유 분방한 동경 문화 학원으로 옮겻다 이중섭의 은박지 선화는 부산
범일동 피난시절이 아니라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림 밖에 모르던 이중섭에게도 운명의 연인인 동경문화학원의
1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나타났다.그림붓을 빨러가던 수도가에서
만나기 시작했다고 이남덕여사가 회고록에서 전했다.
참고로 마사코는 일본 재벌인 마쓰이 물산 산하의 기업체 사장의
두딸중 막내였다고 한다.1940년 6월 졸업작품인 유화 <소와 소녀>
라는 작품으로 협회장 상을 받았다.
그는 망월이라는 작품으로 1943년 7월 태양상을 받은것을 끝으로 원산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1945년 마사코는 일본에서 건너와 이중섭과 결혼을
하였으며 마사코는 이남덕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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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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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
3) 장년기 그이후..
1946년이후 결혼뒤 북한땅의 체제가 공산주위로 바뀜에따라 이중섭에게도
여러가지 압력이 가해졌다. 부농의 아들에 일본인 부인까지 있으니 한 2주
정도 원산여자 사범학교 교사일을 하다가 무엇을 가르칠지 모른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 두었다. 생애에서 마지막 직장 생활이었다.
46년 첫째 아들이 태어났으나 유행병인 디프테리아로 죽고. 관속에 복숭아
동자등 여러 그림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47년에 둘째 아들이 49년에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1950년 6.25 전쟁과 동시에 나름 행복했던 시절은 끝나고
전쟁중인 12월에 어머니에게 그림을 맡기고 마사코와 두아들을 데리고 월남
을 하였다. 그전에도 이중섭이 월남을 못하는 이유는 나이드신 노모때문에
월남을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철수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해서 간 곳은 범일동 피난민 수용소였다.
부농에서 한순간에 거지가 된것이다. 1951년 4월 해군에 있던 동향사람인
한민걸의 소개로 제주도 서귀포로 가서 한평짜리 방한칸에 7개월동안 살기
시작한다. 1951년 12월 도저히 가난에 못이겨 이중섭은 다시 부산으로
올라와 가족들을 피난민 수용소에 두고 날품 팔이를 시작한다.
그런상황에서 얼마뒤 이남덕부친 이중섭의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이남덕은
두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중섭은 그후 보고싶은 부인과
아이들을 향하여 엽서나 나뭇잎등에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구고 한다.
나중에 친구 구상이 주선하여 일본으로 가서 부인과 두아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 갈때는 자존심등을 구기고 그곳에 살고자했으나 결국 보름만에
돌아왔다. 고국은 전쟁중인데 혼자 살기위해 밀입국하여 눌러살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부인과 아내에게 돈 많이 벌어서 돌아올께 한마디 남기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이후로 이중섭은 정신과 육체가 조금식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정말 일본으로 가기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으나 대부분 술값으로
나갔다고 한다.
1954년 대학미협전에 달과 까마귀를 출품하였으며 1955년 1월 18일부터 27일
까지 미도파 백화점에서 첨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모두 45점을
출품했으며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구 했다. 전시회는 대성황이었으며 26점이나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들뜬 마음에 그림값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을
불러 열흘동안 술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술판이 끝나고 수금이 안되고 수금된
돈도 전부 술값으로 나가 파산을 하고 말았다
그 이후 친구를 따라 대구를 내려갔으나 점점더 정신이 이상해지고 발작을
시작하였다. 그후 만성간염과 정신분열증이 겹쳐 여러병원을 옮겨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1956년 9월 6일에 세상을 떠나게 되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고 뼈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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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까마귀>
쏘스 제공: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