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blo Ruiz Picasso #1

2011.05.15 01:44

강학희 조회 수:53 추천:2









피카소는 말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가란 결코 끝을 낼 수 없다는 것,'나는

오늘 작업을 잘 해냈고내일은 일요일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결코 오지 않는

데 있다. 한 작품을 끝내자마자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기를 중단하고 더

이상 손대지 않기로 결심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아래에다 '끝’이라고 쓸 수는 없다

피카소가 말하기를…,엘렌 파르믈랭






 











































































1881


10 25일 스페인 남해안 항구도시 말라가(Malaga)에서 파블로 루이스 블라스코 피카소 출생


 


그의 아버지 돈 루이즈 브라스코(Don Ruiz Blasco)는 드로잉 교사이자 동물 그림 화가였고, 피카소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읽기, 쓰기 등의 능력이 저조하였지만, 그림에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 The Picador >


 


<The Picador>는 피카소가 여덟 살 때 그린 작품으로, 알려진 피카소의 작품 중 가장 최초의 작품이다.


그의 아버지는 피카소의 재능에 놀랐으며. 자신의 그림 도구들을 모두 물려주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 시기는 르느와르, 세잔, 드가, 고흐, 고갱 등의 인상주의 작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던 때였다.


 


피카소는 훗날 말한다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나는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1892(11)


가족 코루냐(Coruna)로 이사


피카소 미술학교 La Guarda 입학


 


1895(14)


아버지가 선생으로 있는 바르셀로나의 미술 아카데미 라 론자(La Lonja) 진학


 


아버지가 선생님으로 있는 미술학교였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출석도 거의 하지 않았고 결국 학교를 그만둔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897(16)


말라가 전시회에서 과학과 자애로 금상 수장


마드리드의 왕립 아카데미 드 산 페르난데(Academy de San Fernande) 전학


 


1899(18)


바르셀로나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접촉


 


※ 아방가르드: 본래 전투에서 가장 먼저 전진하는 척후병을 일컫는 군사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앞서 나가는 혁신적인 예술가 집단을 일컫는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창시자 앙리 드 생시몽이 이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예술 분야에서는 새로운 미술’, ‘젋은 예술’, 추상 예술’, ‘모던 스타일등의 장르를 일컫는 개념으로, 또 사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했지만, 보편적으로 지적 급진성을 띠는 특정한 문화적 실천을 대변하는 용어이다. 신인상주의의 쇠라, 야수주의의 마티스 등이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표하며,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가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1911년 체코 프라하에 아방가르드 미술가 그룹이 창설되어 입체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결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1900(19)


10 1일 친구 카사헤마스(Casagemas)와 파리에 감


모친의 이름을 딴 피카소란 이름으로 그림에 서명


 


파리 몽마르트에 있는 예술가 구역에서 고대하던 파리 생활을 하게 된 피카소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드가, 고흐, 고갱 등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6개월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돌아간 이유 중의 하나는 실연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있던 카사헤마스 때문이었는데, 마드리드에 데려다 놓은 이 친구는 나중에 다시 파리로 되돌아가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1901(20)


카사헤마스 권총 자살


5월 피카소 2차로 파리에 감. 청색시기 시작


바르셀로나의 Els 4 Gats 카페 전시회로 데뷔


막스 자코브와 만남


 


피카소는 말했다. "나의 청색 시대는 카사헤마스의 죽음과 함께 왔다"


 


 


< Death of Casagemas >


 


청색시대(1901~1904)


피카소는 파리에서 자신과 주변 하층민의 참담한 생활상을 보며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인디고와 코발트블루의 청색계열을 주로 사용하여 그렸다. 청색은 힘겨운 파리 생활과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으로 인한 그의 고독감과 우울한 감정을 잘 표현해 주었으며, 바르셀로나에서의 첫 전시회의 작품들은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의 초상화 50점으로, 어둡고 소외된 하층계급의 고단한 삶을 묘사하였다.


이때를 피카소의청색시대(靑色時代)’라고 부른다.


 


 


< La Vie (Life) >


 


1903년에 제작된 <La Vie (Life, 인생)>은 당시 피카소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위해서 피카소는 4장의 스케치를 했다. 원래 피카소의 자화상이었던 남자는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고쳐졌고 남자에 기대있는 왼쪽의 여인은 카사헤마스의 애인 제르맹이며 오른쪽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카사헤마스의 어머니이다.


 


1902(21)


4 Berthe Weil Gallery에서 전시


 


1903(22)


바르셀로나로 귀환


 


 


< The Soler Family >


 


<솔레르씨 가족>이란 작품에서 피카소는 인물과 깔개 위의 소품을 완성한 뒤 배경을 그리지 않고 친구에게 맡겼고, 친구는 그림의 배경에 숲을 그려 넣었다. 10여년이 지난 후 화상 칸바일러가 이 그림을 손에 넣고 피카소에게 자랑하자, 피카소는 친구가 그려 넣은 배경을 지워버리고 평면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물체를 다루듯이, 회화를 다룬다. 만약, 그림 속의 창이 눈에 거슬리면, 나는 내 방에서 그렇게 하듯이 창을 닫고 커튼은 내린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에서 태양 빛에 의한 색과 변화를 유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때문에 캔버스 전체에서 세밀한 표현으로 자연을 묘사하려 했다. 물론 후기 인상주의로 가면서 주관적인 관점을 갖게 되고 변화하게 되지만. 어쨌든 이와는 다르게 <솔레르씨 가족>에서 피카소는 배경을 무시한다.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있지만, 마네의 몇몇 작품에서도 배경을 생략한 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리다 만 듯한 이런 작품들은 당시에 무성의한 작품으로 취급 되었지만, 피카소는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호기심이 많았고 한 곳에 정체되기 보다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다.


수탉은 예전에도 있었다. 문제는 남은 인생처럼 그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뿐이다.” 


 


 


< The blind man's meal >


 


피카소는 <눈 먼 남자의 식사>와 같은 맹인의 그림들도 그렸는데, 피카소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문제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화가는 눈을 빼내야 한다. 마치 황금방울새가 더 잘 노래하도록 눈멀게 하는 것과 같이.”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내 생각엔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는 단지 사랑이 그림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와 별개로,


John Berger 라는 평론가는 피카소의 맹인과 관련된 작품들이 그 자신의 무절제한 성 생활로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영된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피카소가 성병 때문에 파리의 성 나사렛 병원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시기엔 유럽 전역에서 성병이 유행했다. 1928년 플레밍에 의해서 페니실린이 발견됐고, 이것이 치료제로 쓰이기까지는 10년이 더 지난 후이다.


 


1904(23)


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동거


장미빛 시기시작


 


 


< Le Repas Frugal (The Frugal Meal) >


 


 


가난한 식사,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 초라한 식사, 검소한 식사 등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피카소가 본격적인 장미빛시기에 접어들기 전 판화작품이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페르낭드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카소는 술집 식탁에 앉아 있는 메마른 한 남자와 여자를 보여주는 판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불행과 알코올 중독의 강렬한 감정을 무서운 사실주의로 전달한다. 그리고 그의 캔버스 중 하나가 나를 특별히 감동시켰다. 목발에 의지한 절름발이가 등에 꽃이 가득 찬 바구니를 지고 걸어가고 있다. 찬란한 색으로 페인트 한 꽃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배경까지도, 청색이다. 사나이는 수척하고 메마르고 비참한 체념의 표정이다. 그림은 이상하고 섬세하고 결국에는 자포자기한, 모든 인간의 동정심에 비통한 호소를 묘사한 무한히 슬픈 작품이다.”


 



4, 4번째로 파리에 가게 된 피카소는 세탁선(Bateau Lavoir)’이라 불리는 허름한 건물에 셋방을 얻어 지내게 된다. 여인들은 세느강의 배 위에서 빨래를 하였는데, 피카소가 머물던 셋방이 이와 같이 낡고 흔들거린다고 해서 그의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막스 자콥이 붙인 별명이었다. 이 집은 많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거쳐간 곳이며 르느와르, 고갱 등도 머물렀던 곳이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열애를 하며 장미빛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장미빛시대(1904~1906)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힘겨운 생활고를 겪고 있던 피카소는, 첫 번째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우울함과 좌절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시기 피카소의 그림은 차갑고 어두운 청색에서 노랑과 빨강 같은 밝고 따뜻한 느낌의 색상이 주를 이루게 된다.


 


1905(24)


시인 아폴리네르, 미국인 수집가 거트루드와 리오 스타인 남매를 알게 됨


서커스 단원들과 교제하며 관련된 많은 작품을 제작


 


 


< The Family of Saltimbanques >


 


황량한 배경과 주저 앉은 여인, 끊임없이 떠돌아야 하는 광대의 모습에서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의 표정이 역력하다. ‘장미빛시기가 시작 되었음에도 이와 별개로 그의 예술적 고뇌는 끝나지 않은 듯 하다.


 


 


< Portrait of Madame Matisse >


 


야수파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마티스의 <마티스 부인의 초상>이란 작품이다. 야수파는 고흐, 고갱, 신인상주의, 세잔느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피카소는 마티스의 작품들의 강렬한 순수 색채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그림에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이베리아 전통 조각과 아프리카 및 이집트의 조각과 가면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06(25)


거트루드 스타인의 소개로 마티스(Henri Matisse)와 처음 알게 됨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국의 여류 작가이자 미술 수집가로 많은 예술인들과 어울렸으며, 피카소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 초상화를 1905년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두 달이 넘도록 모델이 되어 여든 번 이상을 의자에 앉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던 피카소는 이 초상화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페르낭드와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온 피카소는 모델 없이 이 초상의 남은 부분인 얼굴을 아프리카의 원시 가면처럼 그려 완성한다.


 


모델을 전혀 닮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훗날, 거트루드 스타인은 회고한다.


"(이 초상은) 나의 여러 초상화 중에서 언제나 나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 Portrait of Gertrude Stein >


 


피카소는 거투르드 스타인의 집에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마티스가 사온 아프리카의 검은 나무 조각상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강렬한 흥미를 느낀다. 평평하고 단순화 된 이목구비는 피카소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균형과 비례에 대한 상식을 깨는 것이었다. 이것은 왜곡을 거쳐 입체주의의 시발점이 된다.


 


※ 왜곡: 시각예술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이다. ‘추상은 불완전한 서술, 곧 인식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정보의 제공으로 정의되는 반면, ‘왜곡부정확한정보의 제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추상과 왜곡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왜곡


첫째, 장식적인 목적을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데, 특히 빈의 화가 클림트,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에서 볼 수 있고, 아르누보 운동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물을 포함한 자연주의적 주제를 장식적인 목적으로 양식화시켜 부풀리는 경향은 마티스, 뒤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둘째, ‘왜곡은 추상과 마찬가지로 미술 외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는 데 썼다. 그 예로 이집트와 후기고전주의, 중세미술에서 나타나는 심리학적 시점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그림에서는 심리적으로 중요한 것은 크게 묘사된다. 멕시코 벽화가 이 방식으로 왜곡을 차용했다.


셋째, 현대미술에서 왜곡은 무엇보다도 표현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어떤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실보다 과장되게 그린다.


넷째, 추상과 결합된 복잡한 형태의 왜곡은 시각적인 은유를 강조한다. 가령, 인물의 모습이 산맥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 등이다.


다섯째, 색채의 왜곡은 물감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현대미술가들의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풍경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두드러지는 태양의 명도를 색으로는 높일 수 없다. 사실 태양은 노란색으로 할 수도 없다. 그래서 파울 클레는 태양을 검은색, 또는 다른 강렬한 색으로 왜곡 표현했다.


1930년대에는 많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왜곡에 대한 반감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1950년대에는 거의 사라졌다. 왜곡이 주로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때는 그다지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1907(26)


조르주 브라크와 입체주의를 전개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브라크도 함께 큐비즘 운동 참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림


수집가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 만남


 


세잔, "나는 자연에서 원통, , 원뿔을 봅니다."


피카소, "1906년 무렵부터 세잔의 영향이 천천히 모든 것을 휩쓸었다. 그리고 구성에 대한 지식, 형태들의 대립성과 색들의 리듬에 대한 지식을 모든 화가들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Les demoiselles d'Avignon >


 


이 작품의 처음 이름은 <아비뇽의 사창가>였다. 피카소가 사창가의 매춘부들을 묘사 했고, 모델 중 한 명이 그의 친구인 프랑스 아비뇽 출신의 막스 자콥의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미술전 출품을 권유했던 앙드레 살몽의 권고로 <아비뇽의 아가씨들>로 바꿔 출품하게 된다. 당시 품속 사범의 검열이 엄격했다.


 


전통적인 재현과 원근법이 무시되고, 세부적인 묘사가 생략되어 모호한 공간 속에 재구성 된 이 그림은 피카소가 평면에 입체감을 주려는 실험적인 작품이었으며, 입체주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각형과 사각형, 원 등으로 묘사되고 부위마다 다르게 채색되어 뒤틀어진 몸체의 이 그림을 당시의 사람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피카소에게 매우 호의적인 친구들조차 놀라고 당혹스러워 했으며, 피카소 그 자신마저도 이 그림을 미완성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두루마리 상태로 방치되었던 이 그림은, 1925년이 되어서야 '초현실주의의 혁명' 도판에 수록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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