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

2011.05.15 02:44

강학희 조회 수:364 추천:3








미라보 다리 Le pont Mirabeau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강이 흐른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
아 추억해야만 하는가 그사랑을
기쁨은 언제나 고통뒤에 왔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팔의 다리 아래로



영원한 시선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얼마나 인생은 느리고
또 얼마나 희망은 강열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날이 가고 ?일이 지나가고
가버린 시간도



옛 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강이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로 유명한 아폴리네르의 詩. 미라보 다리!


시인 아폴리네르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작가 입니다. 한마디로 질풍노도와도 같은 그의 삶.


 


그는 항상 자신을 귀족 출신이라 주장하고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고


어머니는 격정적인 폴란드 태생의 여인이었으며 영국 소녀와의 첫사랑에서 실연한후


브라크, 피카소 마티스의 친구가 되었고 그들 전위작 작가들의  감성의 대변자이자 였으며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과는 인생과 예술의 많은 부분에서 연인 비슷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었고


1차 세계대전에 외국인 신분으로 프랑스군에 자원참전한 전쟁에 대한 로맨티스트 였으며


결국 전쟁에서의 머리 부상으로 39세의 나이에 부인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던 20세기 초의 격정적 예술가 였습니다.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친위대 역할 못지 않게 본인 스스로가 아방가르드 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위의 '비가 내린다' 시처럼 그는 시를 마치 비가 뿌려지는 듯한 형태로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선 보입니다.


시의 시각적 표현 실험은 그가 많은 화가들과 접하며 받은 영감중 하니일 겁니다.


 


 


 




 


위의 그림은 마리 로랑생이 그린 코코 샤넬의 초상입니다.


그녀는 피카소와 브라크, 아폴리네르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했지만


태생적으로 입체파 화가가 될수는 없는 감성의 소유자 였습니다.


 


 



 


Marie Laurencin (October 31, 1883–June 8, 1956)


 


마리 로랑생(위좌측 사진)과 아폴리네르와의 관계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분명한것은


이두사람이 서로에게 많은 영감과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일 겁니다. 마리 로랑생이 그린 아폴리네르의 초상(우측)을 보면


그녀가 아폴리네르를 얼마나 존중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Muse Inspiring the Poet. Portrait of Apollinaire and Marie Laurencin, by Henri Rousseau, 1909


 


앙리 루소가 그린 마리 로랑생과 아폴리네르의 초상에서


동료 예술가들이 이 두사람에게 보내는 존경과 부러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로랑생은 시인 아폴리네르에게 시의 영감의 원천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아폴리네르는 그녀에게 로랑생 특유의 그림을 그리게 해주는 커다란 지원자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Portrait du poète (Guillaume Apollinaire) 1903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1880.8.26~1918.11.9]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작품은《썩어가는 요술사》(1909) ,《동물시집》등이다.


20세기의 새로운 예술창조자의 한 사람이다. 평론《입체파 화가》,《신정신》은 모더니즘 예술의 발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재로 그의 모습을 보면 과연 이사람이 미라보 다리와 같은 멋진시를 쓴 사람인가? 할정도로 유쾌하고 호방한 인상입니다.


특히 그는 큐비즘이 뿌리 내리는데 많은 지지와 환호를 그의 시와 평론들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큐비즘 뿐만 아니라 당시에 기존 회화의 권위와 관습에 반하며 새롭게 일어나던 새로운 표현방식 대부분을


열렬히 지지했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지지자였습니다.


위의 미라보 다리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새로운 아방가르드 예술론을 지지 하는 아래의 시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의 시에서 그는 대중들이 제발 새로운 예술론을 받아주기를


또한 이러한 것들이 대중의 적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선이며


지금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미지의 무한한 예술공간을 위해 전투를 치루듯


투쟁한다고 호소하며 새로운 예술가들에 대한 너그러움을 호소 하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폴리네르 같은 시인이 있었기에


그나마 새로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그로인해 큰 위안을 받을수 있었고


시인과 화가는 서로에게 위안과 영감을 주고 받으며 자신의 작업에 치열할수 있었을 겁니다.


 


 


 


 


 


 


조르주 루오 [Georges Rouault, 1871.5.27~1958.2.13] 


 


프랑스의 화가. 초기에는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졌다.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을 확립했고, 중후한 마티에르와 자유롭고 힘찬 선의 울림을 사용한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가 되었다.


 


 




 


From "Miserere": Sunt Lacrymae Rerum, 1926 ( Mortality Hath her Tears ) 
 


Miserere란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부르는 단선율 성가를 말합니다.


루오는 1908년경부터 재판관이나 재판의 정경을 그려, 악덕 ·위선에 대한


혐오를 격렬한 색면()과 굵은 선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다시 종교적인 테마로 돌아선 것은 1913년경부터인데, 이에 관한 판화제작에 몰두하여


명작 미제레레 Miserere(1917∼1927)의 연작()을 제작 하였습니다.


이작품 미제레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었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입니다.


 


한국에서도 작년 예술의 전당 루오展에 바로 이 작품 미제레레 전 작품이 전시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실제 작품보다 사진이 더 멋져 보이는군요,.


그때는 전 작품이 3단으로 빽빽하게 걸려있어서 썩 보기 좋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


 


 



          


Head of Christ


 


루오의 그림을 볼때 참고하여할 작가중의 한명이 바로 도미에 입니다(아래 그림).


역시 마티스와 같이 거침없는 빠른 붓질과 자연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듯한 과감한 색채의 사용.


마티스와 같이 과감하고 밝은 현란한 색채의 사용은 아니지만 오히려 무채색 계열의 강한 콘트라스트의 대비는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일 겁니다.


 


도미에적인 일회적인 표현과 마치 만화를 보는듯한 과장과 단순함


그리고 사회적 비판이 깔린 그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에게 많은 비난의 대상이자  화제작이었습니다.


 


 




The Imaginary Malady.(1879)
Honoré Daumier (February 26, 1808 – February 10, 1879) was a
French printmaker, caricaturist, painter, and sculptor 


 


오노레 도미에 [1808.2.20~1879.2.11]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사회 ·풍속 만화로 전환해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과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From "Cirque de l'Étoile Filante": Triste Os, 1934


 


 


 


 


모리스 드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4.4~1958.10.11]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비슴화가.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순수한 포비슴시대는 2∼3년으로 끝난다.


P.세잔과 입체파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작업을 했으나, 그 방향이 주지적()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나름의 정열적인 제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즐겨 그린 거친 날씨의 어두운 풍경화나 정물의 힘찬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변형, 과장)과 비극적인 터치의


바닥에 표현주의적인 기백이 넘치며, 본래의 특색인 야성의 부르짖음, 생명감의 약동이 일관하여 엿보인다


 


 




 


 




 


 


시의 화가들은 충격을 주려는 욕구에 이끌린다는점에서 자주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블라맹크는 마티스나 루오보다 훨씬 이러한 욕구에 충실했던 작가라고 할수 잇었는데


눈에 거슬릴 정도의 강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만들어 내는데 주력하였던 작가중 한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생명력'에 관한 것이었으며 생동하는 세계에 관한 적극적인 체험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개성에 의해 독일 표현주의 그림과도 자주 비교가 되고는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고흐와 같이 정규 아카데믹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을 정도였으며


이러한 자신의 통제 받지않는 자아가 그의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어느정도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파리 출생.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 부모는 음악가로 아들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유방임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12세경부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기계공 등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갔다. 화가를 지망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00년 A.드랭(1880∼1954)과 알게 되어 센 강가의 성관()에 공동 아틀리에를 가지고부터였다. 이듬해 고흐의 회고전을 보고 정열적인 작풍에 깊이 감탄하여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마티스의 권고로 ‘앵데팡당전()’에, 다음에는 살롱 도톤에 출품하여 H.마티스, A.마르케, A.드랭 등의 작품과 함께 ‘야수의 우리’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원색배합에 의한 순수한 포비슴시대는 2∼3년으로 끝나고, 1908년경부터 P.세잔의 화풍에 이끌려 어두운 색조 속에 견고한 화면구성을 보였다. 또 입체파화가들과도 사귀어 감화를 받기도 했으나, 그러한 방향이 주지적()이라고 생각하여 15년경 자기 나름의 정열적인 제작으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 즐겨 그린 거친 날씨의 어두운 풍경화나 정물에는 힘찬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변형, 과장)과 비극적인 터치의 바닥에 표현주의적인 기백이 넘치며, 본래의 특색인 야성의 부르짖음, 생명감의 약동이 일관하여 엿보인다.


 


 


 



Maurice de Vlaminck. Potato Pickers,


1905-7. Oil on canvas 46 x 55.3 cm.


 


1904년경 그는 두세점의 아프리카 조각품을 구매하게 되는데 이어서 아프리카 마스크와 인물상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의 친구이자 야수파 동료였던 앙드레 드랭이 바로 이 마스크를 샀는데, 블라맹크에 의하면


마티스와 피카소가 아프리카 조각품을 처음 본것은 앙드에 드랭의 작업실에서였다고 합니다.


(다른 설에 의하면 피카소가 처음 아프리카 조각품을 본것은 마티스의 화실에서였다는 주장도 잇습니다.)


 


 


 


  


앙드레 드랭 [1880.6.10~1954.9.8] 


 


 프랑스의 화가. 가장 대담한 포비슴, 큐비즘, 신고전주의로 작풍이 변했고 은근한 어두운 계통의 색채를 기조로 뚜렷한 명암과 오묘한 세부적인 잔손질로 화폭에 뛰어난 내면성과 청신한 현대감각을 담았다. 



파리 교외의 샤토 출생. 일찍이 회화와 기계에 취미를 느껴, 공과대학 입학준비를 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회화를 전공하였다. 처음에는 샤토에 살고 있던 M.de 블라맹크와 친교를 맺고 같은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1905년 H.마티스와 알게 되어 그 해의 살롱 도톤에 출품, 가장 대담한 포비슴(Fauvism:야수파)의 화가로서 주목되었으나, 2∼3년 후에는 격정적 색채를 버리고 침정()한 색조로 바꿨으며, P.세잔과 흑인조각단순화된 형태와 긴밀한 구성에 마음이 이끌린 것이 큐비즘(Cubism:입체파)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이지적인 그의 기질이, 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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