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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U 수사학 설교 리포트

2016.12.22 09:10

최선호 조회 수:19

 

 

수사학






2. 구약설교


설교 제목 :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

성경 본문 : 아모스 2장 6절-16절









과목: GS 411 Rhetoric Theory

지도교수: Rev. Paul S. Choi

날짜: 11/20/2009

제출자: 이명은


               







월드미션대학교





설교 제목 :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


성경 본문 : 아모스 2장 6절-16절


아모스서의 배경


  아모스는 예루살렘 남방 약 10마일정도에 위치한 드고아 출신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본래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였으며(암1:1, 7:14.15)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사의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그가 목자출신이지만 아모스서에 사용된 문체를 살펴보면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모스서가 선지자로 사역을 하던 때는 유다 왕 웃시야(B.C. 738-742)와 이스라엘왕 여로보암 2세(B.C. 786-746) 때에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땅으로 건너가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선지자 이사야나 미가와는 달리 호세아처럼 북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활동을 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의 다스림으로 크게 번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때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자신은 선지자가 아니였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다가오는 멸망을 예고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시고 가라고 하셔서 북 왕국에 대하여 예언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부자와 가난한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라는 철저히 두 개의 그룹이 나누어져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로부터 억압받고 심지어는 노예로 팔리기까지 했습니다. 부자들은 상아로 된 여름 거주지와 겨울 거주지를 갖고 있었으며 걸상과 비단 방석, 포도나무, 그리고 몸에 바를 귀한 기름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바산의 암소 들처럼 뚱뚱하고 살이 쪘으며 자신들의 마실 것을 위해서 남편들을 불의로 내 몰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도와줄 힘이 없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종교적으로는 이방의 우상 숭배가 고의적으로 조장되는 상황이었고, 도덕적으로는 살인, 강도, 간음 등의 범죄와 사치와 향락 등의 사회악이 뿌리 깊게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이와 같은 물질적 풍요와 영적 타락으로 물든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때였습니다.


  아모스는 타락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경고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이 다윗의 언약을 거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절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땅에는 이기주의와, 탐욕과, 부도덕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박이 만연해 있었으며, 공의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이러한 아모스의 선포는 북이스라엘에 대하 경고의 의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모스서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서의 독특한 주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의 자세, 즉 하나님을 경의하는 신앙으로 그 앞에서 공의를 행치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의의 삶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며 또 형식적으로나마 율법에서 규정한 대로 여호와께 각종 제사를 드린다 할지라도 결코 멸망 가운데서 구원받을 길은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생활


  아모스 시대는 가장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사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과 풍요는, 힘없는 사람의 희생 위에서, 그리고 힘이 없다고 억지로 희생 시켜서 얻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볍게 보이고, 예배는 자기 속임수에 불과했고, 불법이 삶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며 부의 축적이 삶의 목표가 되는 그런 때였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참혹한 삶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밀려나서 결국은 종이 되고 헐벗고 굶주려야 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뇌물과 권력과 법을 이용하여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또한 그들의 사회는 성적으로도 타락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는 말초적 쾌락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과 종교인들은 죄를 씻어야 할 곳,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곳,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야 할 곳에서도, 자신의 탐욕과 부패로 얻은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내 놓기보다는 뺏은 겉옷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훔친 물건을 서로 나누면서도, 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고발하고 회개하기는커녕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자신이 흘려야 할 회개의 눈물과 억울한 형제자매들의 쓰라린 눈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배를 잔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큰 연회처럼 호화로웠으나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배 행위는 같은 종류의 사람들의 사치스런 모임에 불과했습니다.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예배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요 순종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무관한 것일까요? 우리는 뇌물을 주고받고, 부패하고, 성적으로도 부패했으면서도 그 마음을 그대로, 생활로 연결 지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삶의 목표와 생활양식부터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와 거룩하고 자비한 마음을 이루는 것을 기도의 제목, 이루어야 할 목표, 그리고 자랑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호화로운 예배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동의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장과 화려함에 세뇌되고 있습니다. 교회시설의 화려함이 나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양적 성공사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작은 교회나 큰 교회를 막론하고 주일예배의 주보를 그렇게 화려하게만 만들어야 참된 예배가 됩니까? 얼마 전 한국의 어느 큰 교회를 방문했을 때 주일예배의 주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몇 페이지 되지 않은 주보는 단색으로 인쇄됐고 예배와 사역에 꼭 필요한 내용만 잘 편집해서 가장 값싼 낮은 질의 용지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배울 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요란한 성장과 화려함의 밑바닥에는 허영과 자랑과 허세가 깃들이지 않았는가 살펴봐야하겠습니다. 교회는 예배를 비롯해서 모든 이벤트에는 순결과 소박함과 순종과 절제 속에 사랑이 있어야하겠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거룩한 것과 사랑과 절약과 절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부터 생활방식과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썩었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썩었는데 무슨 썩은 세상에 들어가서 역할을 하자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종교인들, 교회, 교인들이 썩었는지 안 썩었는지 주변을 살펴봅시다. 물질, 권력, 쾌락, 파괴적인 경쟁을 위해서 힘쓰고 싸우고 악을 자행하면서도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교단의 지도자들이 무슨 자리라도 하나 차지하려고 하면 돈이 오가고 부정선거운동을 하고 서로를 욕하고 경쟁적으로 헐뜯으면서 명예와 이권을 위해서는 신앙과 신망을 다 잃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다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탐욕과 부패는 아모스가 사역을 하던 때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우리 자신이 소금과 빛이면 어디 찾아갈 것 없고, 있는 그 자리가 자연히 선한 영향을 미칠 것인데, 우리 주변이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아 우리는 소금이 아니거나 맛을 잃은 소금일 것입니다. 남을 희생시켜 높아지는 것은, 아모스시대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보다 교인들을,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교회를 섬길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주님도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만은 꼭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우리의 제물에 약탈물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헌금은 자기가 번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훔친 것, 더러운 것, 사기 쳐서 얻은 돈, 뺏은 것으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헌신에 부정하고 불의한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분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한국인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인이 집중된 한인주거지의 초등학교에서조차 한국에서 하던 방식으로 교사들에게 봉투를 주는 일이 있다고 하니 우리 민족이나 동포들이 크게 각성해야 될 일입니다.


  아모스시대에나 오늘이나 뇌물은 힘없는 사람을 팔아먹는 것이요, 짓밟는 것이요, 결국 죽이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공무원, 정치인, 관리들, 경영인들, 교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절대로 뇌물 주지도 받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주고받는 고질병을 고쳐야 합니다. 아모스 시대는 그것을 못 고쳐서 자기 백성을 죽이고 그 나라도 망해버렸습니다. 뇌물은 희생자를 만듭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판다고 한 다음에는 신발 한 켤레 값에도 재판을 왜곡시킨다고 아모스가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한 번만이라도 받으면 다음부터는 습관이 되고 양심이 마비되어 작은 뇌물에도 불법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누군가가 불에 타죽거나 큰 건물에 깔려 죽게 됩니다.


   우리부터 정신을 차리고 우리주위를 돌아봅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청결하고, 겸손하고, 자비롭고, 절제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칼빈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것으로 경계를 받아 모든 악행을 그치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에 따라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게 하소서. 오, 주여! 복음과 예언서와 율법에 명시된 당신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사 당신의 교훈 안에 항상 거하게 하소서.”

   우리는 옷을 찢고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2)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아모스 시대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호화스런 밑바닥에는 그야말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호화스런 생활을 이어가는 어느 한 구석에는 굶주려서 갈비뼈가 앙상한 상처 입은 영혼들이 버려져있었습니다. 한쪽에서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올 때 다른 한쪽에서는 중노동에 시달려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호화스런 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평안 속에 쉬고 있을 때, 어느 구석에서는 땀방울, 눈물방울, 핏방울로 기진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당시의 아모스는 그들의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들의 삶을 안타깝고 또한 가슴 아프게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험하고 어려운 시절에도 주의 신실한 종들은 그들을 대변하며, 그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중세 시대에 프란시스는 심판으로 달려가는 사회를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그는 빛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함으로 번창해 가던 그 사회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착취당해 죽어갔습니다. 교회의 예배는 호화롭고 웅장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궁핍하고 헐벗었습니다. 이러한 불신앙과 탐욕적인 사회의 한 가운데서 인간이 진정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탐욕은 희생자를 냅니다. 탐욕은 사회 전체를 파괴시킵니다. 부패는 심판을 불러옵니다. 프란시스는 휘청거리며 기울어져 가는 중세 사회에서 아주 적은 것으로 기뻐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난한 이와 함께 살아가며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침몰하는 사회를 그리고 침몰하는 교회를 건져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아모스와 프란시스가 드물 뿐, 굶주리고 버림받고 박해받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고 그들의 참된 자비의 집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진정 그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우리의 작은 선행마저 의로 여기기 쉽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30-37)에 나오는 율법학자는 자신의 선을 자랑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을 의를 선전하기 위해, 또 사실상 불쌍한 이웃을 돕겠다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을 뒤집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쪽이기 때문에 우리가 베푼 사람을 이웃이라 말하기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찾아내어 ‘내가 정한’ 선물의 양과 질로 내가 이웃 노릇했다고 자긍합니다. 봉사, 구제, 자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헤아림 없이 작은 봉사에 큰 감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가 우리에게 이웃이라 할 것인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강도는 선행을 베푸는 율법학자를 이웃이라 하겠습니까? 누가 한인교회 보고 가난한 자의 이웃이라고 말합니까? 가난하고 버림받고 낭패 당한 사람들이 우리를 이웃이라고 말합니까? 우리들은 그리고 우리 한인교회는 강도 만난 사람들, 환난 당하는 사람들로부터 이웃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의 개념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만들어 놓은 베데스다(벧 헤세드: 자비의 집)에는 병자, 눈먼 자,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자, 버림받은 사람들, 소외된 자들, 고통과 찌듦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의미의 자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명절도, 순례도, 예루살렘도, 경건도, 은혜의 전당도, 심지어는 은혜의 물까지 그들의 좌절과 소원과 침묵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종교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았지 하나님에 대하여는 무지하여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사랑은 어디에, 그 종교의 근본은 어디에,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는 종교인들끼리 놀아라! 찬양을 올리고 대 음악제를 열고 미술가 건축가를 동원하여 인간의 능력의 웅대함을 과시하고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되고. 병자들은 병자들끼리 살아라!" 누워서 지내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 누군가 자비를 베풀면 잠깐 배를 채우고 ... 베데스다는 베푸는 사람들이 그렇게 베풀었어도 결코 병자들에게 베데스다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기쁨이 남을 더 슬프게 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종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환희의 군중들에게는 누워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종교는 우상 숭배입니다. 교회는 참된 베데스다가 되어야 합니다.


  베데스다는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LA의 ‘양로병원’과도 같은 곳입니다. 병원도 가보고, 집에서 요양도 하고, 재산도 탕진하고, 도울 사람도 더 이상 없고 집에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38년이나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처참한 경쟁 사회였습니다. 승자의 법칙, 생존의 법칙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가장 중환자였기 때문에 동하는 연못에 일등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수 십 년간 이 게임에 나섰으나 한 번도 이겨보지 못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곳을 찾아가시고, 38년 된 병자를 만나시고, 질병과 낙심 속에 있는 분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는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도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주님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는 분, 영원한 위로로 함께 하시는 주님은 그들을 위로하시기를 원하는 분입니다. 삶이 고달프고 인생이 처량하고 도울 이 없는 이들을 주 예수님의 심정으로 찾아가서 싸매고 돌보고 사랑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가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그들은 오늘도 “주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없지만 아모스 시대의 그 불쌍한 패배자들은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라고 친구라고 인정받아야겠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터키와 중국에서 대 지진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현장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저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구조대원들이 며칠 씩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매몰된 사람들은 수색했습니다. 극적으로 찾아낸 사람 중에서 코끝에 호흡이 붙어있으면 즉시 흰 모포를 씌우고 앰뷸런스에 태워 병원으로 급송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게 찾아낸 사람일 지라도 코끝에 호흡이 없으면 어김없이 시커먼 대형 쓰레기 비닐 속에 그 시체를 수습하였습니다. 터키나 중국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생이 대체 무엇입니까? 코끝의 호흡이 멎으면 대형 쓰레기에 불과한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느 날, 불현듯 끝나 버릴 인생이 대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안다 말하겠으며, 무엇을 할 수 있다 장담하겠습니까? 현존자요, 영원자요, 전능자요, 절대자시며 , 심판자이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단 1초인들 제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의 실상을 바로보고 깨달을 때에만 허황되고 가식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섬김과 봉사의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결   론


  아모스서가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도는 항상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 있는지를 확인,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자는 또한 이웃에 대해 공의와 사랑을 향하게 됩니다. 만일 그의 삶에 이 같은 공의와 사랑이 없고 불의와 미움이 가득하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2) 성도의 관심이 하나님과 다시 찾아 올 천국에 대해 있지 아니하고 현세적인 부귀영화에 있을 때 항상 범죄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위엣 것을 찾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3) 아무리 종교적인 열심과 신학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공의를 행하는 실천적인 삶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4)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범죄 할 때는 구원과는 별개로 징계의 채찍을 맞습니다.(히12:4-13). 그러므로 성도가 되었다 해서 방종해서는 안 되며 항상 죄를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15:34)


5) 하나님은 항상 우리 성도들의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비록 위험하고 힘든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자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아모스와 같은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행5:29)


  이제 우리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섬김과 봉사를 다하는 진정한 크리스찬이 되십시오,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이 땅에 남아있는 자들이 우리의 마지막 장도를 박수로 환송해 줄 것입니다. 아니 그 순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우리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박수로 친히 맞아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