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 서재 DB

독자창작터

| 최선호의 창작실 | 내가 읽은 좋은 책 | 독자창작터 | 비밀글쓰기 | 회원신간 | 추천도서 | 문학자료실 | 일반자료실 |

WMU 수사학 설교 리포트

2016.12.22 09:22

최선호 조회 수:20

 

 

 

수사학






1. 신약설교


설교 제목 : 아들에게 향한 아버지의 교훈

성경 본문 : 고린도전서 4장 14-21절  









과목: GS 411 Rhetoric Theory

지도교수: Rev. Paul S. Choi

날짜: 11/20/2009

제출자: 이명은


               







월드미션대학교


설교 제목 : 아들에게 향한 아버지의 교훈


성경 본문 : 고린도전서 4장 14-21절


1. 고린도교회의 배경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 세운 교회이며,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글로에의 종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이 서신 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생활양식에 있어서 다양한 문제들, 즉 분파, 송사, 부도덕, 의식, 주의 만찬에 대한 남용, 영적 은사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패와 분열을 책망을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며 개인과 교회의 세속성에 대한 기독교적 삶의 원칙에 대해 교훈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주위세계와 구별한다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에 위치하였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페로폰네소스 반도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육로와 수로가 다 교통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는 많은 이주민들이 자기들의 신상(神像)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정착하게 되었음으로 고린도는 하나의 신상 박물관처럼 종교적으로 다양한 혼합된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교도들의 생활 방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 명의 직업적인 창녀들이 사랑과 정욕의 신인 ‘아프로디테’를 섬기고 있었으며 그들의 예배는 성적으로 음란한 예배였으며, 이런 성적행위를 종교적 헌신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2. 고린도교회의 문제점


  고린도 지역이 가지고 있었던 많은 문제는 고린도 교회 안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파당과 부도덕한 생활의 문제가 있었고 심지어 교인끼리 관청에 고발과 소송을 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교회가 갈등하고 문제가 생기면 교인들이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하고 병들어서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받아서 교회가 변질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항상 이웃 나라에 영향을 주는 나라였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에는 이스라엘은 언제나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건강한 신앙인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항상 영향을 주지만 신앙이 연약해지면 반대로 주변상황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싸움만 하더라.” 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이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면서 한참 싸우는 것을 본 맞은편에 앉았던 한 할아버지 승객이 참다못해 큰소리를 치면서 “여기가 교회냐? 고래고래 소리치며 싸우게 ... 싸우려면 교회로 가서 싸워라”하셨답니다. 참으로 웃지 못 할 일입니다. 언제부터 우리교회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까? 멀리 볼 것 없이 우리주변에도 교회 안에 목회자를 둘러싼 분쟁이 오랜 기간 이어져 어려움을 겪은 것을 잘 압니다. 최근 마무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큰 방해가 됩니다. 그 일들은 그 교회뿐만  아니라 그 일을 알고 있는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장해가 되며, 나아가서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많은 분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파, 게바파, 또는 아볼로파니 하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가 최고니 예언의 은사가 더 좋다느니 하면서 심지어 받은 은사를 가지고도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교회의 양면성입니다. 교회의 모습에는 본질과 현실이 너무도 다를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주님을 닮아야 하는데 교회의 현실은 세상을 닮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르치는데 성도들의 삶은 세상 사람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울은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3. 바울의 책망과 권면


  고린도전서 4장의 전반부에는 고린도교회의 잘못을 심하게 책망하며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말 속에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틋한 애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4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부끄러운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체면이나 면목을 잃었을 때,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쓰여 진 시대에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여자가 아이를 갖지 못했을 때, 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젊어서 과부가 되었을 때, 도적질했을 때, 성적으로 더러운 행실, 얻어먹는 일 등이 부끄러운 일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진정한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끄러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게 될 죄인 판결입니다.


  마가복음 8:38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육체의, 마음의 부끄러움이 아닌 영혼의 부끄러움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뉘우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울의 신앙을 본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녀가 마지막 까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훈계합니다. 14절 하반 절에서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하셨는데 아버지에게는 사랑과 공의가 있습니다. 공의란 절대적인 공정하심과 의로우심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도 넓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여기서 지팡이는 나를 이끄시는 사랑의 표현이고 막대기는 나를 때리시고 징계하시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사랑하는’이라는 말과 ‘권하려 하는’이라는 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 ‘권 한다’는 것은 ‘권면 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의 훈계와 같은(엡 6:4)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듯 ‘사랑’과 ‘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고린도 교회 성도를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말하고 있는 말씀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자와 그의 교인들을 결합하는 매듭은 부모와 자녀간의 부드러운 매듭과 같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해산하는 수고를 겪은 후에 자녀를 얻듯이 목회자도 한 사람의 새로운 신자를 얻을 때 동일한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얻기 때문입니다. 해산하는 수고 뒤에 얻은 자녀에 대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또 한편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의 사랑을 잃는 것보다, 또는 그들의 생활이 아버지가 올바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에서 어긋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바울은 이 아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원하는 바대로 믿음이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들을 매로 다스리자니 안타깝고 온유한 마음을 갖자니 그들이 어그러진 길에서 돌이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과 고통을 안고 그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없이는 참다운 자녀로 양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교사로서의 목회자도 필요하지만 진정으로 필요한 교역자는 ‘아버지’로서의 목회자입니다. 교역자는 그의 영적 자녀 된 성도들을 마음을 다해 가르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입니다. 이 노예들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번역되었는데(갈 3:24) 이들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이며 때로는 학습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으로  ‘파이다고구스’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1)하나는 ‘가르친다’는 지식적 개념이며 (2) 또 하나는 ‘지도 한다’는 지도권의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가르치고, 지도하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스승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일만 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일만이란 단어는 수사학에서 과장법을 사용한 풍자적인 표현으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자들, 거짓 스승, 거짓 교사들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고린도 교인들 대부분이 그로 인하여 믿음을 가지게 됐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은 2차 선교 여행 중인 주후 50-51년경 겨울부터였습니다. 이례적으로 이곳에서 바울은 1년 반 정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홀로 이곳에 와서 당시 천막사업을 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그들과 같이 자기 손으로 노동을 해 가면서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후원자로 도왔고, 후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유대인들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방해와 박해 때문에 사도바울은 너무도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런 고달픈 시절을 바울은 4장 11-13절에서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초창기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힘들었던지 갈라디아서 4:19에 해산하는 수고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마치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겪는 그 고통처럼 고린도교회를 개척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큰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그저 낳았다고 다 부모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자식을 위해 헌신할 때 그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하며 자녀를 돌보지 않고 수고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다면 그는 친 아버지가 아닙니다. 요즘엔 자식을 버리는 이기적인 아버지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올바른 아버지의 태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육의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적 아버지도 마찬가지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양육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 나아가서 새 신자들, 믿음이 아직 어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개종하게 된 많은 이방인들에게 영적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생계비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12절) 그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마다 그들을 향한 지난날의 해산의 고통을 상기시키면서(10-13절; 갈 4:19) 돌아올 것을 간청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믿음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1)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 및 권면이 진실 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2)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한 관계로 묘사합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복음을 통하여” 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젖과 밥으로(3:2)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며 훈계하고 의로 양육하려 한 자들보다는 지도자라는 직책(職責)만을 얻기에 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모범을 보인 바울


  인류 역사상에 최악의 참혹한 사건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독일의 히틀러가 저지른 600만 유대인 학살입니다. 세계 제 1차 대전 때에는 독일에서 만큼 유대인들이 성공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멸망하여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제 이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민족은 유대인들이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 유대 감정을 독일 민족들에게 잘 이용했습니다. 그는 빈에서 자라났는데 빈은 유대인에게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곳이었고 그도 반 유대 감정을 가지고 자라났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물건을 받아다가 돌아다니며 파는 행상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지고 간 물건을 다 팔아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한번 나가시면 한, 두 달이 걸려야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남편이 집을 비웠기 때문에 히틀러의 어머니는 고독과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이웃남자들하고 불륜 관계를 맺었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남자들 중에서 돈 많고 세력이 있는 전형적인 유대사람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그는 자랐습니다. 히틀러는 어머니에게 그러지 말라고 눈물로 하소연하며 매달렸지만 어머님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그렇게 성장기를 보내며 성인이 되어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미워했는데 하나는 유대사람이고 하나는 여자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유대인들을 육백만이나 죽이는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주변에 교양 있고 아름다운 여자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는 여자들을 미워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의 옳지 못한 생활을 보면서 원한을 품은 아들은 결국 역사를 크게 얼룩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4: 15,16)고 힘주어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닮습니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행위 하나하나를 흉내를 내며 자랍니다.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고린도교회를 낳은 부모처럼, 모든 성도들이 바울을 본받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을 본받으라는 것은 바울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들이 물러가고, 당시 예수님의 삶을 잘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오늘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한 것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1)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을 행하고, 2)바울의 겸손과 그 고난에 동참하고, 3)지적인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림으로 인해서 화합하고, 4)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인 아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인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4장 20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이 있음이라”에서‘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서 공관복음서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나 바울서신 가운데서는 고린도전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을 의미합니다(막1:15).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현재 영적으로 지배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0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하여 저들을 책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5,6과 4:8이 시사한대로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한 수준에 있었으나 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먼 시기(猜忌)와 심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말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고후 5:17)과 그 능력(요 3:3-8)을 암시한 것입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삶의 공동체 곧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 것이며, 바울은 인격과 삶의 변화, 즉 행동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헛된 말과 지식 즉 영적 교만 속의 열매 없는 신앙생활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21절의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에서 매, 사랑, 온유한 마음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훈계하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바 있습니다. 21절에서도 매와 사랑을 대치시키지 않는데, 만약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픈 채찍으로 훈계하든지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격려하든지 간에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사설(邪說)과 교만으로부터 해방되기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매를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5. 결  론


  고린도전서는 바울 사도가 성도의 실제적 삶에 중점을 두고 교훈하고 있는 편지인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초대 교회 때부터 존재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고 공동체 생활 속에 세상의 지혜를 끌어들이려고 하는데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다루어 왔는데, 세상적인 전망을 선택 했던 고린도 인들의 이 잘 못 때문에 그들은 교회지도자들을 치켜세우고 그들을 중심으로 서로 대적하고 분쟁하였습니다.이러한 분쟁적인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복음에 뿌리박은 신학과 삶의 양식 속에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으며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지를 고린도 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들입니까? 교만하고 스스로 충족하며 군림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주님의 고난을 믿고 따르는 자들인가?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너희는 이러한 나를 본받는 자가되라.”(4:16) 주님을 따르는 삶, 즉 고난과 섬김과 자기희생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주의 제자들의 삶의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를 위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6,17) 하였습니다.


  여기서 고린도적인 기독교인의 삶과 바울적인 기독교인의 삶의 차이, 또한 세상적인 지도력과 성경적인 지도력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참된 복음의 사역자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십자가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와 오늘 우리를 향하여 주신 경고요 권면과 아울러 오늘날 사역자가 교회와 신자들에게 해야 할 경고와 권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바울 사도의 편지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교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도바울의 권면과 충고와 경고의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