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만 되면

2018.12.28 12:17

최정순 조회 수:3

김장철만 되면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최 정 순

 

 

 

  올해도 어김없이 김장김치를 애들 집으로 부쳤다. 올해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해마다 줄곧 그래왔다. 그러니 특별할 것도, 떠벌일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택배포장을 뜯으면서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면 김장하느라 힘들긴 했으나 마음은 흐뭇했다.  

 

  신혼 시절, 음식 솜씨가 별로였던 나는 밥상 차리기가 정말 부끄러웠다. 그럴 때 ‘새댁’을 부르며 울타리 너머로 겉절이 한 접시가 넘어오는 날은 얼마나 고마웠던가? 한 끼를 때웠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었다. 꿈속에서까지 연탄불이 꺼져 허둥대는 꿈, 도시락 반찬을 걱정하는 꿈을 꾸었을까? 신혼때 집들이를 하던 날, 안주를 더 가져오라는 소리가 지금도 아스라하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보내주신 김장김치며 밑반찬을 받았을 때, 그 마음은 두둥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밥짓는 일이 즐거웠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츰차츰 내 나름의 반찬 만드는 솜씨도 나아졌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건 하나, 보기엔 먹음직스럽게 조린 두부조림이 어찌나 짰던지 젓가락을 밥상에 동댕이치던 새신랑! 자기 엄마 손맛에 길들여진,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 속의 그 남자, 지금도 짜다 맵다 타령을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도 자기밥상을 척척 잘도 차린다.

  직장생활 하랴, 살림하랴. 출퇴근시간과 전쟁하는 며느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하다. 지난 날 나를 보는 것 같아 맛은 둘째 치고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생각뿐이다.  

 

  시할머니 제삿날로 기억된다. 막 시집온 나에게 묵을 끓이라며 메밀가루를 내놓았다. 생전 처음 보는 메밀가루를 채로 내리는데 어찌나 미끄러운지 밑으로 걸러지질 않았다. 물을 자주 주는 바람에 채 밑으로 빠지기는 잘 했으나 묵물이 묽어 그야말로 묵이 ‘묵사발’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와 큰동서는 밭으로, 나는 아버님과 술밥을 쪄서 술을 담그는 일을 하고 있었다. 불을 세게 지펴서 술밥이 타고 싼내가 났다. 몰래 소 구시통에 퍼다 부었는데 글쎄 탄 밥이 불어서 구시통 위로 하얀 쌀밥이 수북이 올라와 들켰던 일이며, 시키는 일마다 어설프니 나중에는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이 내 전담이 되어버렸다.

 

  젯밥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지었다. 동짓달, 시렁에 매달린 5촉짜리 전구가 그네를 탔다. 돼지우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외양간에서 짤랑거리는 원앙소리가 생전에 뵌 적 없는 시할머니의 혼이 오시는 흔적 같아서 무서움으로 머리끝이 쭈뼛했던 그날 밤, 어머니와 형님은 방에서 제상을 차리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일이 어디 그리 쉽던가? 쎈불, 중불, 나중에는 재지는 불을 만드는 일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년으로 접어들어서도 매실과 개살구를 구별 못해서 시금 털털 ‘개살구주’를 담갔던 일이며, 팥죽에 생강을 넣은 일이 지금도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곤 한다.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 배움이다.  

 

  사실 김장철만 되면 많은 갈등을 한다. 김장할 일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돌멩이가 앉아있는 기분이다. 머릿속은 어수선하여 두서가 없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면 조급증까지 보태어 맛있게 담가야 할 김장이 걱정거리가 된다.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해가 갈수록 이런 생각이 짙어진다.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도 김장 이야기는 김치 맛만큼이나 분분하다. 김장을 하느냐 마느냐. 몇 포기를 담그느냐가 첫인사다. 아는 형님은 며느리가 담가 오니 김장은 신경 안 쓴다는데, 또 다른 언니는 딸네 아들네 다들 몰려와서 같이 담근다는 자랑이다. 또 내 친구는 아예 김치 집에 몇 통을 주문했다는데 그래도 나는 내 손으로 나 혼자 담그는 쪽에 손을 들었다.

 

  작년에 써놓은 김장 레시피(recipe)를 펼쳐보고 있다. 절임배추를 살까, 생배추를 사서 절일까? 또 고민을 한다. 고춧가루, 마늘, 생강, 젓갈 등은 미리 준비해 놓았음에도 배추절임부터 양념 준비까지 몇 날을 잡아야 끝내는 일이라서 그렇다. 김장이란 게, 쌀 씻어 물 붓고 밥하듯, 뚝딱 해치우는 일이던가? 아마 밥상에 오르는 반찬 중에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김치일 것이다. 김치를 가지고 만드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치만 맛깔스럽게 담가놓으면 겨울 내내 반찬걱정은 끝이다.

 

  사람마다 자기 스타일(style)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누가 도와준다고 덤비면 나는 싫다.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해가며 차근차근 해야 일이 손에 잡혀 실수 없이 잘하지, 그렇지 않으면 간맞추기나 양념 가늠하는 일에 혼선이 온다. 한 예로 친구 둘이 왔는데 점심 챙기랴 이것저것 지시하랴 나중에 보니 꼭 넣어야 할 양념 청각을 빠뜨려 이미 담근 김치 위에 뿌린 적도 있다. 그러니 멀리 살고 더군다나 일도 서툰 며느리들을 불러대자니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복잡하기만 하다. 물론 김치 담그는 방법을 가르치는 의미도 있겠지만 내 스타일이라서 어쩔 수 없다. 며느리 역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쫓겨 안 할 뿐이다. 사실 내 손으로 담근 김치지만 어느 해는 맛있고 어느 해는 맛이 덜하다. 작년에는 물김치가 참 맛있게 담가졌었다. 근데 올해는 물김치는 실패한 것 같다. 솜씨가 움푹진폭이다. 이런 솜씨를 자식들뿐만 아니라 이 집 저 집 나누다니 용기가 대단하다.

 

  김치를 받았다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다. 큰며느리 왈

“작년 김치보다 이번 김치가 덜 짜고 배추도 연하네요. 저희들을 부르지 그랬어요? 내년부터는 김장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알아서 할게요. 어머니, 용돈 넣었으니 예쁜 옷도 사 입으세요.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하고 통화가 끝났다.

  이번엔 둘째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야기는 비슷했다. 내가 소문도 없이 김장을 하는 바람에 뜻밖에 김장김치를 받고 보니 어찌 좋기만 하겠는가? 

 “연락하셨으면 제가 가서 도와드렸을 텐데요. 내년에는 꼭 도와드릴게요.  

하고 통화가 끝났다. 여기서도 용돈이 따라왔다.  

 

  “내년부터는 김장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알아서 할게요.” 라는 말 대신 “저희가 담가 드릴게요.” 란 말로 바꾸면 어떨까?  

 

  ‘그 조앙에서 그 며느리 나온다.’는 속담이 있다. 나 역시 자랑할 만한 음식 솜씨가 아니지만, 내 며느리들에게 한 가지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나라 김치는 세계적인 발효식품이다. 너희가 김치를 사서 먹든 담가서 먹든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김치 담그는 방법을 익혀 담글 줄은 알아야 한다고 본다. 나는 내 며느리들의 김치 담그는 솜씨를 ‘소중한 자랑거리’로 삼고 싶다.    

    .                                (2018.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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