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의 3초 전쟁

2019.01.06 13:29

최정순 조회 수:2

마음과의 3초 전쟁

 - 화담숲 문학기행 -

           안골노인복지관 수필반  최 정 순

 

 

 

  드라마 보는 재미로 저녁을 기다린다면,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비아냥거릴까? 아무래도 좋다. 평범한 하루의 끝자락, 저녁이 좋다. 마치 무탈하게 몸을 푼 산모처럼,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연속극 이야기 속에 빠져들다가 나도 모르게 포근히 잠든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무릎덮개를 챙겨 TV앞에 앉는다. 그리고 채널을 고정시킨다. 따끈한 식혜 한 모금이 목줄을 타고 내리면 나른한 내 몸과 마음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삭힌 식혜속의 밥알처럼 가벼워진다.  

 

  어느 정도냐면, 애들이 나와 통화하다가도“연속극 보셔야죠.”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친구와 지지고 볶다가도, 세탁을 하다가도, 그 시간만 되면 눈과 귀는 TV화면에 꽂힌다.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축구나 야구중계로 연속극이 방송되지 못하면 짜증이 나고 허망해서 작태를 부린다. 그러다가‘내일이 있잖아?’하는 생각을 하면 평상심으로 돌아온다. 이런 상황을 나는 '마음과의 3초 전쟁'이라고 말한다.  

 

  드라마 내용은 안 보아도 비디오라고 치자. 근데 화근은 악역장면과 악역을 맡은 배우가 떠올라‘도둑놈’이니 ‘나쁜 년'이란 욕설을 분이 풀릴 때까지 퍼붓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역을 향하여 서슴없이 내가 악역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무대고 너와 내가 연기자란다. 드라마 같은 인생길에서 배우인 내가 시시때때로 어떤 역할을 어떻게 연기하는지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니까 뒤로 미루기로 하자. 어느 날, 내가 저지른 드라마 같은 장면은 이렇다.

 

  저녁에 드라마가 있다면, 가을엔 문학기행이 있다. 1년을 기다렸다. 때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단풍의 계절, 20181027일이었다. 빨간색 코끼리 같은 대형버스는‘전북수필문학회’일행을 태우고 경기도 곤지암리조트에 있는‘화담숲’을 향해 달렸다. 화담(和談)이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황진이가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은 조선전기 성리학자 서경덕의 호를 따서 붙인 화담(花潭)숲으로 착각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뒤스럭을 떨어서인지 차 안에서 감기는 눈꺼풀과 씨름했다. 어디쯤 왔을까? 오창휴게소란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꼭 차번호를 확인하고 내린다. 실수로 쩔쩔맸던 기억이 오늘따라 물에 불린 미역가닥처럼 나팔나팔 되살아났다. 급한 마음에 화장실로 내달렸다. 수많은 버스와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관광객과 어우러진 속에서 내가 타고 온 버스를 찾느라 이리저리 기웃거렸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시간은 촉박해오는데,  우리말인데도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방인 취급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길을 잃으면 방향감각부터 둔해진다는 사실을 진즉 경험했건만, 오늘 나는 그 일을 재탕하고 말았다.

 

  ! 치자로 끝나는 생선 중에 멸치, 갈치, 준치, 병치 등은 잔가시가 많지만 맛이 좋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이 굼떠서 붙여지는 어리석을 치()자로 길치, 음치, 박치, 몸치, 눈치코치 등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편이다. 그중에서 나는 길눈이 아둔해‘길치’라는 소리를 듣는다. 운전을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그 영향이 크다.  

 

  일행 모두가 점심과 곁들인 막걸리 한두 잔으로 볼따구니가 불콰해진 홍안이 화담숲 단풍과 어우러져 구별이 어려웠다면 과언일까? 다들 아름다웠다. 하다못해 옷을 구입할 때도 계절에 따라 화려한 꽃이나 나뭇잎을 상상하며 고른다. 막걸리를 먹여 키웠는지 화담숲은 붉디붉었다. 분위기에 젖어 나도 붉어졌다. 시인이 되었다가, 모델이 되었다가, 가수가 되었다가, 두둥실 무희가 되었다가, 나는 지금 14역의 패션쇼를 하고 있다. 샛노란 베레모를 쓰고 은행잎 옐로카펫 길을 걷는다. 옛 시인의 노래’를 부르다‘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갈팡질팡이다. 그러다가 행여 길을 잃을까봐 앞사람 등을 주시하면서 원도한도 없이 가을을 만끽하며 걸었다. 엊저녁 연속극 시간이 저만치에 있다.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는 아침에 타고 온 빨간색 코끼리 대형버스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때, 등에 맨 가방 속에서 스마트폰이 끈질기게 울어댔다. 통화는 짧았다. 단 몇 십 초 사이에 일행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방심이었다. 3초 전쟁이 묵사발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안다. 버스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행의 눈동자와 마음을 이미 오래전에 겪은 일이라서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나 하나 때문에 버스가 못 떠나고 있다며 어서 오라는 전화가 쇄도했다. 더듬이를 잃은 달팽이처럼 길 위에서 길을 찾느라 허둥대고 있다. 충격을 먹으면 채면이고 나발이고 안면몰수의 행동을 자아낸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나가는 자가용을 내 차인 양 태워달라고 손짓을 하니,‘화담숲’이 아니라‘화담불구덩이’였다. 그때였다. 사무국장의 전화목소리는 그렇게 차분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광객이라 여기 지리를 잘 모르니 이곳을 안내하는 안내자를 빨리 찾아보라했다. 다행히 안내자와 통화가 잘 되어 무사히 일행과 합류 할 수 있었다.

 

  단체행동에서 지켜야 할 예의정도는 알고 있다. 미리 예견된 각본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독화살을 많이 맞을수록, 질책이 심할수록 악역을 제대로 잘 해낸 배우라 하지 않던가?

 

“나는 오늘 악역으로 캐스팅 되어 촬영 길에 나섰다.

 이렇게 생각하니 일행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잊지 못할‘화담숲 문학기행’으로 평범한 나날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행복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젠 악역의 주인공에게 욕설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하루의 끝자락에서 연속극을 보며 포근히 잠들고 싶다.  

 

                                     (2019.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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