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오면

2019.03.08 04:38

한성덕 조회 수:8

3월이 오면

                                                                              한성덕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부러울 게 없는 부자였다. 부자라는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릴 때 우리 집을 관리하는 집사가 한 분 계셨고, 나를 돌봐주는 소년이 있어 엄청 부자로 생각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콩을 섞은 쌀밥이 일 년 내내 떨어지질 않았다. 안채도 컸지만 안채보다 더 큰 행랑채는 디딜방아, 외양간, 돼지우리와 창고가 있었다. 2층이라야 고작 긴 나무토막을 행낭 저쪽까지 가로지른 것에 불과하지만, 소먹이로 묶은 볏짚 단이 행낭 2층에 가득했으며, 제일 끄트머리엔 변소가 있었다. 나라가 잘 살면서부터 화장실이라 불렀다. 그때만 해도 어디 그런가? 안채와 떨어져 있어 뒷간이 변소였다.

  솜 타는 기계도 있었다. 목화열매가 자라면 솔방울 만하게 커진다. 밭에서 자연히 익으면 십자 형태로 터지는데 하얀 솜이 나왔다. 그러면 열매속의 목화솜을 일일이 뽑아냈다. 그것을 한데 모아 솜 타는 기계에 넣고 디딤판을 밟으면, 그 안의 목화솜이 돌아가면서 씨앗은 빠지고 이불솜으로 착착 개켜져 나왔다. 그 작업을 할아버지께서 하셨는데 참 신기했다.

  그뿐인가? 탈곡기는 대형과 소형이 있었고, 재봉틀, 축음기, 아코디언, 군불용 거대한 가마솥 등은 큰 자랑이었다. 이틀 동안 벼를 타작할 때는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거들었으니 자연스럽게 동네잔치가 되었다. 이 정도면 부자라고 할 만하지 않는가? 초등학교 3학년까지의 생생한 기억이다.

  그 당시만 해도 무주 산골짜기 대부분의 아이들은 굶고, 헐벗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는 가난뱅이였다. 코를 옷소매로 쓱~~닦는 바람에 소매 끝이 반들반들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을 꾀죄죄하게 만들었다.

  이런 환경에서도 나는 옷차림이 깔끔하고 단정했으며, 한글을 터득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은 거의 한글을 몰랐고 글씨마저 서툴었는데, 국어책을 줄줄 읽고 글씨를 또박또박 썼으니 단박에 선생님의 눈에 찼을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이내 나를 1학년 2반 반장으로 세우셨다. 부자 냄새도 한몫했겠지만 3학년 때까지의 통지표가 올 수()였으니, 부자에다 실력도 능력도 갖추었다는 인증서가 아니겠는가?      

   4학년이 되면서 가정이 몰락해 이웃동네로 이사했다. 저학년 때와 달리 고학년이 되니까 반장을 투표로 결정했다. 그해는, 이사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5학년 때는 반장후보로 나섰다. 전보다 더 작은 학교여서 한 반뿐이었다. 두세 명 후보 중에서 당당하게 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방인(?)에게 표를 던져주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그 기분에 한 턱을 낸 기억이 새롭다.

 무주적상산의 잔설이 햇살에 발광하다가 사라졌어도, 동토로 내려앉은 3월의 골짜기냇물은 아직도 살을 에이 듯했다. 버들강아지는 칼바람에 씽씽 울고, 시냇물은 또랑또랑 소리치지만 얼마 전까지도 얼음을 껴안고 있었다. 우리는 체육시간만 되면 시냇가로 나가, 겨우내 덕지덕지 붙은 때를 밀어내려고 물속에 발을 담그곤 했다. 지금도, 친구에게 ‘누룽지 좀 보라’고 놀리던 외침이 들려온다. 때를 벗기는 게 체육시간의 운동이라면 운동이었다.    

 

  반장이던 3월 중순쯤이었나? 그날도 우리는 발을 동동거리며 운동장에 모였다. 체육시간이니까 공을 차자고, 아이들은 반장에게 압력을 가하며 떠들었다. 선생님이 나오셨기에 ‘오늘도 때 벗기러 가느냐?’고 한 것 같다. 느닷없이 서너 개의 알밤이 날아오는데 굉장히 아팠다. 선생님께서 “야, 인마! 니가 선생이냐?” 하시며 휘두른 군밤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노기 띤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단히 건방지다고 느끼하셨던가 보다. 그런 꾸중과 군밤은 초등학생시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유난히 기억된다.

  3월이 오면, 숭고한 민족의 얼이 담긴 3.1절보다 오랜 세월동안 알밤사건이 떠오르곤 한다. 왜 맞았는지 이해가 안 돼 끙끙댄 탓이다. 언제부터인지 “선생님, 냇가로 가요!” 했어야 하는 건데, “선생님, 오늘도 때 벗기러 가요?” 한 것이 항명(抗命)성 질문이요, 반장이 되더니 ‘건방지다’고 판단하신 선생님의 알밤세례였음을 알았다. 그로부터 ‘맞아도 싸다’는 생각과 함께 억울함(?)이 내려앉아, 그저 하나의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감정에서 나오는 매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설령 그것이 ‘사랑의 매’라 할지라도 아이에게는 깊은 상처로 박힌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이 ‘매를 들지 말라’고 진언했나싶다. 나 또한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야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2019.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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