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고 허전하고
2015.09.07 06:06
십육 년이다. 그러니까 내가 미국서 살아간 햇수와 같다. 처음 미국에 와서 즐겨 가던 99센트 가게에서 작은 화분을 하나 사서 키우기 시작한 지 십육 년이다. 그 긴 세월 네 번의 이사 중에도 꼭 따라다니던 아이다. 결코 그 아이를 이삿짐 차 어느 구석에 싣지 않았다. 내 차 뒷자리에 잘 모셔서 고이 가지고 다녔다. 잊지 않고 때맞추어 물도 주고 가끔 비가 올 때 밖에 두어 비를 맞게도 해줬다. 태양이 그리울까 애틋한 마음에 잠시 밖에 두기도 했다. 너무 뜨거운 태양은 좋지 않을 듯해서 이른 볕이나 늦은 볕에 바깥나들이를 시켰다. 애지중지하며 키웠지만 이상하게도 6-7년간은 잘 자라지를 않았다. 시들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고. 그냥 처음 사 왔을 때 모습 그대로 유지하며 나와 동행했다. 좁은 집이 저도 안쓰러워 그랬는지. 크지 않지만 작은 모습도 아름다워 자라지 않음에 애태우지 않았다.
8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화초는 언제 그랬냐는 듯 훌쩍 자라 길게길게 뻗어나간다. 그러고도 두 번의 이사를 했다. 이제 좀 넓은 집으로 이사도 오고했으니 화분대를 하나 사서 창가에 놓고 길게 자란 잎들을 벽으로 감아 올렸다. 천정에 닿아서 쭉쭉 뻗어나가 나를 기쁘게 했다. 이왕 화분대도 샀으니 다른 화초들도 여럿 사서 함께 친구하게 했다. 서로 대화하며 외롭지 않게 잘 자라라고. 창가가 푸르니 기분이 좋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 나가기 전 화초들과 대화하고, 늦은 저녁 잠 들기 전에 잠시 만져보고 사랑을 나눈다. 나의 발자국에도 반응하며 자라고, 내 웃음소리에도 활짝 피어 온 몸을 흔들며 함께 웃는다. 울적한 마음이라도 보이면 가만히 눈치를 보느라 조용하다. 나의 좋은 친구들이다.
얼마전 새로 이사 온 집이 좀 문제인 것 같다. 바람이 잘 통하는 창가에다 두었는데, 하루 종일은 아니지만 오전에는 충분한 햇살이 들어오는데 이상하게 화초들이 잘 자라지 않는다. 전에처럼 물도 잘 주고, 바깥나들이는 못하지만 창을 자주 열어 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해주는데도 뭔가 이상하다. 쌀쌀한 겨울, 움츠려 드는 날씨에도 두터운 옷을 입고 화초들을 위해 창을 열어 맑은 공기를 공급해준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건만, 왜 저 아이들은 예전 같지 않단 말인가? 금방 지어 이사 온 새 아파트다. 혹시 그게 문제인가? 다른 곳에서는 잘 자라던 화초들이 이상하게 시들시들하다. 완전히 죽는 건 아닌데, 군데군데 마르고 시들어 간다. 시든 잎을 골라 떼 주고 며칠이 지나면 또 어느 잎이 시들어 있다. 끝부분에 움이 나서 쭉쭉 뻗어나가기는 하는데 중간에 있는 잎들이 말라버린다. 줄기만 앙상하다. 화원에 가서 화초에 좋은 영양제를 사서 주기도 하고, 커피 찌꺼기가 좋다하여 많이 얻어다 덮어주기도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시들시들하다.
아름답게 활짝 펴서 거실을 푸르게 장식하라고 뒀더니 누렇게 시든 잎들이 지저분해 보이고 거슬린다. 저 화초를 정리해야하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답답하다. 얼마나 정성을 다한 아이들인데 이렇게 버려야 하나. 긴 세월 함께 하며 희로애락을 같이한 아이들인데. 안쓰러운 마음에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시간이 없다, 피곤하다 핑계 대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지저분한 모습을 보면 버려야 하는데 그동안 쌓은 정을 생각하면 그래도 좀 더 두고 보며 어떻게든 잘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다.
연휴다. 시간이 많아도 너무 많은 연휴다. 남들처럼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할 일이 있지도 않는 넉넉한 시간을 가진 연휴다. 연휴를 기해 집안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집안 구석구석 청소를 하다 화초에 다시 눈이 간다. 이제 핑계를 댈 아무런 근거가 없다. 화초를 정리하자고 다잡은 건 늘 딸이다. 대청소 하는 오늘은 정리해야 한다고 딸의 말했다. 그렇구나. 아쉽지만 이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구나. 떨리는 손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군데군데 시들어 잎이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을 잘라서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완전히 죽지 않은 화초를 생매장 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두 눈 꼭, 감고 빨리빨리 서둘렀다. 혹시 마음이 변해서 못 할까봐. 옆에서 도와주는 딸이 없었으면 쓰린 마음 가누기 힘들어 못했을지 모른다. 큰 쓰레기봉지를 다섯 개나 버리고 나니 거실이 환해졌다. 모두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상황에도 아직 씽씽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버렸으니까.
정리를 끝내고 창가를 보니 허전하다. 아니, 시원하다. 혼자 중얼거렸다. 허전하다고 해야 할까 시원하다 해야 할까. 옆에 있던 딸이 말했다. “둘 다 맞아요.” 아 그렇구나. 허전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구나. 화초가 잎이 시들어 거실에 떨어지면 그것을 치우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었다. 창가로부터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가까이까지 놓여있는 화초들을 피하느라 몸을 약간은 뒤틀어야 이층으로 올라갔다. 창문을 여닫을 때 화초들을 피해 멀리서 팔을 길게 뻗고 엉덩이를 뒤로 쭉 밀고 그 뻑뻑한 창을 여닫느라 힘들었다. 이제 거실이 넓어졌다. 창가는 여유로워 넉넉한 공간이 생겼다. 창문을 한번 열어봤다. 힘들지 않게 잘 열수 있다. 닫을 때도 마찬가지다. 약간의 허전함과 약간의 시원함이 함께 다가온다.
오늘 또 한가지 힘든 결정을 했다. 떠나려니 아쉽고, 있으려니 부담스러운 곳이 있다. 몇 주를 망설이다 결정했다. 떠나야지! 정들었던 화초들도 이별할 때라 생각하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듯 좀 아쉬움이 있어도 시간이 되었으면 떠나야 한다. 허전함도 있다. 더하여 시원함도 있다. 세상사가 다 그런 듯하다. 완전한 한쪽은 없다. 다 좋기만 할 수 있을까? 다 나쁘기만 할 수 있을까? 적당히 어우러져 웃음과 슬픔을 함께 가져가는 게 인생이겠지.
화초들도 보내고, 떠나야 할 곳도 떠났다. 시원하고 허전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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