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군(農軍)이 되다

2014.03.14 03:02

이영숙 조회 수:421 추천:20

봄이 왔다. 해마다 느끼지만, 봄에는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작년에는 화초를 사서 알록달록 화려하게 거실을 꾸몄는데 올해는 뭘 바꾸어 볼까. 궁리 하던 중에 이번에는 화초대신 채소를 가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육류를 즐기지 않는 터에 거의 채소중심으로 식사를 한다. 한데, 마켓에서 채소를 사가지고 오면 늘 버리는 부분이 더 많다. 혼자 먹다보니, 그것도 연속해서 먹을 수 없으니 작은 상추 한 포기를 사가지고 와도 거의 삼분의 이는 버린다. 적은 양을 고르고 또 고르지만 혼자서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내가 남들보다 적게 먹기 때문인 것도 있다. 밥은 하루 한 끼만 먹고 나머지는 이런저런 것으로 하루를 때우다 보니 적은 양도 늘 많다. 한 끼 겨우 먹고 남겨 두었다 내일 또 먹어야 함은 지루하다. 그러다 보니 버리게 된다. 서너 잎만 파는 데는 어디 없을까? 그래, 올 봄에는 내가 먹을 채소 직접 길러서 먹어보자. 씨앗 파는 곳을 찾아 갔다. ‘한국 씨앗’이라고 크게 써놓은 것을 보니 반가웠다. 그래 한국 것을 먹어야지. 미국 것보다 한국 것이 더 맛있으니까. 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실내에서 키우기 괜찮은 것으로 골랐다. 꽃상추, 쑥갓, 케일, 시금치. “아저씨 이것 실내에서도 잘 자라지요?”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며 환하게 웃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아저씨의 얼굴에는 환한 모습이란 눈곱만큼도 없다. 맑은 물에 눈을 깨끗이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실내에서 어떻게 자라겠어요. 햇볕을 봐야 채소가 자라지요.” 그 표정 못지않게 대답 역시 단호했다. 아저씨도 참, 지나치게 정직하다 해야 하나? 아니, 손님이 사겠다면 자신의 매상이나 올리면 될 것을 뭘 그렇게 딱딱한 표정과 그 말투로 사람의 기를 죽이고 그럴까? 환하던 내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소금 확 뿌려 저려놓은 배추처럼 축 처져 “거실에도 햇볕은 들어요.” 기어들어가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 창을 통해 조금 들어오는 그 햇볕이 밖에 심기어 보는 것과 같아요?” 화라도 낼 양 소리를 질렀다. 누가 모르나? 내가 바보가 아닌데. 어찌 실내에 숨어드는 햇살과 밖에서 보는 태양열이 같겠는가. 의기양양하게 들고 있던 씨앗들을 풀죽은 모습으로 들여다보았다. 얘들아 난 너희들과 함께 집에 가고 싶어. 씨앗들이 크게 대답한다. 우리도요....... 그래, 나와 같이 가자. 참 이상한 아저씨야. 내가 잘 자라나 안 자라나 내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만약 자라지 않으면 물어내라는 것도 아닌데 저 아저씬 왜 저리도 단호하실까. 내 돈 내고 내가 사겠다는데. 마침 어떤 아주머니가 고추모종 사는 것을 보았다. 내친 김에 그것까지 더했다. 풀죽은 모습을 떨쳐내고, 아저씨의 부정적인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무시해버리고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아저씨 이것 전부 얼마예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인 코앞에 딱 펼쳐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나? 아까의 그 단호함은 어디로 가고 아무 말 없이 돈을 받아 넣었다. 99센트 스토아에서 적당한 화분을 구입하고 흙을 구해서 바로 심었다. 식물들의 영양제라는 것도 함께 넣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지? 너무 많지 않게 약간만 섞었다. 창가에 있던 화초들을 안으로 하고 채소를 창 더 가까이 두었다. 햇볕을 많이 봐야하니 화초 올려놓는 선반을 조금 더 오래 햇볕이 드는 왼쪽으로 옮겼다. 옮긴 거리라봐야 20cm정도. 그래도 그게 어딘데. 처음부터 너무 많은 물을 주면 잘못될까 하여 스프레이로 살짝 뿌렸다. 바라건대, 상추 두어 뿌리, 쑥갓 한두 뿌리, 케일 두어 뿌리, 약간의 시금치, 고추 두어 대만 자랐으면 좋겠다. 그 정도면 채소가 먹고 싶을 때 부족하지 않게 먹을 양이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씨앗은 넉넉히 뿌렸다. 어떤 씨가 잘 날는지 알 수 없으니까. 싹이 나면 충실한 것을 남기고 부실한 것은 뽑으리라. 제발 잘 자라다오. 부족한 일조량은 나의 따뜻한 사랑으로 대치하마. 내 사랑을 아낌없이 듬뿍 부어주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러한가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태어난 글들이 모두 자식들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쌀 한 톨, 배추 한 포기가 자신의 분신이다. 그러하겠지. 그 마음이 이해된다. 저 작은 채소들이 어떻게, 얼마나 자랄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부어 내 자식처럼 키워보리라. 오늘은 봄 햇살이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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