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

2013.07.10 05:34

이영숙 조회 수:275 추천:59

겁도 없이 길을 나섰다. 미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다. 환상의 나라 미국이 어떤지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일곱 살 딸의 손을 잡고 길거리를 헤맸다. 아직 차도 없고, 아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는 때다. 공부 하겠다고 짐을 싸온 나와 내 딸은 어느 곳에 머물렀다. 딸과 둘이 쓰도록 이층침대와 자그마한 책상이 놓인 작은 방이었다. 방이 얼마나 작은지 책상과 침대 사이에 공간이 없어 지나다닐 때는 몸을 옆으로 하고 게걸음으로 다녀야 하는 곳이다. 책상에 앉기 위해 의자를 빼면 침대에 부딪혀 책상과 몸 사이가 빡빡할 정도로 앉아야 한다. 햇볕은 전혀 들어오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전등을 켜놓고 지내야 하는 방. 그나마 변기 하나 달랑 있는 화장실이지만 방에 딸려 있어 감사했다.
  내가 쓰는 방 바로 옆방에 나보다 일주일 먼저 미국에 도착한 부부가 있다. 그들에게 물어 마켓에 가려고 나선 거다. 뭐 특별히 살 것이 있어서는 아니다. 미국마켓은 어떤지 구경하고 싶기도 하고, 미국의 길거리는 뭔가 특별할 것 같아 보고 싶기도 해서다.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빨간불이 켜져 기다렸다. 찻길에 초록불이 왔다. 건너려고 하니 이상하게도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바뀌지를 않는다. 건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찻길 신호 두 번에 횡단보도 신호가 한번 바뀌나보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했다.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찻길의 신호와는 달리 횡단보도의 신호는 여전히 빨간색을 띠고 우리의 진로를 막고 있다. 우회전 하려던 차가 우리를 보고 멈칫 하더니 친절한 운전자가 건너가라고 손짓을 보낸다. 건너지 않았다. 어린 딸의 손을 잡은 나는 위험한 일이나, 교통법을 위반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번을 이상한 신호등을 보고 혼자 결론 내렸다. “이 신호등이 고장이구나. 그냥 건너야겠다.” 딸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찻길의 초록불과는 달리 여전히 빨간색을 띄고 있는 고장(?)난 신호등에다 짧은 순간이지만 확실하게 눈을 흘기고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빨리 건넜다. 신호등의 버튼을 눌러야 초록불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날이 걸렸다.
  그 다음부터 버튼을 눌러야 하는 신호등이 있을 때는 꼭, 버튼을 누르고 신호를 기다린다. 그런데 가끔 신호등에서 의아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냥 한 번만 꾹, 누르고 기다리면 되는 것을 신호가 바뀔 때까지 계속해서 누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때로는 왜 빨리 신호가 바뀌지 않느냐고 짜증스러운 듯 그들은 초록불이 올 때까지 쉬지 않고 누르고 있다. 그런다고 빨리 바뀌는 것도 아닌데. 처음엔 의아하게 바라보다 이제는 그저 그들의 취미려니 하고 나 역시 아무생각 없이 보아 넘긴다.
  며칠 전이다. 한 여인이 신호등에 서서 하염없이 버튼을 누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아니면 모든 생각을 다 빼내버렸는지, 거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버튼을 누르며 신호를 재촉하고 있다. 그녀의 재촉에 짜증난 신호등은 드디어 초록불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이후다. 그렇게 다그쳐 신호를 바꾸어 놓고 막상 신호가 왔는데 그녀는 건너지 않는다. 그냥 여전히 버튼만 누르고 있다. 건너편 보행자가 중앙선을 넘어 왔는데도 그녀는 건널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버튼만 누른다. 너무 이상하여 그녀를 주시했다. 신호등은 오래전부터 숫자를 세고 있다. 신호등의 숫자가 4,3,으로 내려갈 무렵 깜짝 놀란 듯 그녀는 뛰어 횡단보도를 건넌다. 버튼을 누르느라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르고 있었던가보았다.
  그녀를 본 순간 내 모습이 보였다.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 아닌가. 열심히 기도하는 나. 이것도 해결해주세요, 저것도 들어주세요.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미 응답에 내 앞에 놓여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부르짖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을 때는 없었을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셨는데, 나의 필요를 아시는 그분은 모든 것을 채워주셨는데 그 응답은 보지 못하고 아직도 안타까워하며, 힘들어하며,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때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원망석인 말도 서슴없이 늘어놓기도 한다. 나의 통곡에 미동도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내 기도소리에 귀를 막고 계시냐고 불평한 적도 있다. 이미 내 앞에는 초록불이 와 있고, 난 그냥 건너기만 하면 되는데 그 초록불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두려움과 염려에만 나의 온 정신을 쏟고 있지는 않은지.
  눈을 들어 보자. 내 아픔과 고통을 보지 말고, 내 문제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미 허락하신 응답에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자. 응답하신 하나님, 나의 쓸 것을 미리 아시는 분. 하나님의 때에, 그 분의 정확한 시간에 허락된 응답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앞을 향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더 이상 버튼 누르는 일에만 마음을 쏟기보다 이미 켜져 있는 초록신호등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확신 없는, 믿음 없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만 해야겠다.

7/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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