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소
이월란 (2020-6)
세월은 두 눈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어요
시선을 거두었을 때 비로소 가슴이 자랐어요
말문을 열고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길들이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여전히 두 발은 의식이 없죠
빈손으로 저질러놓음에도 익숙해졌어요
나를 껴안아 줄 두 팔이 자꾸만 짧아지네요
너무 많이 품고 말았죠
한 그루 나무를 닮기 위해 여기까지 온 듯
사각지대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섬뜩했던 미완의 응시를 기억해요
원형에 가까운 후회의 뒷모습이었어요
태동 없는 아기처럼 죽은 척 해볼까요
사지 멀쩡한 불구가 된 건
바로 내가 낳은 아들이었어요
유년의 언덕을 구르며 놀 땐
차라리 팔다리가 거추장스러웠는데
환상통으로 피어난 꽃들이 만발해요
체온만으로도 눈부신 천형이었어요
이제 막 태어난 거죠
손닿은 곳이 모두 죄가 되어버린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
네 개의 흔들림이 모두 사족이었음을
시인하고 목이 잘린 순간을 기억해요
팔 다리가 다시 자라나면 그때서야
문득, 생각을 닮은 얼굴도 보이겠지요
몸속에서 자라는 몸
어제의 환영지를 어루만지다보면
시간 밖에서 자꾸만 팔다리가 자란다네요
하루에 한 번씩 무덤에 들러요
어느 날은 왼쪽 눈을 떼어놓고 오고
어느 날은 오른 발을 떼어놓고 와요
더 이상 놓고 올 것이 없었을 때
세상이 아름다워지기 시작했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