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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4시집
2025.05.17 11:52

안락하게 죽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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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하게 죽이는 법 / 이월란

  

엉금엉금 기어가는 네 발이 숨는다

숨기고 싶은 것은 늘 가장 선명한 기억이 되었다

순간의 실수로 죽이는 평생의 죽음 같아서 어둠 속에서 어둠이 되는 거친 숨소리

 

차라리 이별을 선물할 시간

 

뭉클한 부적을 떼어 고이 접어 넣었다

오지 않을 시간의 냄새는 비릿해져서 흔들리는 뒷좌석의 멀미가 났다

 

한 걸음씩 사람을 닮아 오던 시간

한 꺼풀씩 인두겁을 벗겨내던 시간

두 개의 시간이 같이 살았다

 

빈 물그릇 앞에 오래 앉아 있던 뒷모습을 건지는 밤이면 지구가 도는 속도만큼이나 천천히 뜨고 지는 기다림을 보았다 고딕체로 누워 있거나 앉아 있던 물컹한 고요를 그림자처럼 밟고 지나왔다 혀 아래 숨긴 미세한 활자를 꺼내어 등 굽은 오후의 말문을 열면 15도로 꺾이는 머루 빛 두 눈, 너를 보듬을수록 내가 품어지던 하찮은 기적이었다

 

통증과 어둠 사이 하얗게 엎드려

2도 높은 체온을 아낌없이 나눠주며 구석을 핥던 까칠한 혀의 안목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칼날처럼 갈라진 둘은 피를 나눈 적 없는 피붙이

애완의 대가는 언제나 짐승의 몫이다

 

언제 죽이러 오시겠어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작고 보드라운 운명을 손에 넣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쌓이던 비밀과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십 년의 입에 입을 맞춘다

 

뒷모습이 문 앞에서 뒤돌아본다

산책에서 돌아온 너에게 열어줄 문이 없다면

한 방울의 빗물로 심장이 멎고

 

너는 영영 길을 잃고

나는 영영 집으로 돌아올 거야

 

눈물도 아까운 짐승의 시간이 운다

 

오래오래 아프지도 못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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