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다시보기
이월란 (2019-3)
태초에 리모컨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TV를 바꾸겠다고 조르던 남자가
배달된 거대한 TV 속으로 들어갔다
가라사대 빛과 어둠이
가라사대 하늘과 땅이
가라사대 물과 불이
가라사대 동물과 식물이
그리하여
가라사대 벌거벗은 그가 성큼성큼 태어났다
할부로 몸을 불리는 사이
판사가 되어 분쟁을 심판하다
몰래카메라가 되어 본성을 조롱하다
분만 중인 어미 소의 뒷다리 사이에서
벌떡 일어서는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여백으로 돌리는 채널마다 죄의 기원이 되었다
실시간 녹화된 세월이 최신식 무기로 등장하면
살려주세요
짐볼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매달려
나는 눈물처럼 굴러 떨어졌다
편집된 시간이 널브러진 시간을 날로 먹는다
휑해진 머리가 삼손의 머리칼처럼 자라는 사이
광활한 이목구비가 섬세히 연출하는
전능하신 악몽
가이아와 우라노스의 아들처럼
초인적인 힘을 기대한 적이 있었다
그가 외출한 후에도 거인은 살아 움직였다
전송되는 저 끝없는 세상을 무찌르자
성령처럼 임하신 전파에 감전되었다
골리앗을 조준하는 소년의 물매처럼
매끄러운 심장을 꺼내 던져보기도 했다
은혜로운 원근법을 다시 읽는다
묘하게 멀어졌다 신비하게 가까워진다
무한 반복되는 거룩한 말씀 앞에
무한 재생되는 작은 몸부림
멀어 평온했던 것들이 성큼 다가와
보장되지 않은 노후처럼 불안해진다
머리를 새로 달고 나온
가슴 큰 주인공이 작아진 세상을 달랜다
외출했던 남자가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온다
몸집이 성큼성큼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