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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
2009.09.04 04:43

고양이에게 젖 먹이는 여자

조회 수 1761 추천 수 7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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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게 젖 먹이는 여자




이월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고 있는데 방문 앞으로 무엇인가 휙 지나갔다. 잔상 속의 실루엣이 딸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실루엣 속에서 그 아인 무엇인가 숨기듯이 한아름 안고 급히 지나간 듯 하였다. 보던 책을 두어 페이지 더 읽으면서도 신경은 온통 딸아이의 방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늘 한 사람이 아니었다. 벌떡 일어나 딸아이의 방으로 뛰쳐나가는 나를 붙들고 있는 또 한 사람, 적어도 내 안엔 한 사람이 더 살고 있었다.
붙들고 있는 또 다른 나를 가만히 눕혀두고 살며시 가보았다. 두 손 안에 쏘옥 들어올만큼 작은 잿빛 아기고양이 한 마리가 방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었다. <Dexter를 쫓아내시려거든 저부터 쫓아내세요.> 밑도 끝도 없이 날리는 협박이 가관이었다. 덱스터인지 뭔지를 건드리기만 해도 에미가 쫓겨날 분위기였다.

눈이 보름달처럼 크고 청옥처럼 푸르게 반짝이는 덱스터는 이목구비가 앙증맞게 이쁜 고양이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살며시 안아보니 생후 5주의 나이값을 하며 얌전히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 어릴 때 살았던, 개조되기 전의 한옥에서 연탄아궁이에 코를 쳐박고 죽어간 해피라는 복슬강아지가 생각이 났다. 먹이고 치우는 일거리만 내게 떠넘기지 않는다면 나야말로 대환영이었지만 남편은 동물알레르기가 심한 사람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아니 잔혹하다. 잡아먹을 듯 물고 뜯어도 돌아서면 눈에 밟히고 가슴에 사무쳐 항복의 백기를 펄럭이지 않을 수 없다. 제발 사이좋은 모녀가 되어달라고 밤마다 나를 다독여주던 남편은 덱스터를 받아들여 주는 대신 매일 알레르기 약을 한 알씩 삼켜야 했다. 직장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딸아이를 낳고 젖마르는 약을 한 알씩 삼켜야 했던 나처럼. 그리고 젖몸살 대신 탁아소에 맡겨둔 아이 때문에 출퇴근 때마다 가슴이 몸살을 앓았던 나처럼.

고양인 애초에 내가 달가워하는 애완동물이 전혀 아니었다. 이글이글 타들어가는 눈빛과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투명한 망막이 유년의 악몽 속으로 뚫린 창같아 멀리하고 싶은 짐승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단 며칠이 지나자 고 작은 요물은 나의 세 번째 아기로 다시 태어나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거나, 안아주거나, 만져줄 때마다 몇 마디씩 말을 했다. 그 원시적인 눈빛언어의 장단과 고저로 수화 한 가닥 없이 우린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잠이 와요>, <놀고 싶어요>, <안아 주세요>, <배가 고파요>, <기분이 좋아요>, 이상, 5가지의 언어만으로도 끝끝내 사랑을 주고 받는 근사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주는대로 먹고, 제자리에 싸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완벽한 사랑의 대상. 우린 그런 덱스터 같은 인간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현명하게 <외로움>을 선택해버린, 24시간 진정한 사랑만 부르짖는 고매한 인간들이 아니겠는가. 이혼한 와이프, 별거 중인 남편, 토라져 냉전 중인 애인, 원수가 되어버린 친구, 남보다도 못한 형제자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자식을 둔 사람들도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그들이 죽어 나자빠질 때까지 닦아주고, 씻겨주고, 이뻐하며 애지중지 잘도 같이 산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Yes>나 <No>도 아닌 <멍멍!!>이나 <야옹~> 뿐이니까.

로라박사의 라디오 토크쇼를 출퇴근 때마다 차 안에서 즐겨 들었었다. 그녀는 말했다. 청명하고도 높은, 푸른 하늘 같은 맑은 목소리로. 1년 반 이상을 사귀기 전엔 결코 결혼이란 건 하지도 말라. 아이를 낳고도 직장생활을 하려거든 아이를 낳지도 말라. 밥이 없어 죽을 끓여 먹을지언정 아이 옆엔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낳은 자랑 말고 젖먹이는 자랑 하라며 그녀가 카스테레오 밖으로 침을 튀길 때마다 상습적인 범법자가 되어 발목이 불끈, 제한속도를 넘어 버리곤 했다. 6개월 쯤 된 딸아이를 사각의 링으로 만들어진 놀이기구 속에 앉혀두고 일을 갔던 나였다. 시부모님께서 퇴근하는 시간까지 붕 떠버린 30분 동안 어린 딸아이를 빈 집에 혼자 가둬 두고 출근을 한 것이다. 딸아이는 커서도 방문을 닫고 잠을 자지 못한다. 늘 혼자라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아이가 된 것이 모두 돈독이 오른 내 탓인 것만 같았다.

고양이들은 나름대로 철두철미한 위생관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하루의 반은 조는지, 자는지 눈을 감고 고상을 떨며, 나머지 반의 반은 장난질로, 그 남은 반은 또 꽃단장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고 녀석의 깔끔떨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우선 네 발로 색모래를 쉴 새 없이 파헤쳐 명당자리를 잡은 후 볼일을 끝내면 그 예술에 가까운 지옥의 향기를 철저히 묻어 두고 나온다. 앞 발로 고양이 세수를 하는 모습이란 가히 신비롭기까지 하다.  

딸아인 탁아소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탁아소에서 대변을 보지 않았다. 집에 오면 늘 보는 버릇을 어린 결심으로 철저히 들인 탓이었다. 유치원에 입학하고부턴 머리 한 번을 빗겨 줘 보지 못했다. 머리띠를 색깔별로 준비해 두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유치원에 다니던 어느 날, 일찍 퇴근을 해선 이층 딸아이의 방 창문으로 스쿨버스가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꼭 보고 싶었다. 시간이 되어 노란 버스가 왔고 동네 아이들 몇 명이 내렸다. 딸아이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아 아침 출근 때 아이를 맡겨두고 가는 앞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학교 갈 시간에 아이가 낮잠을 자기에 깨울 수가 없었단다. 학교 갈 시간에도 잘 자라고 놔두는 것이 미국부모들인가, 싶어 기가 막혔지만 내일부턴 시간을 잘 봐 두라고 아이를 타이르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우린 그동안 수많은 산들을 넘어왔고 수많은 강들을 건너왔다. 하나같이 가파르고 험준했으며 거칠고도 깊었다. 그녀는 내가 써 놓은 가장 난해한 시였다. 아무리 읽어도 행간의 깊은 강줄기를 건너오지 못해 허우적대기 일쑤였고 퇴고하지 못한 파지들이 그녀와 내 방을 잇는 홀웨이에 밤마다 산처럼 쌓여 있곤 했다.

서기 이천년에 세상이 망할거라는 노스트라다무스에게 빠졌던 어린 날, 세상이 쫄딱 망하기 전에 아이 하나 낳을 수 있는 다 큰 여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았고 난 다 큰 여자가 되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커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다 큰 여자가 된 것이다. 나의 분신 같은 아이는 또 하나의 분신을 가진 타인이었을 뿐이다.

길조란 뜻을 가진 Dexter는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방사선 앞에서 생식을 도난당하고 성대 잃고 거세된 불비(不備)의 작은 연골, 나의 손가락 하나에 패대기를 당해도 완애(玩愛)의 환희와 기쁨으로 살쪄 날뛰는 금수의 사랑을 난 차라리 원하지 않았을까. 아득히 멀어져가는 딸아이와 나 사이에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거뜬히 감당해내고 있는 Dexter 앞에서 오늘도 Sinister(재앙)가 하나씩 소리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대화가 끊어져버렸던 우린 요즘 아이 하나를 같이 키우는 두 사람의 엄마가 되었다. 귀가시간을 어기고 아직 들어오지 않는 딸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덱스터를 안고 누웠다. 잠옷으로 갈아입기만 하면 도망을 치던 눈빛은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내가 안쓰러운지 곧 내 옆으로 올라와 누워준다. 오늘도 저민 빈 가슴에 아기고양이를 품고 젖을 먹인다. <미야오, 미야오>--<넌 내 엄마가 아니야>-- 소리치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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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2019.11.12 23:41
    어지밤 하도 희한 꿈을꿔습니다 고양이에게 젖을빨리고있어요 꿈 해몽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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