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유치환

2011.02.21 04:08

박영숙영 조회 수:794 추천:118

               원본:http://kr.blog.yahoo.com/yellowday@ymail.com/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일러스트=이상진 내 중고등학교 시절 책받침 시가 유행했다. 특히 여학생들은 예쁜 그림이 있는 종이에 시를 앉혀 코팅한 책받침 시를 너나없이 좋아했다. 워즈워스의 〈초원의 빛〉과 유치환의 〈행복〉이 적힌 책받침이 유독 인기가 많았다. 쉬는 시간 잠깐 잠을 청할 때 책상에 손바닥을 포개고 손등 위에 한쪽 뺨을 댄 채 책받침에 적힌 〈행복〉을 중얼거려보다 잠들기도 했다. 〈행복〉을 읽으면 행복해졌고,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실제로 편지의 고수였다. 유치환의 작고 후에 시조시인 이영도에 의해 세상에 발표된 유치환의 사랑편지 오천여 통 중 일부가 책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다.

어느 글에선가 유치환이 고백하기를,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연모의 대상이 이영도이다. 시조시인 이호우의 동생이기도 한 이영도는 남편과 사별한 채 딸 하나를 기르는 아름다운 30대 초반이었다.

이영도는 당시 유부남이었던 유치환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다. 사랑의 마음은 굽이치고 그 마음이 받아들여지지는 못하니 유치환의 짝사랑은 시름이 깊고 깊었을 터. 그 시름이 얼마나 깊었으면,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전문)라는 시를 쓰고 또다시 같은 제목으로,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그리움〉 부분)라고 한탄했을까.

잘 알려진 〈바위〉, 〈생명의 서〉와 같이 '의지와 허무의 시인'으로 우뚝한 한 녘에 짝사랑의 아픔으로 몸부림치는 '사랑의 시인'이 있었으니, 사랑 없이는 허무의 초극도 기상 백배한 의지도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 이 시 〈행복〉 또한 이영도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시라고 전하는데, 후일 이영도는 유치환의 사랑의 마음을 받아들여 둘은 서로의 문학세계와 삶에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활발한 시작(詩作)을 하고 있는 부산의 허만하 시인이 청마에게 물었다는 얘기를 기억한다. "선생님,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 청마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으로 별들이 쏟아진다. 별들에는 소인이 찍혀있다. 당신에게 배달되는 오늘의 별을 뜯어보시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다.


※오늘로 사랑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연재를 사랑해 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yellowday 옮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유튜브 박영숙영 영상'시 모음' 박영숙영 2020.01.10 84
공지 님들께 감사합니다 박영숙영 2014.02.14 190
공지 저작권 문제있음 알려주시면 곧 삭제하겠습니다. 박영숙영 2013.02.22 246
130 비스와바쉼보르카 / 두번은 없다 박영숙영 2019.03.24 1210
129 Dust In The Wind(먼지 같은 인생) -Kansas(캔사스) 박영숙영 2014.02.07 475
128 When death comes 죽음이 오면 / 메어리 올리버 박영숙영 2014.02.05 759
127 moon sails out / 달이 떠오르니 박영숙영 2014.02.05 351
126 I have a rendezvous with Death 나는 죽음과 밀회한다 박영숙영 2014.02.05 563
125 No Title 무제/ 신규호 박영숙영 2013.05.30 362
124 When You are Old 그대 늙었을 때/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1767
123 청춘/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박영숙영 2014.10.12 510
122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하늘의 천 박영숙영 2013.02.22 527
121 Drinking Song 술 노래 / 예이츠 박영숙영 2013.02.22 732
120 마음 /김광섭 박영숙영 2012.03.12 576
119 바위 /유치환 박영숙영 2012.03.12 539
118 봄은 간다 / 김억 박영숙영 2012.03.12 502
11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박영숙영 2012.03.12 688
116 사슴/노천명 박영숙영 2012.03.12 659
115 꽃/박두진 박영숙영 2012.03.12 539
114 그날이 오면/심훈 박영숙영 2012.03.12 800
113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 번역:피천득 박영숙영 2012.01.21 819
112 Like the Blooming Dandelion on Earth/흙 위에 민들레 자라듯 박영숙영 2012.01.21 423
111 동반자/ Companionship 박영숙영 2012.01.11 329
110 The Moon / 신규호 박영숙영 2013.12.19 455
109 A winter Song 겨울노래 / 신규호 박영숙영 2014.01.05 287
108 하늘의 천/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박영숙영 2011.09.29 496
107 이해인/존재 그 쓸쓸한 자리 중에서 박영숙영 2011.09.16 404
106 근원설화 ㅡ김종제ㅡ 박영숙영 2011.07.16 327
105 하루의 길 위에서 /이해인l 박영숙영 2011.07.06 475
104 고갈비/최삼용(바브 박영숙영 2011.06.03 381
103 [스크랩] 너에게 띄우는 글/이해인 박영숙영 2011.04.27 415
102 [스크랩] 꽃잎 인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1209
101 푸쉬킨(Alexandr Sergeevitch Pushkin) (1799.6.6~1837.2.10) 박영숙영 2011.04.27 698
100 [스크랩] 꽃피우기/도종환 박영숙영 2011.04.27 359
99 [스크랩]ㅡ목단 꽃 그리움/이상례 박영숙영 2011.04.24 534
98 [스크랩] 속옷/김종제 박영숙영 2011.04.04 425
97 간(肝)/ 윤동주 박영숙영 2011.03.24 516
96 스크랩 ㅡ가정/ 박 목월 박영숙영 2011.03.23 381
95 [스크랩]ㅡ가을에/정한모 박영숙영 2011.03.23 406
94 [스크랩]ㅡ그리워 한다는 것은/이효텽 박영숙영 2011.03.23 358
93 "시" '아네스의 노래'/영화 <시 詩>가 각본상을 박영숙영 2011.02.28 616
92 어떤 관료 - 김남주 박영숙영 2011.02.28 428
91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도종환 박영숙영 2011.02.28 507
» 행복/유치환 박영숙영 2011.02.21 794
89 그대의 행복 안에서/칼릴지브란 박영숙영 2011.02.20 433
88 스크랩 ㅡ 그대는 꿈으로 와서/-용혜원- 박영숙영 2011.02.17 354
87 한 해를 보내며/이해인 박영숙영 2010.12.28 449
86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딘 스테어(85세,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노인 박영숙영 2010.12.22 425
85 [스크랩] ▶ 잠시 멈추어 쉼표를 찍는다 박영숙영 2010.12.13 335
84 부화孵化 / 김종제 박영숙영 2010.12.10 329
83 스크랩 ㅡ좋은글 ㅡ하얀 겨울이 그립습니다 박영숙영 2010.12.02 323
82 스크랩 ㅡ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브라우닝 박영숙영 2010.11.30 325
81 스크랩 ㅡ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용혜원 박영숙영 2010.11.30 366
80 스크랩ㅡ이제는 더이상 헤매지 말자 /바이런 박영숙영 2010.11.30 302
79 스크랩 ㅡ사랑 /정호승 박영숙영 2010.11.30 327
78 스크랩 ㅡ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박영숙영 2010.11.30 346
77 스크랩 ㅡ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U. 샤퍼 박영숙영 2010.11.30 379
76 [스크랩]즐거운 편지 /황동규 박영숙영 2010.11.30 487
75 [스크랩] 참 좋은 당신 /김용택 박영숙영 2010.11.30 353
74 [스크랩] 황홀한 고백 /이해인 박영숙영 2010.11.30 401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6
어제:
72
전체:
883,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