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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단편소설 <모성애>

2016.12.10 15:52

PAULCHOI 조회 수:435

 

 

<단편소설>

 

                       모성애

 

 

 

 

 

 

 

 

네 언니가 세상을 뜨고 나니, 네 형부라는 사람은 완전히 남이구나.”

“엄만, 남이 따로 있수? 엄마와 나만 빼고 깡그리 다 남이지.”

“암만 그래도 사위도 자식인데, 그리고 경아는 언니 자식 아니냐? 너에겐 친조카 고.”

“경아가 내 친조카래도 이젠 다 틀렸어요. 제 아빠가 우리 집에 보내기나 하겠 어요? 어림없지. 금싸라기보다 더 애지중지 아끼는 앤데, 경아아빤 언니와는 아예 상극이었고, 처가식구들을 개발에 똥만치도 안 여긴 걸요. 어디 언니를 눈곱만큼이나 아내로 여긴 적이 있었나요? 경아아빤 경아아빠대로 따로 놀았지. 제 엄마가 살아 있을 때는 거의 매일 전화로 외할머니와 이모를 연신 불러대던 애가, 제 엄 마가 세상을 뜬 후에는 감감무소식이잖아요.”

모녀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한 밤에 전화가 요란스럽게 운다. 전화가 다섯 차례나 세차게 울었는데도 모녀는 꼼짝 않는다.

“전화기 옆에 있는 네가 받지 않고.”

“잘못 온 전화일 텐데요 뭐. 모두가 남인데, 누가 이 밤중에 우릴 찾겠어요?”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와 함께 노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기영은 제 방으로 갔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기영은 언니를 성의 없이 떠나보낸 언니의 남편을 한없이 야속하게 여길 뿐, 형부라는 말조차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경아아빠의 무관심으로, 언니를 붙잡지 않았다는 역겨움이 기영의 분화구로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할 때마다 경아아빠란 말은 곧잘 나오지만, 형부라는 호칭을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다.

 

언니가 앓던 조울병은 특별한 상처가 없는 증세로, 우울증보다 심한 병이라고는 하지만 심리치료를 잘 하면 완치 가능한 병이라는데, 경아아빠는 무엇에 그리 쫓기며 살았는지, 무관심 중에 언니를 내던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영은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니는 이런 와중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알아차린, 경아아빠의 무관심에 치를 떤다. ‘사람이 병을 앓는다고 다 죽나? 경아아빠는 도대체 무엇에 미쳤기에 언니를 내 팽개쳤지? 이 세상 어떤 년이 경아아빠를 꾀어낸단 말인가!’ 이런 집념은 기영을 절망으로까지 이끄는 변덕을 부린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경아아빠에게 따지고 들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니에 대한 지극한 동정심이 이렇게 굳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니는 기영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각인 되어 있다. 예쁜 얼굴, 날씬한 몸매, 정이 흐르는 고운 음성, 부드럽고 초롱초롱한 눈매, 인격적인 삶......, 무엇보다도 기영을 지극히 아껴주는 언니였기 때문이다. 기영은 언니를 무척 부러워하며 따랐지만, 언니는 항상 ‘일류모델로 승승장구하는 너는 나보다 몇 배 더 낫다. 나는 네가 참 부럽다’며 기영을 칭찬하지만, 기영은 항상 언니가 부러웠다. 그런 언니가 어느 인간의 중매로 낯모르는 남자를 만나 전신을 내맡기고 몸으로 마음으로 고생고생하며 살아왔음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기영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부르르 떤다. 기영은 아버지가 언니의 시집살림에 근심걱정을 하다가 운명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맏이가 시집가서 남편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산다는 생각을 이겨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았다고, 기영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노모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 딸을 연신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 기영의 말처럼 맏딸이 사위의 무관심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위는 사위대로 제 아내를 위해 조금도 아낀 것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노모이다. 노모의 생각엔 기영의 판단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노모는 기영의 생각을 꺾어 접게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입장이다. 다만 기영이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름 모를 어떤 힘에 끌리고 있다고 막연히 믿고 있는 것이다. 기영의 터무니없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간섭하려는 생각보다,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번번이 앞세우기 때문에, 기영에게 일침을 가할 생각은 추호도 느끼지 않는다. 기영이 경아아빠에 대한 악담을 기가 차게 퍼부어도 아랑곳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노모이다. 경아아빠에 대한 생각도 기영과는 정 반대인 셈이다. 노모는 사위를 남을 할 데 없다는 생각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다만 기영의 말마따나 경아아빠가 경아를 외가에 얼씬도 못하게 하리라는 생각이 떠오를라치면 앞이 캄캄할 지경이다. 경아가 외가에 오면 웃음꽃이 피고, 사는 보람을 느끼는 판인데, 그 귀염둥이가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기라도 한다면 세상은 캄캄할 뿐, 마음 둘 곳이 어디랴 싶은 것이다. 노모는 이런 불안을 뿌리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경아아빠와 언니와는 상극?’ 꼭 믿어지는 말은 아니지만, 기영의 말 중에 지워지지 않는 이 한 마디 말이 대못이 되어 노모의 가슴에 단단히 박혔다. 순간 노모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기영아!” 있는 힘을 다해 목에 힘을 주어 기영을 불렀다. 기영 쪽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오늘이 꼭 백일이다. 꼭두새벽에 잠을 깬 기영은 새벽공기를 들이키며 답답한 가슴을 달래면서 목욕탕을 향해 걸었다. 좁은 골목을 돌아 목욕탕에 가는 길은, 언니의 결혼 전까지만 해도 언니와 같이 걷던 길이다. 기영은 따뜻한 물에 전신을 담갔다. 걸어오면서 들이켰던 찬 공기가 갑자기 뜨거운 온탕 열기에 오싹 떨리며 몸이 조여 들었다. 그 순간 전처럼 언니가 뒤에서 꼬옥 끌어안는다는 느낌이 왔다. 양 팔을 뒤로 젖혀 언니를 잡는 시늉을 해 보았다. 기영이 새벽목욕을 하는 날은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오늘은 언니를 만나기 위해 성묘를 할 생각이다, 노모에겐 말하지 않았다. ‘부모의 시신은 산에 묻지만 자식의 시신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노모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세상을 하직한 사람이지만, 언니의 유일한 씨앗인 경아가 한없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평생 엄마 없이 살아갈 경아, 특히 경아의 어린 시절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와 기영의 가슴에 매질을 해댄다. 어린 경아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가지가지 일들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순간마다 기영은 몸이 마구 떨렸다. 떨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기영은 앉았던 욕조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소스라쳐 일어섰다. 기영은 눈을 감고 경아를 불렀다. 그 자리에 경아는 없지만, 기영은 경아를 전신으로 끌어안는 몸짓을 하며 연신 작은 소리로 경아를 불러 본다. 경아의 대답이 없자, 놓치기라도 할세라 언니를 불렀다. 뜨거운 물 기운에 힘을 잃은 기영은 욕조 한가운데 주저앉고 말았다. 기영은 손을 모으고 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깍지를 끼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주님, 경아를 사랑하시는 주님, 경아의 평생을 살펴주시옵소서. 경아에게 부닥칠 모진 광풍을 잔잔케 하소서. 엄마 없이 살아 갈 경아의 부모가 되시옵소서.’ 기영의 눈언저리가 축축하게 젖어 올랐다.

언니가 누워 있는 묘지에 다다르자, 기영은 주차할 곳을 찾았다. 혼자서는 초행이라 어설펐다. 언니의 묘가 있는 근처 적당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차 뒷자리에 놓인 꽃다발을 내리면서 언니를 끌어 안 듯 통째로 가슴에 덥석 쓸어안았다. 기영은 저도 모르게 호흡이 급했다. 언니의 산소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가슴이 더욱 두근거린다. 풀잎에 맺힌 이슬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영롱한 빛을 쏘아 올리고 있다. 기영이 산소에 막 다다르자 비문을 덮고 있는 커다란 화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누가 벌써 다녀갔을까?’ 의아한 생각을 하며, 산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묘지 정면에 서 있는 기영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기도의 몸짓이 되었다. 기영은 힘주어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님을 불렀다. 잠시 묵상을 하다가 언니를 불렀다. 그리고 이어서 경아를 불렀다. 그러나 누구의 대답도 듣지 못했다. 어느 누구의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속에 느껴오는 무심한 응답 뿐, 외로움이 오싹 몸에 감겼다.

기영이 제 차에 돌아와 백미러에 얼굴이 비춰지기 전까지는,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줄을 몰랐었다. 경아를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이란 생각이 말짱 눈물로 변했다. 기영이 언니산소에 가져다 놓은 화환보다 먼저 놓인 화환이 누구의 것인지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알아내기는 너무도 막연하다는 생각에 관심 밖의 일로 미루었다. 언니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기영의 전신은 경아로만 가득했다. 결혼을 하자는 미스터 김과도 모르는 새 벌어진 거리감까지 느껴졌다. 미스터 김은 기영과 대학 동기동창이다. 두 사람은 별 이유 없이 결혼이 늦어졌다. 노처녀 노총각이 되면서도 이렇다 할 상대를 만나지 못한 탓도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서른 후반의 나이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지난 해 가을 동창회 모임에서부터 두 사람의 눈이 맞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혼이야기는 미스터 김과 기영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언니의 주선으로 실마리가 잡혔다. 언니가 아픈 탓을 이유로 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집안에 우환이 있다 보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기영도 혼기를 놓친 지 오래지마는 조금도 급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기영의 결혼은 오히려 언니가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언니는 미스터 김의 얼굴을 차근차근 살피면서 언니 특유의 고운 서울 말씨로 기영의 장점이 될 만한 말을 들려주었다. 기영이 미처 모르고 있는 면까지를 소상하게 밝혀 주었다. 언니의 속뜻은 기영을 놓치지 말고 아내로 맞아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간절함이 섞여 있기도 했다. 노모도 기영의 결혼에 조급한 생각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재촉을 하는 일마저 기영의 심기를 편치 않게 한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조심을 앞세우고 있는 편이다. 기영은 결혼을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혼자로도 사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별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그냥 지낼 수야 없지 않은가 싶었다. 언니는 적당한 사람이면 만나서 서로 이해하며 살면 안 될 일도 없으니, 매사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누누이 말해 왔다. 기영과 미스터 김 사이는 나이가 어리지 않은 터라, 갑자기 뜨거워지기는 쉽지 않다. 기영은 나이 때문에 서두른다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다. 미스터 김이 사정없이 적극성을 보인다면 몰라도.

 

이렇게 세월을 지내다 보니, 이제쯤 미스터 김한테서 전화라도 한 통화 왔으면 싶은 허전함마저 느껴진다. 해외출장이 잦은 미스터 김은 그리 자상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는 않은데 너무 오래 적조해 있는 터라, 기영도 이렇다 하게 달아오르거나 조바심이 쳐지는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두고 보고만 있을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쌍방이 모르는 바 아니다. 언니도 경아아빠를 만난 후, 결혼을 서두르지 않은 편이었다. 경아아빠 역시 해외출장이 잦은 터라 자칫하다가 쌍방이 혼기를 놓칠 뻔도 했었다. 그래도 경아아빠는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이 돋보이긴 했으나, 언니를 향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기영의 판단을 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주일은 예수의 탄생일인 성탄주일이다. 오늘은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마지막 주일이다. 기영은 노모의 손을 잡고 주일미사에 참례했다. 미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자, 성도들과의 인사로 한창 분주했다. 인사가 뜸해지면서, 성당 옆 육중하게 놓여있는 피에타(Pieta)에 시선이 머물렀다. 모조된 조형물이긴 하지만 워낙 섬세한 입체감이 오늘따라 더욱 훈훈한 감동을 주었다.

기영이 수년 전 바티칸에 가서 피에타를 보고 느꼈던 감동이 물큰 솟아올랐다. 더구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풍겨 나오는 성스러움이 기영의 속마음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하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제각각 헤어져 가는 성도들의 머리와 어깨 위에도, 움직일 줄 모르고 서 있는 피에타 상에도, 소리 없는 눈이 소복소복 내려 쌓인다. 기영은 노모의 손을 잡은 채, 피에타의 전신을 자신의 시야에 넣고 시선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전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푸근한 느낌이 기영의 가슴에 담겨 마음에 안정을 더했다.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정신을 잃은 듯, 기영의 눈길은 어느새 성모의 자비로운 표정을 더듬기 시작했다. 남편인 요셉의 피 한 방울도 받지 않고 성령님에 의해서 잉태되었다는 아들을 처녀의 몸으로 낳아 기르는 동안 당했던 온갖 수모와 괴로움이 눈덩이처럼 기영의 가슴속에 굴러들어 속을 확 뒤집어 싸늘하게 얼리는 듯했다. 기영은 성모 마리아의 아픔을 마치 자기가 당하고 있기라도 한 듯, 잠시 눈을 감아 마리아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마리아에게 임신된 아기는 요셉의 피를 섞은 아기가 아닌, 오직 성령으로 임신되었음을 아무도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리아만은 확실히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피에타에서 외치는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과는 너무도 다른, 양육에 대한 고통을 차분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소녀티를 벗기도 전의 어린 나이에 정혼을 했지만, 남편과의 동침 한번 없이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 그 아기를 해산하여 키우기까지의 말할 수 없는 고통, 십자가에서 핏덩이가 된 아들을 잃도록 겪는 여인의 아픔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전에는 이런 생각을 꿈꾸어 본 일조차 없었다. 기영의 가슴에 마리아의 모습이 새롭게 들어앉기 시작했다. 다른 여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어린 마리아가 겪어낸 일이 눈물겹게 커다란 감동으로 기영의 가슴을 울렸다. ‘그래,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일이야!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야.’ 기영은 피에타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예수의 몸에 얹혀 있는 눈을 쓸어 내렸다. 손에 묻어 있는 눈을 털지 않았다. 그대로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하얀 눈은 주먹 속에서 녹아 물로 변했다. 주먹에서 녹은 눈처럼 기영의 눈시울도 촉촉이 젖어 들었다. 기영은 제 손으로 마리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마리아 무릎에 안겨 있는 예수의 오른쪽 어깨와 허리사이로 나온 마리아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그대로 얼마 동안이나 서 있었는지-, 다시 노모의 손을 잡은 기영은 피에타의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마리아의 왼쪽 손가락에 젖은 물기를 맨손으로 닦았다. 예수를 안은 마리아의 손이야말로 온 인류의 아픔을 끌어안고 쓰다듬어 준 손이 아닐까. 그렇다! 그러나 지금 기영이 만지고 있는 이것은 차디찬 대리석이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즐비하게 지니고 있는 조각품들 중에서 제일 보석 같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자리 잡은, 미켈란젤로의 두 손으로 빚어낸 피에타 상의 조형물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예술의 보다 바람직한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동정녀 마리아의 무릎에 눕혔다. 그러나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가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을 읽어낸 모습이다. 기영은 이런 마리아의 마음이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성당에서 늦게 돌아온 기영은 문간에서 숨 가쁘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추리 옆에, 경아에게 줄 선물 보따리를 가지런히 챙겨 놓았다. 내일이 성탄일이니까 경아에게 줄 요량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어머니 이제 왔습니다’ 하는 인사를 끝내자마자 노모는 ‘낮에 네 형부가 다녀갔다’는 말과 함께 선물보따리를 들어 보였다. 기영은 노모 곁에 앉아 선물보따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한 장의 카드에 노모와 기영에게 인사와 축복의 말을 정성스러운 필치로 적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경아엄마 비운 자리가 날로 넓게 번져나고 있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했고, 아무리 화려하고 큰 화환으로도 경아엄마와의 관계는 조금도 채워지지 않는다며 아쉬움을 덧붙였다. 끝으로 ‘존경하는 장모님, 사랑하고 아끼는 처제를 위하여’를 글 끝에 달았다. 선물은 어머니와 기영의 겨울 내복 한 벌씩과 생선 두 두름과 곶감 한 상자를 넣었다. 기영은 자기도 모르게 선물 보따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노모의 표정을 살폈다. 기영은 제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경아아빠란 말을 지우고, 형부를 떠올려 보았다. 나사가 제 자리에 꼭 들어맞는 느낌이 왔다. 기영의 가슴엔 편안함이 자리를 잡았다. 마치 어두운 방에 촛불이 라도 켠 듯 안정감이 들었다. 형부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노모의 생각만큼 세련되 지 못했었다는 판단에 형부에 대한 미안감이 차올랐다. 기영은 내일 아침에 백화 점에 들러 형부에게 줄 선물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아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기영은 카드를 쓰면서 날개 돋친 듯 창공을 훨훨 날았다.

형부에 대한 오해로, 새장에 갇힌 듯 답답하던 고정관념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경아아빠는 형부로 기영의 가슴에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형부는 기영의 새 식 구가 된 셈이다. 기영은 언니를 지나치게 아꼈던 탓으로 형부를 원망하며 살아온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년 성탄이야말로 옹졸했던 기영의 가슴을 활짝 연 열쇠가 되었다, 기영은 ‘화평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면이라도 감지한 듯.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는 기영의 가슴을 덮었던 먹구름이 맑게 개고, 모처럼 정신적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 확실한 증거다.

성탄 아침, 커튼을 밀치고 밖을 내다보는 기영은, 소리 없는 함박웃음을 얼굴  가득 담았다. 온통 하얀 눈으로 세상은 곱게 덮여 있지 않는가. 때마침 성탄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구성지고 은은하게 울린다. 그 순간 전화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낸다.

“할머니, 메리 크리스마스, 나 경아야. 이모 있어?”

경아의 전화를 받자마자 노모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눈시울을 부르르 떨었다. 경아엄마 장례 후 경아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다. 노모는 경아가 엄마 없는 그 동안을 어찌 지냈는지 몹시 궁금했다.

“엄마 없어서 어떻게 했니?”

“응, 할머니, 나 많이 울었어, 아빠도 많이 울고.....”

노모에게서 울음이 터졌다. 간신히 울음을 참으려는 노모의 목이 자꾸 떨렸다. 기영이 노모 가까이 다가오자, 노모는 들고 있던 수화기를 던지듯 기영에게 넘겼다.

“경아야, 나 이모다, 메리 크리스마스! 경아”

“이모, 나 이모 보고 싶어......”

기영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기영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떨리는 목으로 ‘경아야, 잠깐만’을 힘주어 말하고, 곧 입에서 수화기를 떼었다. 잠시 후, 경아는 연신 이모를 부르다가 대답이 없자, 할머니를 찾았다. 이모를 불러도 대답이 없고, 할머니를 찾아도 대답이 없자, 드디어 경아의 울음이 전화선을 타고 흘러들어 노모와 기영의 전신을 쇠갈퀴로 긁어내리기라도 하는 듯, 속을 후려 판다. 경아의 울음소리를 듣자, 노모와 기영도 울음이 참아지지 않자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기영은 마시던 모닝커피를 마저 마시고, 물을 몇 잔 더 마시면서 목을 달래어 경아 를 불렀다. 경아의 목소리는 어느새 맑게 개었다.

경아는 아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면서, 무엇을 받았는지 알아 맞춰보라고 조른다.

“내가 안 보고 그걸 어떻게 아니?”

“이모, 이모는 알 거야, 내가 날마다 필요한 것”

기영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경아가 잇는 말에 기영은 가슴이 탁 막혔다.

“엄마가 없어서 내 손 잡아 줄 사람 없다고, 아빠가 내 목발 사왔어.”

경아는 소아마비로 장애인 판정을 받은 아이다. 왼쪽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목발이야기를 노모에게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다. 옆에 있던 노모는 경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여 기영에게 물었으나, 기영은 노모의 말을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기영의 가슴은 납덩이가 달린 듯 무겁고 답답했다. ‘경아야, 너같이 불쌍한 딸을 두고 네 엄마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미 네 아빠는 너의 불구로 인해 네 엄마를 끊임없이 원망하며 살아 왔을 거다. 그러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낸 것이 아니겠니?’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곧장 생각을 바꿔, 삼중고를 겪으며 삶에 성공한 헬렌 켈러를 떠올렸다.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헬렌 켈러의 말을 입속으로 중얼 거렸다. 헬렌 켈러를 위해 일생을 바친 설리번을 떠올리자, 기영의 눈에서 또 다른 눈물 줄기가 양쪽 뺨으로 주르르 흘렀다.

 

기영은 무심코 가방을 열어 휴대용전화기를 눌렀다. 뜻밖에 두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두 통 모두 미스터 김의 전화였다. 순간 기영의 생각은 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스터 김과 아늑한 곳에 마주 앉아 전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 나누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요즈음은 마음이 그렇게 썩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번씩이나 온 이 전화를 그냥 꺼버릴 수야 없지 않을까. 일단 응답을 할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김이었다.

“기영 씨시군요? 그간 안녕하셨어요? 저 미스터 김입니다.”

“알고 있어요. 김 선생님도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연락이 없으셔서 궁금했어요.”

약간 서먹한 마음이다.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망설였다. 미스터 김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분명히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스터 김과의 결혼을 반대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지금도 전적으로 반대하는 생각이 아니라 어쩔 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한번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미스터 김의 재촉이다. 지금까지의 경로로 보아서는, 당연히 두 말 않고 만나야 한다. 만나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우선 혼인 날짜를 잡아야 하고 약혼을 위한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한 마디만 더 건네면, 미스터 김은 이 일을 족칠 사람이 아닌가. 그동안 무엇에 바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장이라도 결혼을 하자고 대들 것이다. 기영은 이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조였다.

“우선 당장 오늘 오후라도 만납시다.”

급한 일이라고 이렇게 족칠 수야 없지 않는가. 기영은 당장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만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장 뛰어나가 만났을 테지만, 이제는 가슴이 자기를 놓아주지 않는다. 기영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경아다. 엄마 없이 살아갈 경아가 기영의 가슴을 누르고 있음이다. 거의 인생의 중반을 향하고 있는 나는 앞으로의 삶을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나. 기영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자신도 추단키 어려운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음에, 엉거주춤하고 있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매일 밥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일처럼, 결혼을 안 하면 살아갈 수 없는가. 아니다. 결혼은 매일 밥을 먹는 일과는 다르다. 결혼을 안 해도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 수 있다. 이성이 그리워서 결혼을 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죽기 살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꼭 결혼을 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 그것은 분명한 필연성을 지녀야 한다. 사는 일도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값진 삶을 살 수 있듯이, 결혼도 이와 같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영이라는 여자, 나의 사명은 무엇이며 어디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결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니다. 나는 결혼을 해야 할 어떤 이유도 사명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경아를 도우며 사는 일이다. 경아를 돕는 일은, 말로만 돕는 일이 아니라 경아가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경아를 낳은 엄마처럼 철저히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경아와 함께 살아야 한다. 경아를 기영의 집으로 데려오거나, 기영이 경아가 사는 집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기영은 설리번을 떠 올렸다. 삼중고를 앓는 헬렌 켈러와 일생을 같이 살며 삼중고를 견뎌낼 수 있었던 헬렌 켈러를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경아와 같이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아의 삶은 버려진 삶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경아아빠가 경아를 지극히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 효자노릇 하는 자식이 없다’는 말처럼, 경아아빠에게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미 그 한계를 벗을 결정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사람들의 눈총에 찔리고 구설에 오르내리고......, 버림받은 삶을 사는 경아가 목발을 짚고 종종 꿈에 나타난다, 기영은 꿈속에서 경아를 불렀다. 그리고 이어 언니를 불렀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그들은 아무 대답이 없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자녀를 낳지 말아야 한다. 경아에게 흐른 언니의 피가 내 속에도 흐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경아아빠도 누구와 결혼을 하든지, 자녀를 낳으면 안 된다. 그에게도 경아에게 흐른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스터 김의 윽박지르는 소리가 기영의 고막을 찢는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만난다, 안 만난다, 양단간 대답은 해줘야 되지 않아요?”

순간 기영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일단 만나요.”

“일단요? 그게 무슨 말이요? 일단이라니?” 미스터 김의 말이 거칠게 들린다.

그러나 기영은 관심 둘 바가 아니라고 마음을 접었다.

미스터 김과 기영은 약속된 다방의 창가에 마주 앉았다.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찻잔이 비워질 때까지 엄숙한 침묵만 흘렀다. 기영의 풍기는 미모와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에 흐르는 매력에 미스터 김은 점점 빨려들고 있었다.

“김 선생님, 죄송해요, 좀 전에 전화로 느닷없이 ‘일단’이란 말을 한 것은 제가 아니고, 지금 제가 당하고 있는 입장이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일단 그런 줄 아세요. 제 마음에 변화가 생겨서 그래요.

“무슨 변화입니까?”

“결혼에 대한 변화예요.”

“결혼요?”

“예, 일단 그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그런 줄 아시고, 그냥 댁으로

돌아가세요.”

의외로 기영은 당당한 눈치였고. 미스터 김은 어이가 없었다.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미스터 김은 의아했다. 기영이 이렇게 뻑센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기영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스터 김은 앉은 채로 기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영은 미스터 김에게 얌전히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이만 저는 가겠어요. 더 이상 저를 찾지 마세요.”

기영의 음성은 날카로운 날이 선 듯했다. 미스터 김은, 돌아서 다방 문을 열고 나가는 기영을 불렀다.

“기영 씨-. 기영 씨-”

 

기영은 성당으로 향했다. 기도를 하려고 기도실 문을 두드렸으나 문이 잠겨있었다. 기영은 곧장 발길을 돌려 성당 근처에 있는 산을 오르며 정상을 향해 달음질치다시 피 급하게 뛰었다. 마치 맹수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불쌍한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여! 경아를 기억해 주옵소서. 주님의 뜻이라면......”

기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금 막 경아를 안았다 업었다 하면서 산을 뛰어오르는 듯 매우 숨이 차다. 사실 기영으로선 미스터 김에게 너무 박정한 말을 했다고 느끼면서도,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이 나이에 미스터 김 정도의 상대를 만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기영은 미스터 김과의 결혼을 포기하기로 한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미스터 김이 다시 요구를 해온다 해도 별 문제가 될 것은 아니라고 밀어버렸다. 대학 동기동창이면서 혼사이야기까지 발전한 사이지만, 손 한 번 잡은 일도 없는 사이인지라, 기영은 미스터 김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꺼림칙함도 없다. 미스터 김 역시 기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기영이 자기를 무시하고 팽 토라져 떠난다 해서 어쩔 도리가 없는 바도 아니다. 다만 기영의 입장이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생각을 바꿔 자기에게 돌아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가을밤을 수놓는 <가을맞이 가곡의 밤>을 알리는 광고가 기영의 눈에 띄었다. 여느 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테지만, 걸음을 멈추고 광고를 읽어 내렸다. 곧장 매표구로 갔다. 즉시 두 장의 입장권을 샀다. 동행해야 할 사람과 시간약속 상의도 없이 구입한 입장권을 나란히 접어 핸드백에 넣었다. 기영은 휴대전화로 경아를 찾았다.

“경아야, 나 이모다.”

전화를 받은 경아는 대답대신 먼저 울음이 터졌다. 경아의 울음이 그치자 기영은 경아아빠를 찾았다.

“형부세요?”

“형부라니? 아! 처제시군요?”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내일 저녁 6시 반에 뵈려고요. 약속해 주시는 거죠?”

여태껏 전화 한번 없던 기영의 전화를 받은 경아아빠는 의아한 생각이 났지만 반갑게

“장소만 알려 주세요.”

경아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소를 말한 기영은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기영과 경아아빠가 약속장소에서 정확한 시간에 만났다. 기영은 경아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쓸어 보고나서

“형부, 언니 떠나시고 나서 이렇게 뵙게 되네요. 죄송해요. 형부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제가 일방적인 행동을 했네요.”

“처제가 하는 일이라면 다 좋게 생각합니다.”

“형부, 가곡 좋아하세요?”

“아, 좋아하다마다요. 해마다 몇 차례씩 언니랑 가곡의 밤은 빠진 적이 없습니다.”

“언니도 가곡을 참 좋아했는데, 형부도 언니를 닮으셨네요.”

“닮다 뿐입니까? 둘이 마냥 좋아했지요.”

기영은 핸드백을 열어 어제 나란히 접어 넣었던 입장권 두 장을 꺼내, 경아아빠에게 내밀었다.

“지금 바로 입장하셔야 됩니다.”

기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촉했다.

가을은 귀뚜라미 소리만 들어도 감동을 실어오는 계절인데, 일류 성악가들의 열창을 감상하는 이 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에 마구 퍼부어 댄다. 기영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노래를 언니도 들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기영은 얼굴을 경아아빠 쪽으로 돌려 경아아빠의 놓인 손을 확인하고, 그 손등 위에 기영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순간 경아아빠의 손이 기영의 손 위로 올라 기영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기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럴 때마다 경아아빠는 더욱 세게 기영의 손에 힘을 주었다. 기영은 마음속에 가곡의 한 구절을 새기며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그러나 경아아빠가 이 노래를 들을 리 만무한 일이다. 가곡의 밤 순서가 끝나자,

밖으로 나오면서 기영은 남 보기에 부부인 듯이, 경아아빠의 손을 잡고 손가락 깍지를 끼었다.

“형부, 제가 오늘처럼, 매일 이래도 돼요?”

 

기영이 경아아빠를 다시 만난 것은 열흘 후였다. 가을단풍이 어우러진 공원이다. 기영은 음성을 가다듬었다.

“형부, 저는 형부를 형부라고 불러 드리기가 참 어려웠어요. 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신 후, 형부를 더욱 야속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형부가 언니를 더 사랑하고 정성을 기울이셨다면, 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요. 형부가 언니에 대해서 무성의하다는 느낌 때문이었어요.”

“처제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 했지요. 내가 언니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했겠어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요.”

기영의 눈은 눈물로 그득하다. 방울로 엉겼던 눈물이 두 볼에 줄기를 그으며 굴러 내린다. 기영의 목은 아까부터 속으로 마구 떨리고 있었다. 기영은 형부 옆으로 다가앉으며, 형부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형부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형부의 눈에도 커다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기영은 자기의 품어온 속생각을 다짜고짜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부, 형부에게 매 맞을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아를 생각해서 언니 대신 제가

<?xml:namespace prefix = v />경아를 돌보아 줄 수는 없을까요?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이겨내지 못 하는지 모르지만, 제게도 모성애 같은 강한 힘이 있나 봐요. 경아를 엄마처럼 돌보

아 주고 싶은 열망이 가득 차 올라와요. 참을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인정사정 체면 예의 도리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엄마 가슴에 들어 있는 자식사랑이라면 이것저것 따지고 말고 할 것 없지 않겠어요? 형부만 허락하신다면 어머니를 이해시켜 드리고 경아를 달래서 제가 경아와 같이 한 식구로 살겠어요. 어쩌면 언니도 저의 생각에 동의하리라 믿어요. 저와 결혼을 하려고 이야기 중이던 미스터 김과의 관계도 이미 깨끗이 청산했어요. 언니처럼 경아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경아가 사는 동안, 남에게 놀림 받고 조금이라도 불편을 느낀다면 안 될 일이지요. 언니는 하늘나라에 계시면서 경아를 지극히 사랑하실 거예요. 그것을 땅에 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하지 않겠어요? 형부!”

“.......................................”

형부는 아무런 말이 없다.

기영은 노모 앞에 앉아 형부에게 했던 이야기를 실타래 풀 듯 자연스럽게 한 마디 한 마디 하면서 노모의 표정을 살폈다. 기영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들릴 때마다 노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표정을 보였다.

“네 형부가 원만한 사람이다. 그래도 어린 경아를 키우기는 쉽지 않을 게다. 자녀를 키우는 데는 반드시 어머니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라. 나도 너의 생각을 따르마. 네 언니가 못다 한 일 네가 대신 하려무나.”

기영은 벌겋게 닳아 오른 노모의 얼굴을 살피면서, 여성은 젊으나 늙으나 자식사랑엔 변함이 없음을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다.

기영은 경아와 형부의 손을 잡고 성공회 본당 옆에 있는 신부 사목상담실에서 가벼운 걸음으로 나왔다. 담임신부와 상담을 끝낸 뒤라, 그 언제보다도 훨씬 홀가분했다. 가까운 날에 노모와 함께 성도들 앞에서 경아의 세례예식에 이어, 경아아빠와 기영과의 간소한 혼례식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경아는 새엄마가 될 이모와 손가락을 걸어 이미 약속을 했다. 이모를 엄마로 하기로, 뿐만 아니라, 아빠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 비문에도 손가락을 걸었다.

 

기영은 결혼 하루 전, 처제 이름으로 마지막 편지를 썼다.

“형부를 ‘형부’라고 해야 했는데, ‘경아아빠’로 하면서 몹시 거북스러웠어요. 그래도 형부보다는 경아아빠라 하는 것에 형부와의 거리감을 더 느꼈기 때문이었어요. 그땐 언니에 대해 무관심하시다는 데 대한 제 나름의 앙갚음이었 지요.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내일 신부님의 성혼선언 ‘김 요셉 군과 성 마리아 양이 오늘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거룩한 결혼예식을 행하여 그 오른손을 서로 잡고 피차에 엄숙히 서약하였으니,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포합니다. 무릇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아멘.’이 있은 후는 경아아빠로 모시게 되네요. 저는 경아엄마이니까. 이것이 신의 섭리인가요? 운명의 장난인가요? 다만 경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언니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불러 드려요. ‘형부!’.

작가 케이티 데이비스는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에서 우간다로 이주해 살면서 몇몇 우간다 소녀들을 입양하면서 느꼈던 기쁨을 회상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딸아이 하나가 ‘엄마, 만약 예수님이 제 안에 들어오시면 제가 폭발해 버릴까요?’ 하고 물었대요. 그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했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라고요.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더 생각해 본 케이티는 우리의 삶과 마음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결심할 때,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또 기뻐하는 이들을 위한 즐거움으로 우리는 아마 폭발할 거야’라고 설명해 주었대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깊은 배려가 생기게 된다고요.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도전을 주고 있지요. 성령님이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일관되게 이런 사랑이 담긴 반응을 보일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으로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 아니겠어요?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상기시켜 주실 거구요.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요? 형부!

오늘을 마지막으로 처제의 옷을 벗으며

기영 올림”

 

‘사랑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곧 사랑 받았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기영은 두 손을 모았다.

”사랑의 주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시키시옵소서. 경아를 아끼는 엄마의 사랑을 시작으로, 점점 더 주님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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