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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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단편소설 <바다는 말이 없다>

2016.12.10 16:36

PAULCHOI 조회 수:310

 

 

바다는 말이 없다 (12-25-2015-1-20-2016)조선인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들키면 큰일 나는 숨을 쉰다. 일본 제국주의의 수뇌인 덴노헤이까의 쇠사슬이 언제 풀릴지 모른다. 이천만 동포 중에 이를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이에 대한 억울한 한은 전 국민의 가슴에 아픈 피멍으로 뭉쳐 있다. 정치적 탄압, 경제적 착취, 사회적 노예화, 교육문화의 말살, 말과 글의 탄압, 창씨개명의 강요, 재산과 자원의 몰수, 심지어 제기(祭器)까지 빼앗기고, 청·장년과 어린 처녀들까지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탄광으로 비행장 수리공으로 군수공장 노동꾼으로, 심지어 위안부로, 성노예 등으로 끌려가는가 하면, 신문, 잡지의 폐간 등...... 소중한 것들을 알뜰히 짓밟는 일제! 그 지긋지긋한 일장기와 간판들, 신사(神社)자리마다 참배를 강요하는 몽둥이 뜸질, 백성들의 통곡......, 추운 겨울에도 옷 한 벌 제대로 해 입지 못하는 조선 여인들, 겨울철에는 저고리가 들려 허리가 허옇게 나오는 부녀자들의 가련한 모습, 남자들이라야 계획하는 일마다, 학문 없고 기술 없어 모두 일인에게 빼앗기고 흙일과 잡일들, 그것도 일인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그날그날을 때우다가 아차! 실수하면 흙더미와 함께 매몰되어가는 이 현실. 가뭄에 콩 나듯 '마른 북어도 영양이 많다'고 갖은 입방아들을 찧으면서 어쩌다가 머리 자른 북어 한두 마리씩 배급을 주면서도 생색을 내는 그들. 그들에게 알뜰히 구박을 받으면서도 고구마 줄거리를 얻어 말려서 기름에 튀긴 반찬을 만들었고, 고구마를 채로 썰어 설탕과 기름에 볶아 '오야쯔'를 만들어 어린이들의 간식으로, 그것도 어려운 집에서는 생각도 못했으니 풀뿌리, 칡뿌리 캐 먹기, 소나무 어린 순 잘라 겉껍질은 벗겨내고 속껍질을 먹으며, 미루나무 열매 등으로 주린 배를 달래가며 사는 조선인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民以食爲天)’니 고픈 배를 움켜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랴!

이런 판국에 설상가상으로 추상같은 명령이 내렸다. 신사참배를 하라. 쇠붙이 공출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라. 방공호를 파라. 학교는 운동장을 개간하여 농작물을 심어라. 교과내용을 조사 보고하라. 정신대원을 배수로 증원하여 뽑아 들여라. 등, 누가 내린 명령이건 간에 일본당국의 명령이고 보면, 조선인 모두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으라면 지어야 했고, 헐라면 헐어야 하는, 일인(日人)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위치에서 괴로움을 체념해야 할 뿐이다.정신대원을 뽑는 일만도 그렇다. 일본에 가서 노동을 하도록 되어 있고 위안부 노릇도 해야 되는데, 한번 가기만 하면 가는 족족 노동에 매어 고생하다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거의 지쳐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에 누가 갈 것이며 누가 누구를 가라고 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쇠붙이 공출을 초과달성 하라 하여 견디다 못해 성당의 보물인 성종(聖鍾)을 3 개나 떼어놓은 일도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인들은 사사건건 미국을 비난하고 심지어 '루즈벨트(Roosevelt) 미국 대통령이 미친 짓을 한다'며 '벨트(belt)가 루즈(loose)해서 그렇다'고도 한다. 이토록 괴롭히는 일제를 향해 조선인들은 "자유 그것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나날이 외친다.

순사에게 허리를 졸라 매인 채 운동장 한복판으로 끌려나온 준호는 계속 매를 맞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식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준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그리 족쳐 댄다. 그렇게 맞으면서 울지도 못한다. 울기에는 정도가 지나친 매질이다. 준호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연이가 양팔을 세차게 내저으며 순사의 매질을 말리고 있다. 그러나 순사는 쉽사리 몽둥이를 내려놓을 것 같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연이가 순사에게 달려들었다. 몽둥이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순사는 연이의 팔에서 몽둥이를 뽑아내려 했으나 얼른 빠지지 않는다.  

그때 교무실 유리창 밖으로 이를 내다보던 박 선생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다. 박 선생은 평소와는 달리 모질게도 날카로운 여성 특유의 소리를 지르며 순사에게 달려든다. 순사와 박 선생의 음성이 서로 상대방을 쏘아대는 사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나가던 오학년 학생들이 몰려들기 사직한다. 박 선생은 순사에게 준호를 심하게 때리는 일에 대한 항의를 하고 순사는 자기가 하는 일에 걸리적거리며 공무집행에 방해한다고 준호의 못된 버릇을 고쳐야 한다며 맞섰다. 준호가 순사의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것은, 박 선행이 담당하고 있는 정신대원 모집이 미흡하다고, 순사가 박 선생을 채근하는 데서 참다못한 준호가 간섭하며 순사에게 대든 것이다. 준호는 학교의 잔심부름을 하는 임시고용인이다. 헌데 정신대원 모집에 불성실하다고 박 선생을 닦달하는 순사와 부딪혀 화근이 되었다, 순사는 준호를 매질하던 여력으로 연이와 박 선생에게까지 상스런 욕설을 퍼부으며 대들 기세를 보인다. 순간 연이가 껴안고 있는 몽둥이를 세차게 낚아챘다. 몽둥이를 빼앗기면서 연이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남학생이 발로 몽둥이를 힘껏 찼다. 몽둥이가 순사 발채에서 멀리 굴러나갔다. 어느 샌가 학생들 손에는 돌이 들려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눈치 챈 순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급히 정문으로 뺑소니를 쳐버렸다.

 

여름방학 시작이 며칠 남지 않은 칠월 중순, 당국으로부터 준호와 연이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당국의 소집에 응하라는 것이다. 연이는 준호가 일하는 학교 졸업반이다. 담임인 박 선생의 차분한 권에 마다하지는 않았다. 워낙 가정이 어렵고 연로하신 부모는 직장도 없이 잡일이 있을 때나 푼돈을 만져보지만 그것도 일정치 않다. 이번 가을에 학교를 마치는 대로 정신대에 가면 어떻겠느냐는 담임의 말에 고개만 숙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준호의 경우는 다르다. 청천벽력이다. 영장을 받은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을 궁리하던 끝에 연이를 찾아갔다. 연이네 집은 멀지 않았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토굴이었다. 준호는 연이를 불러내어 동네에서 가까운 냇가로 나갔다. 맑은 냇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준호와 연이는 널찍한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냇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다. 냇물 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이윽고 준호가 연이를 제 옆으로 다가 앉게 하며 연이의 손을 잡아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연이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연이야 내가 네 허락도 없이 손을 잡은 것은 너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야. 괜찮지?”

연이는 대답이 없이 시선으로 쓰다듬듯 준호의 얼굴을 쓸어 본다. 준호의 눈에는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맺혀 연이를 당황케 하고 있다.

“연이야 너 학교 졸업하자마자 정신대 나간다며?”

준호는 물음과 함께 연이를 쳐다본다.

“내 발로 정신대 나가는 게 아니고 억지로 끌려가는 거야.”

“무슨 말이니?”

“내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

“무슨 일?”

“박 선생님이 틈틈이 옷도 주었고 돈도 주고......, 신세를 많이 졌어.”

“그랬다고 정신대에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나 같은 게 어디 가서 뭘 해?”

준호는 눈물을 닦으며

“나는 네가 정신대 되는 건 싫어.”

연이는 제 손을 쓰다듬고 있는 준호의 손을 꽉 잡는다.

“내가 동생 할 게 내 오빠 해줘, 응?”

준호가 연이를 좋아 하듯 연이도 준호를 좋아한다. 준호는 연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연이 손등 쓰다듬기를 잠시 멈추고 종이배를 접는다.

“연이야, 이것 봐.”

준호는 종이배를 냇물에 띄웠다. 종이배는 냇물을 따라 순식간에 저만큼 흘러내린다.

“연이야, 네가 정신대 안 갈 수 없냐? 정신대 되면 오빠 동생이 무슨 소용이냐? 지금 떠내려간 종이배 보았지? 한번 가서 다시 오지 못하지 않니? 네가 종이배 되는 것 나는 참 싫다.”

한동안 연이는 말이 없다. 준호가 얼굴을 연이 쪽으로 돌려 연이를 바로 보았을 때 연이는 부르르 떨며 울음을 참지 못한다.

 

준호와 연이가 받은 영장에 따라 집을 떠나야 할 보름 전, 버스 편을 이용해 인천항에 도착했다. 연이가 어렸을 적 들은 바 있던 장봉에 산다는 이모를 찾아가는 길이다. 장봉도는 인천 앞바다 영종도 서북쪽, 경기도 옹진군 북도면 장봉리에 위치한 6.68 평방km의 작은 섬이다. 주민이 700명에도 못 미친다. 어느 순간에 왜경에게 걸려들어 끌려갈지 모르는 일이니 준호와 연이는 서로 떨어지게 사이를 유지하며 행동을 신중하게 하고 있다. 하루를 꼬박 배에 실려 장봉에 도착한 후, 천신만고 끝에 이모를 만났다. 주소를 정확히 모르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모는 연이를 금방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연이의 말을 따라 대강대강 받아주었다. 조카가 왔느냐고 이렇다하게 내어줄 만한 것도 없는 형편에 친절하고 반가운 티를 낼 게재도 아닌 터였다. 그래도 이모는 준호와 연이의 형편을 알아차리고 입소문이라도 나지 않도록 단단히 벼르면서 이해할 만한 이웃들을 골라가며 이들의 입지를 확보하는 일에 전심을 기울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이웃에 방을 하나 얻었다고 준호와 연이에게 일렀다. 두 사람은 이를 마다했다. 서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면서 따로 있기를 원했다. 이모는 어렵사리 그들의 말을 따라주었다. 당장 방을 더 얻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연이는 이모 댁에 있기로 했다. 장봉에 도착한지 달포쯤 되었을 때 같은 동네 아저씨 내외가 운영하는 어선에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기로 했다. 연이도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다.

며칠 후, 빨간 일장기를 단 연락선이 나타나더니 이들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준호와 연이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배 뒤에 있는 갑판 밑으로 몸을 숨겼다. 아저씨와 아주머니 내외는 태연히 그물을 추스르며 어장 쪽으로 배를 돌려 속도를 냈다. 일장기를 달고 따라오던 배는 이들이 타고 있는 배를 지나 훨씬 멀리 사라져 갔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안심이 된다는 듯 명랑한 음성으로 준호와 연이를 연신 나오라고 불러댄다. 그러나 준호는 준호대로 연이는 연이대로 불안에 싸여있기는 마찬가지다.

 

오늘은 바람이 몹시 분다. 선주 내외는 배를 띄우지 않는다고 했다. 준호와 연이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산을 올랐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바다가 멀리까지 보였다. 산바람이 연이의 겉옷을 휘말아 날렸다. 연이의 하얀 넓적다리와 엉덩이 밑 팬티까지 보였다. 준호는 넋을 잃고 연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 연이가 달려와 미끄러진 준호를 끌어 올렸다. 준호는 잡았던 연이 손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연이도 준호와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연이는 준호와 한참 떨어져 산나물을 뜯었다. 고사리, 도라지, 구절초, 질경이 쑥 등 싱싱하건 철이 지났더라도 익혀서 먹을 만한 것은 뜯고 뽑고 해서 치마에 담았다. 준호도 연이를 따라 그렇게 했다. 두 몫을 모으니 상당히 많은 양이 되었다. 바다에 나아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일에 비하면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나물반찬으로 꽤 넉넉한 재료가 된다고 둘은 생각했다.

산을 내려오며 바다를 바라보는 준호의 가슴은 일장기를 달고 따라오던 배로 꽉 차 있다. 숨어서 사는 이런 삶이 부끄럽고 마땅치 않다고 늘 생각한다. 할 수만 있으면 연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떠나고 싶을 뿐이다.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중국에 닿을 수 있음을 알기에 그 일이 곧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그런 배를 언제 어떻게 탈 수 있나 알아보겠다는 생각뿐이다. 일인의 눈총을 피해 살면 얼마나 자유롭겠는가. ‘자유 그것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그 외침이 오히려 국민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준호에 비하면 연이는 오히려 이런 일에 태연한 듯했다. 준호보다는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준호는 그런 연이를 마냥 예쁘고 귀엽게 생각한다. 연이는 단순한 계집애이면서 한없이 순수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준호는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연이가 생각하는 준호도 연이를 생각하는 준호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서로는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물을 감싸 안고 연이 가까이 갔다. 연이는 준호가 안고 있는 나물뭉치를 받아 제 것과 같이 포개 놓았다. 두 덩어리의 커다란 나물 뭉치가 포개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빠 우리도 이랬으면......”하고 준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말을 듣자 준호는 씨익 웃고 만다. 연이는 의아한 생각으로

“오빠 이상하네, 왜 웃기만 해?”

준호는 목이 마른 듯, 꿀꺽 침을 삼키고 나서

“연이야, 네 말대로 너와 내가 포개지기라도 한다면 너와 나는 아기를 갖게 되겠지?”

연이는 대답대신 코웃음을 쳤다.

“만약 그렇게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도 우리처럼 피하면서 살아야 할 거야. 아기도 조선인이니까. 만약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폭삭 망하는 거야.”

“오빠, 평생 이렇게만 살게 될까? 설마 나라를 찾을 때가 오겠지,”

준호는 흙이 묻은 손을 털지도 못한 채 말을 계속하려는 연이의 입을 탁 막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다는 속담 몰라?”

순간 연이는 며칠 전 일장기를 펄럭이며 바다 가운데 나타났던 그 배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친다. 준호는 연이가 조금 전에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나물을 뭉친 덩어리를 합치듯 연이와 합친다면 아이를 갖게 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남남으로 지내기는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준호는 아니다. 연이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연이의 생각은 남녀의 욕망이 아닐 것이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정신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니다. 만약 아기를 낳는다면 키울 만한 능력도 아직 부족하고, 연이를 엄마가 되게 하기는 너무 어리다고 준호는 생각했다. 준호의 속마음엔 깜찍스럽게 귀여운 연이의 미소 짓는 얼굴이 떠올랐다. 준호는 연이를 돌아보며 말없이 씨익 웃었다. 이렇게 숨어 사는 삶이 얼마나 지긋지긋하면 나이도 어린 연이가 그런 말을 했을까. 준호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머리를 오를 무렵 산에서 내려와 급히 이모 댁에 닿았다. 커다란 나물뭉치를 풀어놓고 나자,

“내일은 일찍 배를 띄운다니 오늘일랑 일찍 쉬어라.”

이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호는 연이를 두고 자기 처소로 향했다.

 

어제에 비하면 오늘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씨가 고기잡이에 안성맞춤이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선주 아저씨 내외와 준호와 연이도 날씨에 지지 않을 만큼 쾌청한 날씨에 매료된 듯 모두 기분이 상쾌하다. 배를 타고 있는 네 사람은 배 위에서 간식을 나누며 ‘오늘은 어제 못 잡은 몫까지 대박을 쳐보자’고 다짐을 했다. 고기가 많이 몰려있으리라 짐작이 가는 곳으로 뱃머리를 돌려 속력을 냈다. 고기가 많이 걸린 날은 선주 내외로는 그물 당기기가 역부족이다. 이럴 때 준호와 연이의 힘도 만만치 않게 도움이 크다.

저녁이 되어서야 배를 바닷가에 댈 수 있었다. 잡은 고기들을 그물에서 가려내어 상자에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세 사람의 왜경이 타고 온 보트가 이들을 따라 붙었다. 언뜻 보니 보트에 세 개의 일장기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준호와 연이는 숨 쉴 틈도 없이 달음질을 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변소 안으로 몸을 숨겼다. 준호와 연이는 남녀 화장실에 각각 들어가 숨을 할딱이며 억지로라도 용변을 보아야 했다.

이윽고 왜경 보트 엔진 시동 소리가 들렸다. 지금 떠날 모양이다. 잠시 후, 왜경이 선착장에서 멀리 사라지는 느낌을 모터 소리로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준호와 연이는 배로 돌아와 고기를 추슬러 상자에 담았다. 일장기를 세 개씩이나 달고 세 명의 왜경이 무슨 일로 다녀갔는지 알고 싶었다. 아무런 말이 없이 고기를 담고 있는 아저씨 내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다 저녁때 순사들이 왜 왔었어요?”

준호가 물었다.

“고기 얻으러”

“그들은 금방 잡아 온 싱싱한 고기를 해 먹거든”

아저씨의 대답에 연이은 아주머니의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듣자 준호와 연이의 가슴을 조이던 끈이 확 풀린 듯 한숨들을 내쉰다.

 

준호와 연이는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나와 있지만 집에 대한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마도 매일 같이 순사들이 집을 순시하며 준호와 연이를 체포 연행할 기미를 찾고 있을 것이다. 집에 있는 식구들이 얼마나 곤혹을 당하는지 모를 일이다. 준호는 요즈음 몸이 고단하게 일을 하지만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고 있다. 어쩌다가 깜빡 잠이 들면 영락없이 순사에게 잡힌다. 일단 잡히면 수갑에 채워지고 어디론지 끌려간다. 끌려가면서 연이를 부르다가 깨어보면 꿈이다. 무의식중 이마에 손을 대면 흥건히 흐른 식은땀이 손바닥을 적신다. 연이도 저처럼 그런 꿈을 꾸리라는 생각을 번번이 해보곤 한다. 준호가 꿈에서 깰 때마다 이런 생각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준호는 연이가 자기보다 더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보다 나이도 어린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할 때인데 이것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준호는 이런 생각에 젖을 때마다 일제에 대한 미움이 끝없이 솟구쳐 올랐다. 언제라도 이 원수를 꼭 갚아야 하리라고 다짐을 하며 자신을 달래곤 한다.

 

준호와 연이가 집을 떠나 장봉도에 온 지 반년이 지났다. 준호와 연이가 집에 대한 그리움이나 궁금증이 처음 장봉에 왔을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느낌으로 바다생활에 정을 붙이고 지낸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연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가 연이 앞으로 날아들었다. 연이가 제 이모네 집에 와 있는지를 어찌 알고 보냈는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식구들의 불안에 더욱 뜨거운 불을 지르는가 하면 연이는 물론 준호에게까지 견디기 어려운 공포가 창살처럼 심신을 찔러댄다.

편지를 받은 연이와 준호는 입을 다문 채 불안에 떨고 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다. 멍하니 앉아만 있던 준호는 자기 처소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준호는 연이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연이야, 이 편지 받을 사람이 없어서 그냥 보낸다고 다시 어머니께 보내면 어떨까? 이 말을 못 듣기라도 한 듯 멍하니 있던 연이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무슨 내용인 줄도 모르고 그냥 보낼 수는 없잖아?”

연이 생각에는 순사들이 집에 와서 연이를 찾아오라고 닦달을 한다고 어머니가 편지를 보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딸이 집을 나가서 반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니 어디로 갔는지 집에서는 통 모른다고 말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 앞섰다. 순사들이 매일 같이 와서 닦달을 한다면 차라리 정신대에 나가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준호는 자기 처소로 갔다. 연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였다. 연이는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에 묻혀 편지봉투 모서리를 적셨다. 눈물이 베어든 봉투는 생각보다 쉽게 사이가 벌어졌다. 가슴이 떨리는 연이는 한 옆으로 돌아앉아 봉투를 벌여 편지를 밀어내었다.

내 새끼 연이 보아라

이 편지 받는 대로 집에 오거라. 우리 동네 방앗간 집 아들이 너를 좋아한단다. 그 부모도 너를 예뻐하였잖니? 너에 비하면 그 아들 나이가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만한 신랑 만나기가 쉽지 않다. 혼인을 치르면 순사들이 너를 잡으러 오지도 않을 테고 우리 생활도 좀 펴질 것 같으니 당장 오너라. 에미가.

밤이 새도록 연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이 어느 틈에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 당황해 있었다. 새벽이 되어서 연이는 편지를 이모에게 전했다. 이모와 이모부는 글을 모르기에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준호가 왔다. 준호는 연이를 보자 다짜고짜 편지에 무엇이 쓰여 있더냐고 물었다. 연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순간 준호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한동안 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준호는 연이에게 편지를 좀 보여 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연이는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준호는 눈을 둥그렇게 키우며 편지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연이는 손을 들어 이모 쪽을 가리켰다.

준호는 연이가 저를 대하는 품이 전과 같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준호는 연이 때문에 연이 어머니가 왜경에게 끌려가서 곤혹을 당하지나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연이에게 다시 물었다. “편지에 뭐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우울해?” 준호는 다급하게 물었지만 역시 연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준호는 편지내용이 몹시 궁금했다. 준호가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연이는 준호에게 편지내용을 비밀로 하고 지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연이로서는 당장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연이의 표정으로 보아서 언짢은 생각은 들지만 준호는 더 이상 재촉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준호는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일이 왜놈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분통이 또 다시 전신에 배어들었다. 제 고생도 고생이지만 연이에 대한 동정심이 앞질러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통이 끓어오를 때마다 하루라도 빨리 중국 대륙으로 가서 파묻혀 살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앞으로 열흘 내에 서해 바다에 널려 있는 섬들을 깡그리 순찰을 하며 주민조사를 실시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 섬들에는 일제의 행정력이 치밀하게 미치지 못한 점을 이용하여 이곳에 숨어 사는 젊은 조선인들을 색출해 내기 위한 일본 당국의 처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 소문을 들은 준호와 연이는 마치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었다. 장봉에 있다가 장봉에서 잡히나 집에 있다가 집에서 잡히나 잡히기는 매일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이는 이참에 집에 가보는 일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서 잡히나 피장파장이라는 생각이었다. 생각 끝에 연이는 준호에게 입을 떼었다.

“오빠, 이참에 집으로 가면 어때?”

“우리가 돈이 있어야지. 배 삯도 없고 차 삯도 없으면서 가긴 어딜 가?

“그 정도야 선주 아저씨가 안 주실라나?”

“잠자코 있어, 내일부터 내가 집 뒤에 굴을 팔 테니까. 굴 안에서 며칠만 견디면 될 거야.”

생각밖에 왜경들은 주민조사에 철저했다. 주민도 얼마 안 되는 마을에 밤낮 상주하면서 색출작업에 혈안이 되었다. 이럴 정도인 줄 미리 알았다면 아예 장봉도를 떠나 있는 편이 훨씬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와 연이는 밤낮 굴 안에서 먹고 자며 밖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왜경들이 섬에 들이닥쳤으니 말소리를 내거나 꼼짝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이모가 일러주었고, 굴 위에는 멍석을 깔아 고추 잎과 고추를 널어놓았다. 혹시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당분간 이웃에 맡겼다. 혹시라도 왜경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굴 쪽을 향해 짖기라도 하면 산통이 깨질 일이라며 강아지를 내보낸 것이다. 준호와 연이는 몸이나 머리에서 나는 냄새로 눈치 채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밤중이면 나와서 목욕을 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준호와 연이가 숨어 있는 이모 집에 왜경들이 자기네 들이 써야 할 방 하나를 내놓으라는 전갈을 보냈다. 연이가 쓰던 방을 내주기로 하고 연이의 소장품을 모두 굴 안으로 치웠다. 옷이며 이불 요 베개 화장품 수건 심지어 화장지까지 자취를 없앴다. 혹시 방에서 처녀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며 마른 쑥을 방안에 피워 방에 쑥 냄새를 배게 했다.

며칠을 굴 안에 갇혀 있는 준호와 연이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울화통이 치밀었다.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 분화구에서 열이 풀풀 났다. 준호의 눈동자가 빨갛게 토끼눈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준호의 눈은 몹시 가려웠다. 손등으로 눈을 마구 비며댔다.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연이도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양 손을 펴서 맞대고 계속 문질렀다. 왜경들이 올 거면 하루라도 빨리 왔다 갈 것이지, 이 노릇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노릇이다.

새벽이 되자 연이가 굴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화장실에 간 모양이다. 준호는 무심코 베갯머리에 있는 연이의 보따리를 밀어내자 그 보따리 틈새에서 편지가 눈에 띄었다. 준호는 즉시 편지를 꺼냈다. 가쁜 숨을 쉬며 읽어 내리다가 방앗간 집 아들 이야기에 눈이 멎었다. 금방 편지를 넣어 연이 보따리 틈에 찔러 넣었다. 그 순간부터 준호의 가슴은 또 다른 충격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도 연이를 방앗간 집 며느리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분노로 차올랐다. 세월이 흐른 뒤 방앗간은 자연히 그 아들의 소유가 될 것이다. 그러니 연이가 그런 것까지를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연이가 방앗간 집 아들을 만나는 즉시 결혼, 그 즉시 임신, 그러면서 방앗간 주인마님으로 당당하게 큰소리치게 된다니, 이는 참으로 안 될 말이다. 그래서 연이가 기회 있는 대로 집엘 가자고 은근히 조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니다. 준호가 이렇게 쉽게 편지를 읽도록 기회를 준 연희의 마음은 제 스스로 입을 열어 말을 하기가 거북하기 때문에 이렇게 머리를 쓰는 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까지 준호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나왔다. 산에서 나물뭉치를 포개 놓을 때 연이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로 포개지자고 했지. 그래서 포개지면 아이를 낳게 될 거고 그 아이는 조선인이니까 일제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고 내가 말했지?. 준호는 혼자 생각에 푹 빠져 연이가 굴 안으로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연이는 눈치로 편지를 더듬어보는 듯했다. 밖에 나간 사이에 준호가 편지를 읽었나를 알아보려는 듯, 연이는 제 보따리를 뒤적거려 보았지만 그대로 있다는 생각에 준호가 편지를 읽었으리라는 생각을 전연 할 수가 없었다. 준호는 연이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연이가 방앗간 집 아들에게 가고 싶은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연이를 그쪽으로 가도록 해줘야 연이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겠지만 자기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연이를 방앗간 집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준호는 말 그대로 빈 털털이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단지 있다면 연이를 사랑하고 있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연이가 준호를 사랑하고 있는 사실만이 두 사람의 전 재산이다. 준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이를 결단코 방앗간 집 며느리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준호는 편지를 읽은 다음부터 연이를 보는 눈에 날을 세웠다. 연이는 워낙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왔기에 혹시 준호보다 방앗간 집 아들에게 마음이 쏠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준호를 은근히 불안하게 한다. 밤낮 불안을 느끼던 준호는 잠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연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맞대고 가쁜 숨을 쉬다가 연이 입술에 준호의 입술을 바짝 대었다. 그리고 산에서 포개던 산나물뭉치처럼 포개자고 했다. 연이는 순순히 응했다. 준호는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나서 연이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굴 안에 신방을 차리기는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고 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연이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아기는 다윗동네 어느 집 마구간 말구유에서 탄생하시지 않았느냐고 속삭여 주었다, 날이 갈수록 준호에게는 연이를 대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연이도 흔들리던 마음이 안정을 찾았다. 이제부터는 죽으나 사나 준호는 연이와 연이는 준호와 함께 살아야 한다.

장봉도에 주민조사를 나왔던 왜경들은 그동안 어디에 머물러 있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준호와 연이가 있는 이모 집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 주민조사에 적발되어 끌려 나간 13,4세의 소년 소녀들은 모두 11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준호와 연이는 굴에서 나와 연이가 사용하던 이모네 방에 같이 들기로 했다. 굴에서 밤낮 같이 있는 동안 두 사람이 매우 가까워졌다고만 이모에게 말했다. 이모 내외는 이미 준호와 연이 사이를 눈치 챈 지가 오래 되었다. 진작부터 같이 방을 사용했으면 별 불편이 없었을 것이라며 이들이 방을 같이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준호가 파서 거의 보름동안을 사용하던 굴은 메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언제 왜경이 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준호와 연이의 피난처로 삼자고 했다. 장봉도에서 왜경이 완전히 떠났다는 소문과 함께 준호와 연이는 선주아저씨 내외와 바다에 나가기 시작했다. 굴속에서 나와 오랜만에 쐬는 바닷바람이 이렇게 좋은 바람일 수가 없었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돈을 주면 이런 바람을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준호와 연이는 힘껏 바람을 마셨다. 바다바람이 온통 속을 다 쓸어내는 기분이었다. 속이 시원했다. 몸도 가벼웠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연이는 몸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준호도 잠자리에서 연이의 배를 만져볼수록 신기했다. 연이의 배는 그냥 배가 아니라 분명 살아 움직이는 배였다. 미미한 느낌이지만 연이의 뱃속에 아기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연이도 조금씩 불러오는 제 배를 쓰다듬으면서 벌써부터 아기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은 지 오래 되었다. 연이는 제 자신보다 뱃속 아기가 더 소중했다. 요즈음은 전에 생각하던 준호가 아니다. 전에 미처 몰랐던 사랑이 준호를 감싸며 다가왔다. 이제 준호는 생활의 기반을 잡아야 한다. 어제 오늘의 준호로만 살아선 안 된다. 완전한 뱃사람이 되든지 나무꾼이라도 되어야 한다.

준호와 연이가 고기 추스르는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이 되었을 때 집에 당도했다. 매일처럼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이모 내외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연이 어머니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 옆에는 서른이 가까워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준호와 연이는 어머니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어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어안이 벙벙한지 아무런 말이 없다. 연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다가 준호를 가리키며

“같이 살아요.” 했다.

어머니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다. 준호와 연이가 집에 오기 전에 벌써 이모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뭘로 빚을 다 갚는다냐?” 며 준호와 연이를 뚫어지게 쏘아본다.

“무슨 빚을 지셨는데요?” 준호가 물었다.

“이젠 준호 너도 내 사위지? 우리 빚을 같이 갚자.”

어머니는 방앗간 집 아들이 오랫동안 쌀을 대줘서 여러 가마니를 먹었는데, 내심 연이를 그 집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방앗간 집 아들이 생활의 일부를 도와 줄 것으로 알고 있던 차에 연이의 독단적인 행동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장봉에 오는 통에 방앗간 집 아들과 같이 와서 연이와의 선을 보이고 함께 데려 갈 생각이었다. 헌데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방앗간 집 아들은 무척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준호를 뚫어지게 한참동안 응시하던 그는 씩 한번 웃어 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별로 인사도 없이 이모네 집을 훌훌히 떠났다. 준호는 당장은 어렵지만 활동이 좀 자유스럽게 되면 방앗간 빚을 갚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며 연이 얼굴을 살폈다. 이어 연이는 어머니에게 좀 참고 기다리시라고 사정을 했다. 어머니는

“맨 주먹에 애는 잔뜩 배놓고 무슨 수로 빚을 갚니? 이럴 줄 몰랐느냐?“ 라며 째지는 눈으로 연이를 흘겼다. 순간 연이는 어머니의 눈길을 피했다.당장 준호는 선주 내외를 찾아갔다. 그동안 무작정 그냥 지냈지만 연이와 함께 일한 품삯을 생각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연이가 임신을 하고부터 준호의 가슴 속에서 더욱 강한 생활력이 솟아올랐다. 선주 내외는 다른 선주들이 고용인을 대우하는 정도의

삯을 쳐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준호는 저만이 아니라 연이 몫도 챙겨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어머니와 방앗간 집 아들이 다녀간 후 달포가 지나서 순사 두 사람이 준호와 연이를 찾아왔다. 그들은 다짜고짜 준호의 양 팔을 뒤로 젖혀 수갑을 채우고, 연이는 양 손목을 뒤로 젖혀 밧줄로 묶었다. 순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일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조선인이다. 일인이 조선인에게 가자고 하자 조선인은 준호와 연이에게 자기네가 몰고 온 삼륜차에 타라고 했다. 준호는 삼륜차에 오르면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연이도 가야합니까?”

“임시초로 간다. 몰라서 묻나?”

준호와 연이는 방앗간 집 아들의 고자질 때문일 거라는 생각에 배신감이 끓어올랐다. 방앗간 집 아들이 아니면 누가 고자질을 했을까 싶었다. 털털거리는 삼륜차에 실려 임시초소까지 온 준호와 연이는 임시초소 옆으로 딸려 있는 작은 방에 갇혔다. 임시초소에는 “지역비상대책임시초소”라는 초라하고 작은 간판이 붙어 있는 옆으로 일장기 하나가 꽂혀 있고 그 옆으로 간단한 소화시설이 비치되어 있다. 방이라야 텅 빈 상태로 창문도 없이 콘크리트 벽과 바닥뿐인 답답하고 작아 낮에도 침침한 방이다. 다만 밥그릇을 들이미는 얼굴짝만한 창구가 있을 뿐이다. 임시초소에서 아침저녁으로 들이미는 죽을 먹었다. 갇힌 지 3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날 저녁 준호는 죽을 들이미는 취사병에게

“우리를 어찌할 셈이오?” 하고 불만스러운 어투를 던졌다. 취사병은 말없이 돌아갔다. 준호는 방앗간 집 아들이 매우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이 조선인을 왜놈들에게 고발하는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연이는 준호의 식구가 되었지만 준호의 식구가 아니더라도 방앗간 집 아들을 따라갈지는 모르는 일인데 어찌 자기를 따를 연이를 내가 채간 것처럼 앙심을 품고 왜놈들에게 고발을 했단 말인가? 그 놈이야말로 매국노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준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임시초소에 기간병인 젊은이가 와서 준호에게

“당국에서 조치가 하달될 때까지 기다리시오.”란 말만 전하고 갔다. 준호는 답답하기만 했다. 자기는 조치가 하달될 때까지 기다린다 해도 임신부인 연이는 집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연이는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자다 말다 바닥에 누어 자다 말다 했다. 준호는 이 좁은 방에 함께 갇혀 있는 연이의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방앗간 집 아들이 괘씸하다는 생각에 치를 떨곤 한다. 방앗간 집 아들은 준호와 연이의 일생을 무너뜨린 악마와 다름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화를 치밀게 한다. 언젠가는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전신에 가득 차오른다. 준호는 다시 연이의 얼굴을 시선으로 씻어 내린다. 어렵게 살아오는 어린 나이에 너무 가엽다는 생각뿐이다.

 

준호와 연이는 장봉도 일경초소에 취사와 잡일을 담당하는 임시고용원이 되었다. 매일 왜경들의 취사를 위해 나무나 풀 따위를 모아 땔감을 마련해야 했고, 매끼 밥을 짓고, 초소의 청소는 물론 왜경들의 옷가지나 양말 등을 깁는 일 등을 해야 했다. 이런 일로 6개월을 채우면 황국신민으로서 군에 입대하여 국방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준호와 연이의 가슴을 캄캄하게 채우는 어두움이었다. 고향을 떠나 장봉으로 올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연이는 임신부로서 준호와는 사정이 달라야 하겠지만 왜경들에게서 그런 배려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무지막지한 벽으로만 가로막혔을 뿐이다. 연이는 엄마가 되면 정신대에 나갈 염려도 없고 육아와 가사에만 집중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일 년 365일 나가서 부역을 해야 한다니 태어나는 아기는 누가 키워야 하고 가정은 누가 지키는가. 안쓰럽고 답답한 현실에 부닥칠 뿐이다. 연이와 함께 선주 내외의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추슬러 담아 옮기는 일 등 배에서 하던 일의 품삯을 받는 일도 이제는 말뿐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방앗간 집 아들에게 진 빚을 갚는 일도 점점 막막해지기만 했다. 그나저나 오늘 하루를 지내는 일만도 예사롭지 않고 고통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매끼 밥과 반찬을 해대는 일. 땔감을 구하여 조석을 짓는 일뿐 아니라 잔일까지 담당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준호 자신도 그렇지만 연이에게까지 이런 일을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사람의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준호의 가슴을 옥조이고 있다. 준호에게 매일같이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준호와 연이를 심하게 부려먹는 왜경들도 왜경들이지만 더 더욱 괴로운 것은 방앗간 집 아들이다. 그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불만에 치를 떠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연이와 함께 임시고용원으로 일을 시작한지 어느덧 반년이 되었다. 왜경이 준호와 연이에게 했던 말에 따르면 임시 고용된 지가 반년이나 되었으니 군에 입대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준호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우선 연이가 곧 출산을 하게 된다. 연이가 출산을 하면 현재 일에서 놓이게 된다. 그리고 준호는 연이 출산과는 관계없이 군에 입대를 하게 된다. 연이는 돈 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이 어린 아이와 매일 같이 생고생을 하며 어머니와 방앗간 집 아들에게 쪼임을 당하며 그날그날을 보낼 것이다. 준호는 일단 입영 통지를 받는 즉시 연이와 아기의 생계를 위한 배급신청을 하리라고 마음을 먹고 있다. 따라서 선주아저씨에게도 그동안 두 사람이 일한 품삯을 조금씩이라도 주기를 요청할 것이다. 연이는 출산 후에라도 당국이 부역에 나와서 일을 하라 하면 할 수 있는 한 나가서 거들면서 생계유지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다짐하곤 했다. 준호는 자기가 입대하고 집에 없는 동안 연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방앗간 집 아들이 걸림돌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준호와 연이가 임시초소에 끌려온 지 7개월이 다 되어서야 당국으로부터 영장이 떨어졌다. 15일 후에 군에 입영하라는 것이다. 인천에 있는 헌병대에 가서 신고를 하고 거기서 내리는 지시대로 하라는 것이다. 연이는 일단 귀가조치 되었다. 이미 임시초소에는 준호와 연이가 하던 일을 받아 할 인력이 충원되었다. 남자만 두 사람이었다. 준호는 하루하루를 지나면서 그들에게 차근차근 일을 인계하였다.

인천 헌병대로 가기 4일 전 준호는 휴가를 얻었다. 그동안 임시초소에서 일한 소액의 삯을 받았다. 연이도 받았다. 두 사람이 받은 삯이라야 불과 몇 푼 되지 않았다. 휴가가 시작된 첫날밤 준호는 야간을 이용해 인천으로, 다음날 새벽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달렸다. 고향 버스정류장에 내린 준호는 규모가 작고 초라한 음식점(음식 값이 싼)에 들어 늦게 저녁을 먹었다. 음식점을 나온 준호는 비어 있는 큰 정종 병 두 개를 사들고 날이 좀 더 어둡기를 기다려 주유소에 도착하여 잠시 주위를 살피고 나서 두 개의 병에 가득 휘발유를 채웠다. 값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 싼 정종 병을 하나씩 양 어께에 둘러메고 가능한 대로 사람의 눈을 피하면서 태연스럽게 방앗간을 향해 걸었다. 아무도 없이 방앗간은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방아를 찧은 듯 방아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날이 좀 더 어두워지자 준호는 정종 병마개를 빼고 방앗간 벽을 돌아가며 병을 기울였다. 벽 밑에 골고루 휘발유가 뿌려졌다. 곧바로 성냥을 그어댔다. 불 지른 자리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준호는 버스정류장 부근으로 몸을 피했다. 준호는 버스에 앉아 불자동차의 사이렌 소리를 연거푸 들었다. 속이 시원했다. 방앗간 집 아들도 준호를 왜경에게 고발을 하고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 다음날 아침 준호는 인천시내에 도착, 일간신문을 샀다. 사회면을 펼치자 “방앗간 건물 전소, 주인 아들과 일경 2인 소사” 제목에 사진도 떴다. 지역 경찰은 계속해서 방화범을 쫒고 있다는 기사로 끝을 맺었다. 준호는 자신이 방화범으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 어머니와 연이를 괴롭힐 장본인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더 안도감을 느꼈다. 오늘 이 일은 어머니도 연이도 모른다. 오직 준호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향에 다녀 온 일에 대해서 연이나 이모 내외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꼭 만나보아야 할 친구를 만난다는 말만 하였다. 만약 준호가 입대하는 날까지 무사하면 별일이 없을 것으로 준호는 믿고 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는데도 고향이나 수사당국에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입영 날짜를 맞은 준호는 연이 이모 내외와 선주아저씨 내외 그리고 얼굴이 익었던 이웃들과 골고루 인사를 나눴다. 당일 늦지 않게 소집장소로 나갔다. 연이는 부른 배를 안고 준호와 함께 소집 장소로 따라갔다. 어쩌면 마지막 배웅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집 장소는 인천 중앙에 위치한 답동성당 마당이었다. 입대할 젊은이들을 따라온 사람은 연이만이 아니다. 소집된 젊은이가 30 명도 안 되는데 따라온 가족과 일가친척과 지인들로 좁아빠진 안마당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들 모두의 가슴 속에는 마지막 배웅이라는 뜨거운 아쉬움이 깔려있는 듯하다. 준호는 잡고 있던 연이의 손을 놓고 연이의 배를 쓰다듬으며 얼굴을 높이 들어 종탑 끝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로마식으로 조형된 육중한 조형물인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잠시 눈을 감았던 준호의 눈에 영롱한 빛을 내는 방울이 준호의 옷섶으로 내리흘렀다. 잠시 후, 헌병들이 도착하여 이름을 부르며 일일이 점호를 하고 점호를 끝낸 젊은이에게는 일장기폭을 나누어 주고 이마에 돌려 질끈 동여매게 했다. 이어 일본헌병의 지휘에 따라 국가제창을 했다. 그들은 나란히 대기하고 있던 삼륜차에 분승되었다. 담당자의 발표는 없었지만 삼륜차에 실린 젊은이들은 인천 부두에서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에서 즉시 삭발을 하고 당일로 일본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고 입들을 모았다. 연이는 만삭된 배를 싸안고 군중 속에 섞여 초원에 나부끼는 연한 풀잎처럼 눈물과 함께 흔들리고 서서 하늘을 찌를 듯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연이는 장봉에 돌아가기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모 집에 도착하는 즉시 고향 사람 누가 와 있을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떨리는 가슴을 안고 장봉행 배에 올랐다. 연이가 집에 당도하자 이모 내외는 연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연이는 심신의 피로가 겹쳐짐을 느꼈다. 그 중에도 연이의 가슴속에는 웃음을 띠며 떠나던 준호의 얼굴과 답동성당 하늘 꼭대기에 서 있는 십자가가 자꾸 떠올랐다.

 

준호가 집을 떠난 지 꽤 여러 날이 지났다. 준호가 집에 없으니 연이에게는 텅 빈집이나 한가지였다. 준호 없는 자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다. 이모나 이모부가 한집에 같이 살아도 연이는 혼자 사는 삶이나 다름이 없었다. 준호가 그리울 때면 연이는 불룩한 배를 쓰다듬었다, 제 배 안에 준호가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연이 배속에는 준호는 없다, 준호는 일본 어느 훈련소나 군수공장에서 훈련이나 노동의 시간을 엮고 있을 터이다.

연이는 출산이 매우 가까워졌음을 몸으로 느꼈다. 모든 여건이 쉽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출산준비에 신경을 써야 했다. 연이가 아기를 낳고 누워있는 동안 연이 옆에서 산모를 도와야 할 손이 필요했다. 산부인과에 갈 형편이 안 되니 집에서 아기를 받아야 한다. 이모가 아기도 받아주고 연이의 손발노릇을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모도 홀앗이살림에 매일같이 품팔이신세라 연이의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모 집에 사는 일만도 죄송 천만인데 이런 부탁까지 하기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오랜 생각 끝에 초등학교 선배언니 산나가 인천 만석동 아랫동네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기억을 되살렸다. 그런 중에 산나의 소식도 몹시 궁금했다. 산나는 연이의 3년 선배였으므로 연이가 학생일 때 산나는 이미 졸업을 하였다. 산나는 연이네 집을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산나도 연이네 만큼 가정이 어려웠다, 졸업과 동시에 정신대에 끌려갈 처지였으나 서둘러 결혼을 시키는 바람에 정신대는 면하고 남편을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연이와 산나는 여러 해 동안을 적조해 있었다. 그래도 연이의 생각은 산나를 빈손으로 데려왔다가 빈손으로 보낸다 해도 조금도 허물이 느껴지지 않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이는 배 삯이 좀 들더라도 산나 언니를 만나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연이가 초등학교 졸업 후, 산나를 만난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이렇게 산나를 만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장봉에서 배편으로 인천에 도착한 연이는 만석동까지 걸어서 산나의 소식을 물어 만석동까지 왔다. 만석동 우물가에서 연이를 만난 산나는 연이를 끌어안자마자 소리 내어 흐느꼈다. 산나 품에 머리를 묻은 연이도 하염없이 몸이 흔들리며 눈물이 솟았다. 연이가 산나의 가슴에 머리를 묻는 순간 언뜻 눈물 사이로 산나의 머리에 검은색 상장이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을 한 덩어리로 끌어안고 울던 두 사람은 울음을 그쳤다.

“언니 어쩐 일이야. 머리에 리본은?”

산나는 떨리는 목젖을 달래며

“며칠 전, 애 아빠의 전사통지가 왔어”

“어디서?”

“어딘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남양군도의 어느 지역에서 발생한 함포사격에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나왔대. 복무기간이 거의 다 되어 몇 달만 더 있으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연이는 산나의 말을 들으며 그 함포사격이 있던 때를 확인하고 준호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사건임을 알았다.

“언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

“새끼하고 둘이 살아야지, 할 수 있니?” 산나는 잠이 깨지 않은 두 살배기 아들을 끌어안으며,

“애비 얼굴도 모르며 살게 생겼네.”

연이는 눈치 빠르게

“언니, 얘가 유복자야?”

“그렇단다. 얘 아빠가 일본으로 떠나고 며칠이 안 되어 낳았으니까 별 수 없는 유복자지.”

연이는 가슴이 떨렸다. 산나는 연탄불 위에 올려 있는 보리 개떡을 쟁반에 담아 연이 앞에 내밀었다.

“언니, 나는 빈손으로 왔는데 언니는 왜 이래?”

산나는 곧장 대답을 서슴지 않았다.

“나도 너의 집에 빈손으로 가면 되잖아. 걱정 놔.”

이어 연이는 산나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했다.

“네 자식은 내가 받아 줘야지.”

산나는 연이에게 한없이 고마운 언니이지만 또한 한없이 가여운 사람임을 연이는 절절히 실감한다.

 

연이의 몸에서 양수가 터지자 출산준비에 이모와 연이 산나는 잔뜩 긴장을 하였다. 가정에서 출산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으나 병원도 없는 동네에서는 예사로이 넘길 일은 아니다. 연이가 산통을 느끼며 소리를 지르자 이모와 산나가 달려들었다. 연이는 어린 나이의 출산인지 예상보다 쉽게 아기를 낳았다. 사내아이다. 산나는 저도 연이처럼 쉽게 아이를 낳았다며 연이의 순산을 축하했다.

“아빠를 빼 닮았네.” 이모는 신기한 듯 탄성을 질렀다. 연이는 어머니의 손자를 낳았다고 편지를 쓰면서도 준호에게서 군사우편이 오기 전에는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은 할 수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준호에게서 소식이 오면 아들 이름을 지어 보내라고 부탁할 참이다. 산나는 보름을 더 지나면서 연이의 산후조리에 정성을 기우렸다. 산나가 아침 일찍 장봉상가에 나가 아기와 산모의 필수품 몇 가지를 사다가 연이 코앞에 내밀었다.

“아기가 고개를 꼬눌 줄 알면 아기를 안고 만석동 우리 집으로 놀러 오렴. 와서 며칠이고 함께 있자.”

“언니, 고마워. 언니도 심심하면 여기 놀러 와.”

산나는 연이의 손을 잡고 한참을 쓰다듬다가 점심때가 지나서야 장봉을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준호는 훈련소에 입소되어 일반 제식훈련을 받았다. 장봉에 있을 때 어선에 따라다닌 관계로 해군기지에 배치되어 석 달 동안 해군기초 훈련을 받고 해군 소속의 사병이 되었다. 준호는 바다에 나가 작은 배거나 큰 배거나 심지어 보트를 타는 일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배를 타는 일을 매우 즐겨하는 편이다. 준호는 군함에 배치되어, 올 곳에 잘 왔다는 생각을 하였다. 잠수함은 진수할 때부터 가라안기 때문이다. 준호는 잠수함에 실려 물에 잠기는 순간이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포근함을 느낀다. 육지에 있는 동안은 시시각각 일인들의 눈총이 꼴사납기 때문이다. 잠수함 안에는 일인도 있고 타 인종도 있지만 이들은 한 배를 타고 있으므로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공동의식이 있기에 서로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항상 떠나지 않는다. 준호는 어두운 밤에 보트를 타고 바다 한복판 쯤 갔던 일이 있었다. 말 그대로 망망한 바다 가운데 나뭇잎 같은 조각배였다. 이 순간 준호의 머릿속에 일엽편주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경을 넘고 또 사경을 만나 허우적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절실히 공포심을 실감하였다. 말로 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사경을 헤맨 것이다. 준호는 이런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연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공포야말로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낮에라도 혼자는 보트로 바다에 뜨는 일은 한 번도 없다. 매사에 자신감을 자랑한다. 준호가 일하는 잠수함 내에서는 첫손가락 모범병사다. 성실성이나 기능면으로 준호를 따를 현재원은 없다. 그래서 일인들마저도 준호를 볼 때마다 오른손 엄지를 꼬나들고 “이찌방”이라고 목청들을 높인다.

준호는 일본에 와서 사병이 되었을망정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장봉에서 개인 어선을 따라다니던 일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나 조선을 보는 눈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준호의 생각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다. 일본을 보는 준호의 관점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태도이다. 쇠붙이 공출을 시키고, 정신대원을 뽑아 들이고, 한국문화, 사회제도, 종교탄압 등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 준호는 구구절절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준호로서는 별 수 없다. 그저 두고 볼 뿐이다.

 

잠수함 벽 중앙 시사 난에 “여성 나체연주”를 알리는 벽보가 준호 눈에 띄었다. 이 벽보는 화려한 색채로 그림과 글씨가 인쇄된 매혹적인 홍보물이다. 군인들 사기진작으로 실시하는 연중행사용이다. 함 내에 있는 군인들은 이 홍보물을 누구나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기회 있는 대로 이에 대해 웅성거리는 분위기이다 함 내의 분위기가 훨씬 명랑해진 느낌이다. 준호는 그 벽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등장하고 있는 여성들이 누구인지 홍보물에 피사체로 찍힌 크기와 선명도로는 분별이 안 되었다.

홍보물에서 눈을 뗀 준호의 뇌리에는 금방 정신대가 떠올랐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차림에 줄 지어 헌병대원을 따라가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이어 연이가 눈에 어린다. 연이만 떠오르면 산나물뭉치처럼 포개지자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 정신대에 나가라는 박 선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가슴 조이던 연이가 산나물뭉치처럼 준호와 포개져서 아이를 갖게 되었고, 아마 지금쯤은 아이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꽤 자랐으리라는 생각이 그리움으로 사무친다. 준호는 매우 바쁜 생활이지만 시간을 내서 연이에게 편지를 쓰겠다 하면서도 마음같이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탓이다.

함 내 벽 중앙에 붙었던 나체연주 공연이 있는 날이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휴식시간을 좀 늘려서 공연을 하기로 되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장교와 사병이 공연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연장은 군용강당이다. 기본적인 조명시설과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와 군악대가 사용하고 있는 밴드 등이 비치되어 있는 강당이다. 공연 타이틀은 <알몸연주>이다. 등단하는 지휘자, 반주자를 비롯하여 각 파트 담당자들은 모두 일본 여성들이다. 지휘자만 제외한 대원들은 거의 소녀들이다. 이들은 자기가 연주할 악기를 각각 들고 무대에서서 지휘자와 반주자가 등단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관중석은 이미 꽉 찼다. 잠시 후, 지휘자와 반주자가 등단하였다. 장내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중앙에 자리 잡고 서 있던 지휘자와 반주자는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상의부터 차례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무대 정면에 붙인 <알몸연주> 그대로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홀딱 벗고 관중석을 향해 절을 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귓속에서 터지는 듯했다. 준호도 사병들 틈에 끼어 관람을 하였다. 알몸으로 서 있는 소녀들 모두가 틀림없는 연이다. 앞으로 서 있으면 앞모습, 뒤로 돌아서면 뒷모습, 이는 하나도 연이와 다를 게 없다. 너무 멀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피부색, 몸매, 상체, 하체 모두가 연이와 똑같다. 무대에 오른 열여덟 소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손바닥을 펴 자기 치부를 가리느라 애를 쓴다. 그러나 눈 가리고 야옹이다. 머리는 똑같이 여중이나 여고생의 머리모양이다. 소녀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띠지 않은 굳은 얼굴들이다. 관중석에 있는 장병들 중에도 웃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엄숙한 시간을 떠받치고 있는 듯했다. 엄숙한 순간만이 흐르고 있다. 준호는 몸이 오싹 조여 들었다. 이것은 오락이 아니야. 인간이 간직해야 할 비밀의 신비를 도용하는 짓이야. 도대체 이런 일을 시작한 자가 누구야. 준호는 엄청난 사기라도 당한 듯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준호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마냥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어머니와 연이에게 군사우편을 보냈다. 편지를 종종 쓰지 못한 것은 편지에 쓸 만한 소식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매번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게 될 일엔 흥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입대 후 한 번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이다.

군사우편이 연이에게 전해지자 연이에게서 끊임없이 편지가 날아온다. 애기의 사진까지 종종 찍어서 보내준다. 아들이다. 그리고 아기 이름을 얼른 지어서 보내 란다. 준호는 이런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으랴만 그렇지가 않았다. 무얼 먹이고 무얼 입혀서 키우는지, 아기가 아프면 무슨 돈으로 병원엘 가는지, 연이는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이런 것들이 밤낮없이 가슴을 때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은 모두가 일제가 내리는 정치적 탄압 때문이다, 어느 날에나 허리 펴고 살 수 있을지. 이는 마치 준호가 밤중에 보트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를 헤매던 일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으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는 이름이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이 알선하여 공개 모집하거나 자발적인 지원 또는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 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 명이다. 이들 중에는 대다수가 일본군 위안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을 대상으로 성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 위안부가 되는 방법으로는 징용 또는 납치, 매매 등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였다.

위안부의 구성원으로는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인 등이 포함된다. 그 밖에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징발되었다. 준호는 잠수함 기간사병으로 맡은 분야가 주로 중무기를 수송하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잠수함에 연관되어 있는 중무기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중무기는 소형무기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나타내므로 다른 군용물자에 비해 여간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잠수함에 적재되었거나 수송용으로 실린 무기들의 점검은 밤이건 낮이건 준호의 고유책임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순시파악하지 않으면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준호는 이런 일에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에 잠시도 마음 편한 순간이 없다. 기회만 있으면 병과든 주특기든 어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준호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중에 나날이 준호에게 쌓이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정신력을 이겨내기는 중무기를 다루는 일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나다. 다른 장교나 사병들조차도 이런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는다. 아주 질색이다. 견뎌내기 어려운 일이지만 준호는 겉으로 내는 불평 하나 않고 꾹 참아왔다. 더구나 준호를 괴롭히는 악적 요소는 전쟁터에 위안부로 끌려와서 강요당하는 나이 어린 여성동포의 참혹상이다. 박 선생의 친절과 권유를 받았으면서 견뎌내기 힘들었던 정신대. 연이야말로 준호가 아니었으면 졸업과 동시에 꼼짝없이 끌려가고 말았을 일이었다. 그걸 피하려고 소녀인 연이가 산나물뭉치처럼 준호와 포개져 아이를 갖게 되었고, 아기엄마로 갖은 고생을 하며 견디는 것이 아닌가. 준호의 눈에는 일본 전장에 와서 연명하는 정신대원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연이로 보인다. 무엇이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가. 왜놈들이다. 정신대로 끌려와서 고생 속에 묻혀 있다가 제 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소녀들의 수는 얼마이랴! 준호는 이런 일들이 모두 국력이 약한 나라의 책임이지만 자기 자신의 일이라는 착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착각이 아니다. 사실이다. 지금도 살아서 이리저리 끌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확실하지 않은가. 준호의 가슴 한 복판에는 이들이 확실한 성노예로 각인되어 있다. 성노예만이 아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수 없는 황국신민의 노예, 미신의 쓰레기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영,육의 노예로 의지할 데 없는 가련한 백성들이다, 준호는 이런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 골똘해졌다. 몸에 자꾸 열이 난다. 가슴으로부터 배로 다리로 눈시울로 몸이 마구 떨려온다. 심지어 엉덩이 살까지 떨린다. 귀가 멍해진다. 시력이 희미해진다. 목이 탄다. 배가 고프다. 자꾸 어지럽다. 이대로 눕고 싶다. 며칠 전 준호가 잠수함 기관실에서 당했던 현상이 그대로 겹쳐오는 느낌이다. 준호는 수도꼭지를 튼다, 물을 받아 마신다. 가슴이 답답하다.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 싶다, 결국 몸을 가까스로 가누어 군용침대에 누웠다. 누워 있는 실내가 온통 노란 색이다. 쥐어짜면 노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한참 동안 멍해 있던 준호에게 정신이 좀 들자, 막연하나마 연이의 손이 잡고 싶어진다. 아직 이름도 없는 아들이지만 품에 안아보고 싶어진다. 준호는 연이의 손을 잡는다. 아들을 가슴에 안는다. 아니다, 꿈도 아니고 사실도 아닌 비몽사몽이다. 준호가 몽롱한 상태에서 확실히 눈을 떴을 땐 창문을 뚫고 들어온 밝은 햇살이 직통으로 준호의 시선을 찔렀다. 준호의 시선 속으로 무수한 소녀들이 줄을 지어 햇볕 줄을 타고 눈으로 들어와 차례로 팍팍 쓰러져 눕고 있었다. 순간 준호는 생각했다. 세계의 유명한 어느 시인의 시에 소녀들이 햇볕을 타고 시인의 눈앞으로 몰려든다는 현상이 준호에게도 나타난다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속에는 연이도 끼었다 틀림없는 연이다. 이렇게 몰려오는 소녀들은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춤도 추지 않는다. 얼굴에는 웃음이 한 점도 없다. 맨 얼굴에 무표정이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준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현상을 박살내야겠다. 준호는 함 내에 비치되어 있는 중무기실로 발을 옮겼다. 함포실 입구에 선 준호에게 나란히 비치되어 있는 주포, 부포, 고각포 등이 보였다. 사격을 하면 엄청난 위력이 나오는 무기들이지만 매일같이 만지고 닦는 준호에게는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다.

며칠 후엔 부대 내에 엄청난 규모의 파티가 있을 예정이다. 해군창설이후 최초로 거행했던 잠수함 진수식을 기념하는 날이다. 준호는 이미 이 날 있을 행사를 잘 알고 있다. 낮에는 열병식을 비롯한 운동경기가 있고, 저녁에는 멋진 파티를 갖는다. 장소는 군용식당이 아니고, 바다에 잠수함을 띄우고 그 안에 장병들이 어울려 자리를 함께한 위안부들과 먹고 마시며 춤추며 사기진작을 위한 피치를 한껏 올리기로 하였다. 이것은 이들이 마련한 최대의 축제다. 준호는 이 일에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첫째는 무기관리이다. 그리고 장내 시설, 장내 정리 및 인원관리가 준호의 주 임무이다. 허나, 준호는 자기 본분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날 밤, 파티가 무르익을 시간을 이용하여 잠수함과 인력을 몽땅 폭파, 침몰시킬 계획에 정신을 쏟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모두 죽음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수는 없다는 동포애가 마음을 덥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선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끓어오른다. 점점 더 가슴에 압박감이 감기고 발끝에서부터 종아리로 넓적다리로 엉덩이로 허리로 조여 오르기 시작하더니 양 가슴으로까지 더욱 세게 육박해 온다. 그러면 그럴수록 일인들만 더욱 옥조여서 단번에 해치워야한다는 생각만으로 더욱 골이 깊어진다,

 

행사 당일, 준호는 야마다 다끼하라를 조용한 곳으로 불렀다. 다끼하라는 평소, 준호와 친분 있게 사이를 지키는 조선인병사다. 그러나 준호가 다끼하라를 전적으로 믿는 사이는 아니다. 다만 조선인병사이기 때문에 그를 돕겠다는 생각뿐이다. 준호는 야마다 다끼하라와 연병장 가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는 두 사람뿐,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준호는 숨을 크게 내쉬며 다끼하라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끼하라, 조선인 맞지?”

준호는 다끼하라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다끼하라도 숨을 몰아쉬며

“그럼, 조선인이지 않구, 내가 뭐란 말인가?”

“됐어, 조선인이면 됐어“

준호는 야마다 다끼하라가 조선인인 걸 알고는 있지만 그에게 정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내도록 한 말이었다. 준호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다짐이라도 하는 듯

“나도 조선인이야, 내 일본 이름은” 준호는 말을 더 있지 않았다.

다끼하라가 준호에게 일본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준호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한다.

준호는 일본말로 제 이름을 떠벌이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준호는 다끼하라에게 축제가 거의 끝날 무렵, 사이렌이 울리면 즉시 함을 빠져나와 신속히 구명보트를 타고 육지로 피하라고 일러주었다. 수사대에서 어떻게 알고 잠수함을 나와 구명정을 타고 육지에 올라와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면, 주저하지 말고 함 내에 전등이 갑자기 꺼지는 순간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내 등을 치면서 즉시 나가야 산다고 고함을 쳐 주었다고 대답하라고 일러 주었다. 누가 물으면 준호도 같은 대답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말라고 든든히 다짐까지 하였다. 준호에게도 누가 물으면 같은 대답을 하리라고 다끼하라는 생각했다. 이런 다짐을 받은 다끼하라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예정대로 축제 당일 아침부터 부대원 모두가 연병장에 나와 잠수함 진수식 축하기념대회를 갖고 열병식에 이어 체육대회를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장병들은 모두 사기충천하여 만사를 제치고 축제행시에 몰두해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오자 일장기를 단 차량이 앞서고 그 뒤를 이어 3대의 차량이 해군본부 깃발을 펄럭이며 연병장 안으로 들어와서 타고 온 사람들을 모두 내렸다. 내린 사람들은 거의가 중,고등학생 쯤 되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준호의 눈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해군 복장을 하고 있는 연이었다. 틀림없는 연이다. 하나도 연이와 다른 여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부대원들 모두가 이들과 함께 축제의 시간을 수놓을 분위기다.

드디어 축제행사가 시작되었다. 식순에 이어 해군군가를 부르고 이어 무탄축포를 쏘았다. 함 내에 울린 무탄축포는 실탄 터진 폭음 이상으로 함 내가 떠나가는 듯했다. 축포의 엄청난 굉음이 끝나자 축포에 딸린 축하 박수가 쏟아졌다. 해군본부 고위 장성의 축사와 기념사가 있은 후, 축배의 노래에 이어 장기자랑, 노래자랑 댄스 등, 다채로운 순서의 진행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장병들은 물론 위안부소녀들도 다량의 음식과 술로 인한 피곤과 오랜 시간 긴장감에 겹쳐 몸이 나른해짐을 견디기 어려웠다. 축제가 마무리 되는 기미를 띄자, 장교나 사병 중에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소녀들과 시간에 어긋나지 않게 약속된 장소로 갈 분위기가 조성될 순간이 되었을 때, 준호는 약삭빠르게 다끼하라에게 말했던 대로 함을 빠져나가라는 긴급 소식을 위안부 소녀들에게도 알렸다. 그 즉시 함 내의 비상등이 깜빡거리고 비상 사이렌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장내를 뒤흔든다. 야마다 다끼하라의 동정은 모르지만 준호는 이미 함을 빠져나와 구명보트에 올라 육지로 향하고 있다. 준호가 잠수함 내부에 비치하고 작동시켜 놓은 그대로 무기와 기계들은 제 구실을 하고 있다. 비상사이렌이 그치고 잠시 후, 수중 잠수함의 폭파소리와 함께 부유물들이 계속 떠오르겠지만 어두움으로 인해 분간이 안 된다. 하늘에 높이 뜬 달은 휘영청 밝게 내리 비치고 바다는 그대로 아무런 말이 없다. (1-20-2016).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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