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에서 생명사상이 어떻게 구현되었나

2002.11.13 04:37

길버트 한 조회 수:339 추천:5

현대시에서 생명사상이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우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를 생각하니 한 학기동안 배웠던 현대시를 살펴보고 그 맥락에서 생명이 생명다움의 우주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존재와 욕망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정신의 자유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앞서 현대시의 뿌리부터 찾아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땅 민주화 투쟁과 변혁 운동의 힘찬 출발을 알렸던 시인 김지하, 그가 군사 정권의 오랜 폭압과 수난 속에서 그토록 깊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 찾아 헤매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1970년대 전체를 폭발시킨 민족·민중 운동의 뇌관이자 문학적 폭발력 그 자체에 해당됐던 김지하, 그러나 그의 참모습은 정치와 문학, 투쟁과 사랑, 사상과 실천이라는 자칫 분리되기 쉬운 모순 명제를 하나로 꿰뚫어냄으로써 이 땅 정신사와 예술사에 일대 활로를 타개했다는 점에 있다. 김지하는, 일제 강점기와 분단시대, 이 땅의 가장 큰 쟁점이자 모순 명제라 할 정치와 문학, 문학과 사상을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데 의미 있는 공적을 보여주었다. 그가 수난의 세월 속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외쳐온 것은 정치만도, 문학만도, 더군다나 사상 그 자체만도 아니다. 사회·현실 개혁 운동으로서의 정치와 생명·진실 추구로서의 문학 그리고 인간 본질 및 실천 탐구로서의 사상을 삶 속에 생생하게 일체화시키려 노력해 온 데서 그와 그의 문학의 참 의미가 놓인다는 뜻이다. 김지하의 삶과 문학은 참여성과 순수성, 보편성과 특수성, 사회성과 개인성 및 역사성과 영원성의 변증법적 통일과 극복을 지향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문학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으로서의 생명과 그 생명을 키워주는 사랑, 그리고 사랑을 완성시켜 주는 것으로서의 자유 및 평등 실현이라는 인류 구원의 목표와 정합을 지닌다.

지금까지 그의 문학적 전개는 대략 다섯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땅의 오랜 역사적 질곡과 당대 군사 정권의 폭압적 상황에 맞서 싸우는 시집 『황토』(1970)의 세계가 첫 단계이며, 이러한 『황토』의 연장선에서 군사 정권의 폭압과 전면적으로 대결한 『오적』(1970) 등 일련의 담시들이 그 두 번째 단계이다. 또한 1970, 80년대 초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사력을 다해 싸우며 종횡무진 동서고금을 꿰뚫어낸 『타는 목마름으로』(1982), 대설 『南』(1982) 등이 그 세 번 째 단계에 해당한다. 아울러 해 저물 무렵 들판을 방황하는 중생의 고달픈 모습 속에서 삶의 의미, 자아와 생명의 실상을 찾아 헤매는 구도 시집 『애린』(1986) 및 『검은 산 하얀 방』(1986)이 그 네 번 째 단계이며, 겨울밤의 추위와 어둠 속에서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린 채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새 봄빛을 예감한 『별 밭을 우러르며』(1989)가 그 다섯 번 째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에 간행된 시집 『중심의 괴로움』은 오랜 인동의 세월을 거쳐 김지하 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새봄의 시 또는 부활의 시라는 점을 예견케 해준다.

첫 시집 『황토』가 척박한 이 땅의 역사적 현실과 그 억압에 대한 울분과 저항 의식을 드러냈다면, 「오적」(1970)을 비롯해서 「앵적가」(1971), 「비어」(1972), 「오행」(1974), 「분씨물어」(1974) 등 일련의 담시들은 당대 군사 정권의 정치적 억압 및 경제적 질곡과 맞서 싸우는 문학적 응전 양식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단편 서사시, 즉 담시들은 대략 `체포─투옥─석방─투옥─보석─잠행─체포─투옥'으로 이어지는 고통스런 1970년대 그의 영어 체험과 날카롭게 대응된다. 즉, 가장 고통스런 시기에 가장 치열한 정치적 응전력의 시들이 씌어짐으로써 담시가 정치적 폭력에 맞서 싸우는 문학적 응전 양식이자 이들 시가 유신 독재 정권의 폭력 정치와 구조적 모순 및 부패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략 전술의 시 또는 무기의 시로서 의도적으로 씌어졌음을 웅변해준다. 그렇지만 이 일련의 담시들이 단지 유신 폭력 정권과 맞서 싸우는 데만 초점을 두었다면 그것은 쉽게 저급한 정치 시로 떨어질 우려가 적지 않다. 「오적」 등 담시들은 치열한 정치적 상상력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우리 문학의 오랜 전통인 판소리, 탈춤, 서사민요, 사설시조, 한문 풍자 소설 및 동물 우화담 등에 담긴 구조 원리와 표현 방법을 찾아내어 예술적 상상력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함으로써 문학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그가 이른바 “해학과 골계로서 비애의 정서를 파괴하고 차단하는” 전통 민중 미학의 원리를 현대적인 정신으로 계승한 공적은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정신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전통 단절론의 극복이라는 문학사적 측면에서도 중 차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확실하다. 그의 문학적 변혁 정신이 그의 문학을 정치, 사회, 현실로 뛰어들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면, 거꾸로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혁명 정신이 그것을 다시 문학 속으로 삼투시켜 들어가게 함으로써 마침내 정치와 문학, 투쟁과 예술을 함께 꿰뚫어낼 수 있게 된 점에 그의 문학의 역동적 의의가 놓인다.

시집 『애린』 1, 2권은 전체가 하나의 연작으로 맞물리면서 온갖 역경과 장애를 뚫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중생들의 구체적 삶을 통해서 삶의 실체와 진정한 자아 그리고 생명의 실상을 탐색하는 순례의 역정 또는 구도 시집의 성격을 지닌다. 즉, 시의 서정적 자아가 현실을 헤치면서 진정한 자아의 본성, 생명의 실상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송나라 廓庵 선사의 「尋牛圖」, 즉 소를 찾아 헤매면서 修心見性하는 모습과 병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우, 즉 진정한 자아 또는 생명의 실상을 찾아 떠나 헤매지만 결국 入泥入水, 즉 삶의 생생한 현장과 그 실재 속에 바로 그러한 진정한 자아와 생명의 실상이 놓여 있는 것임을 깨닫고 그곳으로 돌아온다는 圓成의 내용이 심우도의 연작시 형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마치 만해가 일제 강점 아래의 궁핍한 삶 속에서 『님의 침묵』을 쓴 것처럼, 김지하도 이 시대 고통받는 수많은 삶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자아와 생명의 실상을 생생하게 찾아보고자 『애린』을 쓴 것이다. 이 점에서 『애린』은 김지하의 시적 역정에서는 중요한 전환의 의미를 지닌다. 『애린』 그리고 『검은 산 하얀 방』에 와서 김지하는 『황토』로부터 『타는 목마름으로』까지 주류를 이루던 이념 지향적인 모습을 감성 지향적으로, 외향적인 것을 내향적으로, 대립적인 것을 통일적인 것으로 전환을 이루어감으로써 내면성, 철학적 사상성의 깊이를 획득해 가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투쟁의 시, 무기의 시로부터 통일의 시, 사랑의 시로의 전환이자 개척과 도전으로서 서양적 세계관이 화해와 순응이라는 동양적 세계관으로 함께 녹아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하겠다.

1989년에 발간된 시집 『별 밭을 우러르며』는 1980년대 후반 들어 『애린』에서 전환기에 접어든 김지하 서정시가 새로운 출발을 암중모색하고 있는 과도기적 모습을 역력히 보여준다. 한마디로 『별 밭을 우러르며』는 `겨울'과 `밤'이 상징하는 절망과 죽음의 은둔을 넘어서서 새 삶, 새 생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부활에 대한 갈망과 새봄에 대한 기다림이 결 고운 서정으로 펼쳐져 있다.

생명
한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얼어붙을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줄기 희망이다.

──「생명」 전문

생명에서는 `겨울'과 `벼랑'이 표상 하는 생명의 아픔과 슬픔이 절망과 희망의 뒤채임으로 형상화돼 있다. 오로지 겨울과 밤, 그리고 벼랑의 현실 속에서 생명의 별빛만을 희망의 표상으로 우러르고 있는 것이다.

20여 년에 걸친 오랜 그의 시적 역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황토』는 피 튀기는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오전의 시학'이고 「오적」 등 담시는 독재 정권과 전면전을 펼치는 `정오의 시학'이며, 『타는 목마름으로』와 『남』은 지친 투사가 사력을 다해 싸우면서 새 세계를 모색하는 `하오의 시학'이라 하겠다. 또한 『애린』과 『검은 산 하얀 방』은 저물 무렵 들판을 방황하면서 삶의 의미와 眞我의 실상을 찾아 헤매는 `석양의 시학'이고, 『별 밭을 우러르며』가 겨울밤에 웅크린 채 새봄의 빛을 갈망하는 `한밤의 시' 또는 `인동의 시학'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새 시집 『중심의 괴로움』은 바로 앞에서의 이러한 길고 오랜 싸움과 처절한 내성 및 인동의 견딤을 통해 도달한 김지하 시정신이 새롭게 펼쳐가기 시작한 새봄의 시, 또는 부활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간의 길고 오랜 수난과 고통의 무게로 달구어지고 인내와 갈망의 깊이로 벼리어진 초록빛 새봄의 시, 부활한 새 생명의 시이기에 그 빛이 찬연하고 깊이가 황홀한 것이다. 그만큼 겨울이 깊고 고통스러웠기에 새봄이 아름답고 새 생명이 값지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생명이란 말은 자타가 공인하듯이 김지하 문학으로 들어가는 열쇠어로서 그 문학을 관류하는 주제어이자 마지막 도달점에 놓여 있는 이상적 목표에 해당된다. 그만큼 생명과 그에 대한 공경 및 사랑은 김지하 문학 전체의 주제이자 핵심을 이루며 전개된다. 특히 이번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서는 생명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세상의 제1가치로 존중하는 생각으로서 생명 사상이 아름다운 시의 무늬 결을 이루고 있어서 주목을 환기한다. 그 간의 오랜 겨울 의식과 어둠을 떨치고 새봄을 맞이하는 생명 의식과 부활 의지가 새삼 돋보이기 때문이다.

김지하에게 있어 생명은 시간·공간적으로 유기적 공동체를 형성해 가며 무한히 질적 확산을 계속하는 특성을 지닌다. 말하자면 개체는 현상적 소멸과 생성을 되풀이하지만 본성으로서의 불성은 영원·무궁한 것이라는 불교적 인식의 한 반영이며, 기독교의 영생사상이나 또 동학에서의 불연기연에 바탕을 둔 한울님 사상과 연결되는 내용이라 하겠다. “사람은 영생/사람은 무궁이라고”나 “아 무궁//나는 끝없이 죽으며/죽지 않는 삶” 속에는 바로 이러한 생명 공동체 사상으로서 김지하의 생명과 내지 생명 적 존재론이 깔려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영생과 무궁을 인정하게 될 때 인간은 `두려움'이 없이 “오늘/풀 한 포기를 사랑하리라/나를 사랑하리”라고 다짐하게 될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이른바 생명사상으로서의 相生의 원리와 공경의 원리가 아름답게 형상화돼 있다. “벚꽃 지는 걸 보니/푸른 솔이 좋아/푸른 솔 좋아하다 보니/벚꽃마저 좋아”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세상만물은 일체적인 생명을 지니며 그 생명은 세상에서 원본이고 유일 본이라는 점에서 절대 가치로서 무한 가치를 지닌다. 이른바 `한울님'을 지닌 성스러운 존재이기에 모든 존재는 서로 살리고 살려주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평등의 원리이자 상생의 원리라고 할 것이다. 불연기연의 원리, 즉 늘푸른 솔로서 상록수가 값있는 것은 잎이 피고 지는 나무로서 낙엽수가 더불어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세상만물은 절대적인 존대이자 동시에 상대적 존재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공경해 줄 때 비로소 그 생명의 본성이 실현되고 가치가 빛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서로 공경하고 이처럼 살고자 하는 의지로서 생명의 본성을 존중하고 서로 찬양함으로써 생명을 더욱 생명답게 살려가고자 하는 생각의 체계를 우리는 생명사상이라고 불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경의 정신에 바탕을 둔 상생의 원리를 벚꽃과 푸른 솔의 비유로서 탁월하게 형상화할 수 있게 된 데서 김지하 생명사상이 그 빛나는 문학적 승리를 거두고 있음을 우리는, 비로소, 뜨겁게, 확인할 수 있다. 「새봄」 연작에 이르러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현상과 본질을 체계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형상화함으로써 마침내 `부활의 시학', `생명의 시학'을 성취해 낼 수 있게 된 데서 김지하의 오늘의 문학이 빛을 발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으로서 생명을 있게 하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근원적인 힘은 과연 무엇인가? 김지하의 시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힘은 바로 사랑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김지하의 생명 시학에서 그 근원이자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사랑의 온전한 실천은 바로 생명 시학의 시작이자 그 이상적 목표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시를 `사랑의 철학'이라고 불러볼 수 있으리라. 그만큼 사랑은 김지하 시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타난다. 먼저 그의 시에서 삶이란 바로 사랑하고자 함, 즉 생명 본능과 의지로서 제시된다.

꽃 피어도
나비
오지 않는다

봄의 적막이
속에 든다

춥고
외로와
사랑하고저 하나
내밀어 볼

없다

온 마음
맨몸이 죽도록
거리를 걷는다
피투성이로 걷는다
사랑하고저.
──「사랑」 전문

생명이란 무엇이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살아 있음 그 자체이며 살고자 하는 의지와 꿈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살고자 하는 본능과 살아 있음의 꿈으로서 생명 의지를 지닌다. 그러기에 생명 본능과 의지는 생명의 기본 속성이자 존재 원리에 해당한다. 인용 시에는 이러한 생명 의지가 바로 `사랑하고저' 하는 사랑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춥고/외로와/사랑하고저 하나”라는 구절 속에는 사랑이 삶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따뜻한 熱源이자 외로움을 극복시켜 주는 원동력이라는 점이 제시돼 있다. 따라서 “온 마음/맨몸이 죽도록/거리를 걷는다/피투성이로 걷는다/사랑하고저”와 같이 피투성이 되도록 살고자 하는 생명 의지가 바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랑 의지와 등가를 이루게 된다. 실상 사랑을 의미하는 서양 말 AMOR의 어원이 A+MOR, 즉 `죽음에 대한 항거', 다시 말해 살려고 하는 생명 의지를 뜻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만큼 사랑은 생명의 존재 원리이자 구성 법칙이고 실현 목표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사랑은 생명 운동을 통해서 無를 존재로 이끌어 올리는 창조적 에너지로서 작용한다.

공허하므로 움직인다//시장해서/나/너를 사랑했노라//땅위의 풀과 벌레/거리의 이웃들/해와 달, 별과 구름 모두 다/모두 다 죽어 가는 이 한낮//내 속에/텅 빈속에/바람처럼 움트는/웬 첫사랑 우주사랑/그 새 뿔음을/본다/공허하므로/공허하므로 움직인다.
──「無」 전문

빈가지/꽃샘에 흔들릴 때//빈가지/꽃눈 튼다//매연의 거리에 내리는/봄눈//천지의 향기//술 한잔 마련 없는/내 삶에 한 줄기/물오르는 소리//사랑 움트는 소리//이 봄엔/우주 안에서/우주 만나라//떠나라.
──「빈가지」 전문

이 두 편의 시에는 無가 존재로 전환되는 모습이 제시돼 있다. 먼저 「無」에서 존재가 공허하므로 움직이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시의 화자는 “시장해서/나/너를/사랑했노라”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텅 빈속에서, 즉 虛와 無에서 “바람처럼 움트는/웬 첫사랑 우주사랑”과 같이 존재가, 사랑이 탄생한다. 허와 무가 존재로 전환되는 일, 즉 생명 탄생에서 운동성으로서 사랑의 원리가 작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움튼 첫사랑·우주사랑으로서 새 생명은 “그 새 뿔음을/본다”처럼 강렬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무가 이른바 사르트르의 개념대로 `무의 통과 과정'을 거쳐 존재 화하는 데엔 생명의 씨앗이 뿌려져야 하고 생명이 싹트고 자랄 수 있는 원천으로서 사랑의 힘이 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는 무와 존재의 변증법, 또는 생명 운동의 변증 작용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으리라. 이 생명 운동의 변증법적 원천과 에너지가 바로 사랑의 원리이고 그 힘인 것이다.

생명이란 無極에서 太極이 움직인다는 원리, 즉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하며 쉴새없이 움직이는 운동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므로 생명은 바로 운동이고 노동이며 순환의 원리를 지닌다. 그렇다면 생명의 운동력과 순환 원리에 촉매이자 힘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이 점에서 사랑은 생명 운동의 원천이자 존재 원리이며 힘 그 자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김지하 식으로 말해서, `일하는 한울님'의 모습이 생명의 실상이자 바로 사랑의 원리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생명의 법칙으로서 상호 공경의 원리를 그 핵심 요체이자 지배 요소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도 실상은 모든 사람이 `법'과 `성'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 이외에 더 무엇을 뜻하겠는가. 또한 사랑이란 모든 생명의 시 원에서 시작되어 생명을 빚어내고, 다시 이것을 확산하여 우주로 확대해 감으로써 불생불멸의 생명을 지니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됨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씨앗이 나서 싹트고, 꽃피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고, 이것이 썩어 다시 씨앗이 되게 하는 순환 원리에 촉매가 되고 근원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생명은 바로 사랑이고, 사랑이 바로 생명 그 자체의 본성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랑은 씨앗 하나에서 초원이 자랄 수 있게 하고, 열매 하나에서 우주가 열릴 수 있게 하는 모든 생명력의 비밀스런 열쇠이자 그것을 완성해 주는 우주 에너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 김지하 시를 우리는 `사랑의 철학' 또는 `공경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 있으리라.

자유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자유란 외적 강제나 속박을 받지 않고 자신의 법칙이나 자발성, 주체성에 의해 행동할 수 있는 원리를 말한다. 실상 김지하가 오랜 세월 독재 정권과 온몸을 바쳐 싸워온 것도 바로 이 자유를 얻기 위한 고통스럽고 끈질긴 투쟁에 다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심의 괴로움』에서는 오랜 세월 고독하게 전개되던 정치적, 사회적 자유권을 쟁취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이 아니라, 자연성의 법칙 또는 철학성의 법칙으로서 내면적 자유의 본성이 추구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무엇보다도 김지하의 시에는 새로이 `틈의 시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열림 지향성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사실 그 동안 김지하는 “틈을 열고 그 틈을 통해서 생명의 밥을 약탈하고 독점하는” “악마의 틈”에 대해서 “민중의 틈 또는 생명의 틈”(「나는 밥이다」 부분)을 강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생명의 틈이라는 해방적 자유가 이번 시집에서 `틈의 시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틈」은 갇힘에서 열림 또는 닫힘에서 트임을 통해서 틈이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꼭 필요한 공간임을 제시한다. 아파트에 사이가 있기에 그 빈틈으로 꽃샘바람이 불고 나무가 자라날 수 있다. “갇힌 삶에도/봄 오는 것은/빈 틈 때문”과 같이 열림과 트임을 위해서 `사이'와 `틈'은 불가결한 공간이다. 실상 사물과 사물 사이에 틈이 없다면 어떻게 새 생명이 움트고 새싹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 “사람은 틈”이며 “새 일은 늘/틈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이/틈'이란 존재의 개별성과 생명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자유의 공간, 생성의 공간이자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존재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사이/틈'의 중요성이 놓이며, 김지하의 시를 `사이/틈'의 시학이라고도 불러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러한 `흰 빛/육 탈의 시학'과 `사이/틈의 시학'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그것을 우리는 자유사상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투명함과 가벼움 그리고 비움과 사이/틈이란 바로 지상의 온갖 구속과 억압 그리고 육신의 무게를 벗어나서 정신의 자유를 획득하고 확보하고자 하는 열린 노력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실상 이러한 자유사상이야말로 김지하의 문학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관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어왔다. 다만 1970, 80년대 김지하의 자유가 반 독재 민주화 투쟁이 뜻하는 정치 사회적 자유의 범주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음에 비추어, 1990년대 들어서서 특히 『중심의 괴로움』에 이르러서는 현저히 자연성의 법칙 및 정신의 자유로서 철학성의 법칙으로 관심이 확대, 심화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성의 자유란 말 그대로 모든 사물이 그 자연적 본성에 따라서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모습을 의미한다. 또한 철학성의 법칙이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온갖 내면적인 정신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철학성의 법칙으로서의 자유 사상이 구현돼 있다. 그만큼 김지하 시의 주된 관심이 자연성의 자유, 철학성의 자유에 집중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김지하의 시에서 자유란 사랑과 함께 생명을 싹트게 하고 자라게 하며 개화하고 결실을 맺게 하는 근원적인 원리로서의 본질적 의미를 지닌다. 자유사상이야말로, 자유와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 원리이자 법칙으로서 생명을 생명답게 하고 사랑을 사랑으로 완성해 가게 하는 근본 동력으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김지하 시의 근본 뼈대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내 몸 속에/하루 종일/해와 달이 돌고//너와 나/헤어진 거리/어두운 뒷골목에도/술잔 속에/푸른 별 뜬다//오너라/그리운 사람아/오늘 여기/상처받은 채 상처받은 채/우주를/살자.
──「살자」 부분

무궁한 나의 삶//내 귓속에/핏줄 속에 울리는/우주의 시간//나 한때/잎새였다//지금도/가끔은 잎새//잊었는가/잎새가 나를 먹이고/물방울 이 나를 키우고/새 들이 나를 기르는 것
──「나 한때」 부분

살아 있음은/우주로 살아 있음//빈방에/우주 있다//삼라만상 모두/홀로 함께 살아 뜀뛴다.
──「살아 있다」 부분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하나의 우주 또는 우주를 간직하고 있으며, 살아 있음이란 바로 우주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이 모든 생명 나아가서 삼라만상들은 모두가 독자적인 개체이면서도 더 큰 우주적 유기체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모든 유기체들은 동학의 기본 교리인 `內有神靈 外有氣化'에 따라 스스로의 존재 속에 신성한 생명(한울)을 모시고 있기에 존중받아야 하며,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이 신성한 한울의 힘을 밖으로 확대시켜 전 우주적 존재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여기에 관해서는 정효구의 『우주 공동체와 문학의 길』(시와 시학 사, 1994)이라는 좋은 글이 있다). 아울러 여기에서 생명의 가치를 최우선의 것으로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생명 공동체 내지 우주 공동체 사상으로서 김지하의 `생명 공동체 시학'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 현실이란 과연 어떠한가? 인간들이 만드는 역사란 항상 이상적인 삶으로서 인간다운 삶의 건설을 목표로 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은 온갖 이기적 탐욕으로 인해 차별, 수탈, 억압, 침략 등 온갖 폭력이 난무한다. 또한 인간들의 지혜로 발전시켜 온 온갖 과학문명의 발전도 마침내는 과도한 경쟁과 탐욕으로 말미암아 인간 세계, 나아가서는 생명 공동체로서 지구와 우주까지도 파괴하고 멸망시킬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지구를 뒤덮는 환경 오염과 공해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점에서 김지하가 강조하는 생명 공동체 사상 또는 우주 공동체 사상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그에 의하면 개인과 사회, 인간과 생물, 생물과 자연, 우주 삼라만상은 하나의 통일적 유기적인 생명체로서 전 우주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따라서 우주 삼라만상을 포함하여 인간 생명은 모두가 생명의 생명다움을 회복하는 일, 즉 완전한 해방 또는 주인 되는 일을 통하여 진정한 생명 성을 회복하고 확보해 가야만 한다고 한다. 그가 오랜 세월 독재 정권과 피나는 싸움을 전개한 것도 사실은 정권 자체의 부당성, 부도덕성보다는 그것이 인간 생명을 억압하는 반 생명적, 반인간적 폭력의 표상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오늘날 그가 전개하고 있는 공해 추방 운동 또는 환경 보호 운동도 실은 반 생명, 반 인간, 반 우주 역사적인 것들에 대한 고단한 싸움에 해당한다. 바로 그것이다! 김지하 문학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전개해 온 것은 바로 생명 사랑, 인간사랑, 자유 사랑의 길로서 생명 공동체 사상 및 우주 공동체 시학의 정립임이 분명하다. 그가 감옥에서 창 틈에 날아온 씨앗 하나에서 초원이 자라는 이치를 보고 생명의 지고지순함을 깨달은 것도, 물방울 하나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생명 사랑이 바로 인간 사랑의 길이고 자유 사랑의 길이며 나아가서 온 삼라만상에 대한 사랑이며 우주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서 생명 공동체 사상의 반영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우주 공동체 사상이란 바로 생명 공동체로서 생명 우주·우주 생명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철학이며, 이 점에서 트임의 사상, 열림 또는 살림의 사상으로서 자유사상의 실현이라고 할 것이다. 삼라만상이 나고 자라서 죽는 모든 과정에 전 우주 생명이 함께 참여한다는 우주 공동체 사상이야말로 생명 사랑, 인간사랑, 자유 사랑으로서 김지하 문학의 대 주제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김지하의 시에 상 생 주의에 기반한 대 긍정의 철학 또는 영원 사상이 제시됨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김지하의 생명 사상은 사랑의 철학 및 자유 사상과 서로 길 항하고 상 생 하면서 우주 공동체로서 생명 공동체 사상으로 확대되어 간 데서 그 총체적 의미가 드러난다. 씨앗(생명)이 열려(자유) 싹트고 꽃피고 열매(사랑)맺지만, 다시 열매가 둥근 씨앗 되어 우주 생명·생명 우주로 확대되어 가는 그 이치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김지하의 시를 `생명 우주의 시학', `우주 생명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 있으리라. 결국 김지하의 새로운 시적 출발은 생명 사랑, 인간사랑, 자유 사랑으로서 생명 공동체 사상 또는 우주 공동체 시학을 형성한 데서 다시 시작된다. 둥근 씨앗 하나에서 우주의 원을 보고, 풀잎 하나가 우주를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생명 존중 사상을 바탕으로 생명의 무궁무진한 질적 확산과 진화를 신뢰하고 기대하는 낙관적인 우주 공동체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여전히 괴롭고 힘든 것, “봄에/가만 보니/꽃대가 흔들린다//흙 밑으로부터/밀고 올라오던 치열한/중심의 힘//꽃피어/퍼지려/사방으로 흩어지려//괴롭다/흔들린다//나도 흔들린다”(「중심의 괴로움」)와 같이 생명을 싹틔우고, 자라게 하고, 꽃피워 열매맺는 일, 그리고 다시 열매가 씨앗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일은 온몸을 담보할 만큼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라! 생명이 싹트고 꽃피고 열매맺는 일만큼 더 아름답고 위대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에게 살고자 하는 생명의 본성을 지켜주고 살아 있음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사실 시 쓰는 일이란 김지하 자신의 말대로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수정하는 것/쓰면서/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을 한 줄기 희망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업보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찌 보면 김지하의 최근 시편들은 일견 너무나도 평범한 듯이 보인다. 예외도 있지만 평범한 내용과 소박한 표현이 그렇고 비교적 간결한 시 형태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 정도의 시는 누구라도 쓸 수 있지 않은가 할 정도로 단순하고 평이하다. 역설 이외에 난삽한 비유나 현학적인 몸짓이 거의 없다. 이것은 난해 시나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비판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다 쓸 수 있고 또 누구든지 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있는 그런 시가 김지하 서정시의 참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시는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넓이와 깊이 그리고 무게가 담보돼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살인적인 고문과 감금, 지옥 같은 감옥 체험으로 단근질한 한과 고통의 무게가 실려 있으며, 오랜 형벌의 세월에서 인간적 외로움으로 벼려진 생명에 대한 그리움 및 인간에 대한 신뢰가 황금 결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의 풀잎 하나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 있고 물방울 하나에 지구가 비치고 우주가 어려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오랜 폭압의 세월 속에서 시의 풀잎 하나로 폭력 정권의 강철 어둠을 뚫어내고 이 땅에 역사의 새봄·새 아침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한 김지하, 겨울이 깊고, 어두웠기에 봄의 꽃이 찬란하고 어둠이 깊고 아팠기에 새봄, 시의 햇살이 눈부시다. 그러면 이제부터 김지하는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 역사의 짐이 가벼워지고, 정치적 투쟁이 사라진 뒤의 중심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이 깊은 공 허와 적막을 어떻게 이겨내고 참 시인의 길을 갈 것인가? 이제 김지하의 시적 역정은 `새봄·새 아침'으로서 제2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현대 문학 사상 중요 시인으로 우뚝 서 있지만 앞으로도 더욱 큰 시인으로 자리잡아 가길 희망한다. 단순히 완제품 사상이나 이념을 시로 옮겨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나 이념 그 자체가 시가 아니듯이 큰 시는 큰 시로서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큰 문학으로서의 길이란 투쟁을 위한 투쟁이나 사상으로서의 사상을 위한 길이 아니라 보다 문학의 근본에 더욱 충실하는 일이다. 그것이 다양한 장르 파괴와 실험, 부정과 반역을 통해 다시 한번 문학의 지평을 확대하고 심화해 가는 일을 의미한다. 시,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평론, 시나리오 등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장르 확산과 파괴 및 실험을 통해서 본격적인 큰 문학 운동을 전개해 가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이 불가능의 끝에서 천부적인 반역의 시인이자 자유의 시인으로서 생명 사랑의 시인으로서 그가 한국 문학과 현실에 충격과 감동을 던져 주는 큰 문학의 큰길을 열어 젖혀 갈 것을 기대한다.(퍼온글)

시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더듬어 봤고, 문학의 한 장르로서 시가 우리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문화적 가치가 있었다. 특히 김지하 시인과 생명사상으로의 변함없는 구현이 있었음을 알았다. 시를 쓰는 자세 역시 훌륭한 글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자세부터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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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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