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의 시 두 편

2002.12.26 08:53

길버트 한 조회 수:426 추천:8

폭포(瀑布)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한량의 물줄기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전문.
이 시의 특징은 떨어지는 폭포수에 있다. 곧은 절개가 비단 푸른 소나무에만 한정되겠는가. 떨어지는 것은 멈출 수가 없다. 또한 떨어지는 곳의 지형적 한계이다. 비뚤어 질 수 없는 것, 곧은 수직적 대상에 대한 상징성이다. 시각적 상징성이 떨어지는 물에 있다면 소리는 감각적이며 그 폭포에서 소리는 부서짐이다. 부서지는 것은 무한적일 수도 있다. 없다는 의미와 들리는 소리의 들림 사이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 그 곳에 시인의 마음이 있다. 부정적 현실이 간격에 서 있다면 타협하지 않는 의지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에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풀> 전문.
김수영의 <풀>을 읽으며 시인이 이 글을 생각할 때 풀 속에는 누군가 있다고 봤다. 풀 속에서 눕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하면서 풀잎들의 나부끼며 울음도 운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시가 굉장히 난해한 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시인은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한 것일까? 기본적인 상황제시는 풀에 있다. 풀이란 하나의 객체가 아니고 군상을 이루고 있을 때의 풀이다. 풀숲인 것이다. 그러면서 동작을 나타낸다. 눕고, 울고, 또 눕고, 일어나며, 운다. 연속된 동작의 반복이 주는 리듬이다. 이 시는 시대적 배경이 암울하다는 것에서 풀은 민초의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이 시를 썼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복잡한 시인의 마음을 풀로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수영의 문학사적 의미를 정리해 보면 김수영은 초기시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도덕적인 긍정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민중시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술적으로 원숙해지고 예민한 정치적 감각이 도처에서 번뜩이고 있다는 것과 시 자체의 어떤 본질적인 발전을 찾기는 어려워도 문학에 있어서 어떤 이념을 정립하는 데 공헌 한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김수영은 신동엽과 더불어 60년대의 한국시에 있어 쌍두(雙頭) 마차로 평가된다.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신동엽에 비해, 그는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에 가담하였다. 그러한 맥락 위에 놓인 작품이 바로 '풀'이다. 이 작품에서 보인 민중에 대한 인식은 이후 이성부, 이시영, 조태일, 정희성 등으로 이어지는 70년대 민중 문학의 기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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