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어둠의 산조
2002.11.19 11:04
꽃의 산조.
이승하, 박태일, 이영진의 근작 시 세계에서 꽃은 대지의 램프이며 대지의 생명의 재질이 식물의 줄기를 통해 피워낸 불빛이 꽃이다. 꽃은 대지의 심연에 응축된 생명성의 찬연한 현시이며 정점이다. 개화와 함께 우주의 생명적 기운의 묘접(妙接)의 산물이다. 꽃의 내밀한 심연은 아득한 우주적 깊이로 열려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실존하는 꽃의 실체를 통해 그 속의 은밀한 내성의 울림에 기울이고 이를 언어로 재현하고자 한다. 현존하는 꽃에 대한 노래이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시, 공간적인 비밀스런 교감의 질서에 대한 꿈꾸기이다. 꽃은 노래하는 시인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며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성격에 따라 꽃은 서로 다른 빛깔로 채색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인들의 섬세한 운명의 빛깔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승하의 시세계에서 꽃은 찰나적인 생명에 대한 허무와 공포의 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죽음과의 처연한 싸움이 이토록 패배적으로 기운 것은 그의 가족사와 사회사적인 주변 정황이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위눌려 잇기 때문이다. 소멸하는 꽃으로 표상되는 생명의 노래는 오늘날 급박한 속도로 치달리는 시간의 회로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찰나적 실존을 아프게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박태일의 시세계에서 꽃은 존재와 비 존재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누가 모르나 봄 한철
벌통에 애벌 들고 땅 밑 사람 드는 일
삼월 건너 사월 붉게 내려앉은 등성이마다
앞서 묻힌 이들이 기어 나와
시름시름 배꽃 멍석을 편다. -<배꽃> 전문
태연히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하겠다며 주의를 모은다. 생명의 시간은 순환하는 동심원의 형상을 띠기 때문에, 그가 인식하는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수렴과 확산의 통로이다. 현존하는 꽃의 실체를 통해 자유롭게 깊은 추억의 여행길을 떠난다.
이영진의 꽃은 열혈의 80년대를 관통하면서 생긴 상처 난 몸에서 피어나고 있다. 시간은 일회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 퇴적되어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생성시키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몸의 "휴어가 환한 분꽃"<장성역>으로 피어난 시점에서 시인은 이제 "하늘을 헤아리지 않아도" "임종하는 법"과 "바람이 스쳐 가는 인연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진 시인에게 과거의 시간은 늘 현재의 어둠의 길을 따스하게 밝히는 내장된 빛의 입자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은 이상이다. 꽃은 대지와 천상에서 전 방위적으로 운동하는 생명의 기운들의 내밀한 묘합(妙合)의 결정체이다. 이 세 시인의 꽃의 노래에 귀기울이는 일은 현재의 삶의 지평 속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서로 다른 삶의 산조를 감상하는 일이다. 꽃은 각각 그들의 세계에 대한 시, 공간적 질서와 가치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적 이미지이다.
어둠의 주술, 신성한 적의
김정란의 시 세계에서 <스. 타. 카. 토 내 영혼>이 서랍 속의 어둠을 열어제치고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현실 원칙의 검열로부터 감금되고 거세되었던, 그래서 자신의 육체를 갖지 못한 말들의 그림자가 이제 세상 속에 존재의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1970~80년대의 억압적인 역사의 터널 속에서 광기와 이성, 영혼과 향식, "역사와 탈 역사의 꼭 가운데에서/팥죽으로 끓"(나의 詩), <다시 시작하는 나비>던 말들의 기억이 십 수 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문학적 제도의 중심 지대에 시의 집을 지은 것은 그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은 문제적 사건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부재의 주술력이 권력적인 이성의 해체와 억압된 욕망의 복권으로 요약되는 199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타고 넘으면서 돌파해낸 결과물로 해석된다.
적멸의 안과 밖
이상호의 <뉴욕 드라큘라>와 최승호의 <눈사람>이 시적 주제 의식은 제각각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이냐 하는 실존적 선택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딸이 나갈 때뿐만 아니라
아들이 뉴욕 밤거리를 나가도
겁이 난다
선글라스를 쓰고 눈초리를 감춘다
쳐다보면 안돼
권총하나
(......)
뉴욕에서는
두려워요 어머니 내가 어디서 총탄에 죽음을 당할지
그 두려움을 총성 같은 록음악으로 이겨요
아버지 레논이 저격 당한 아파트 앞길
아들 레논은 어머니 오노의 비명을 반주한다 -<뉴욕 드라큘라>
이 시는 청각적 이미지를 절묘하게 끌어들여서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삶의 세계가 죽음의 소리에 압도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상호에게 외부세계는 인간 생명을 붕괴시키는 횡포적인 대상으로 파악된다.
눈사람이 녹는다는 것은
눈사람이 불탄다는 것,
불탄다는 것은
눈사람이 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재가 물이다
하얀 재
더 희어질 수 없는 재가 물이다
시냇물
하얀 재 흐른다
눈사람들이 둥둥둥 물 북을 치며
강으로 바다로 은하수로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 -<눈사람의 길> 전문
거대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쉼 없이 걷는 것이 우주의 삼라만상의 숙명이라는 전언이다. 생명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탄생하는 이치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거대한 순환원리에서 이해하면 죽음이란 삶의 허물벗기이고 탄생이란 삶의 허물 입기이다.
인간실존은 현상적으로 유한하고 구체적인 현 사실로서의 존재자와, 이를 해체하여 경이로운 가능성의 영역으로 도약한 영원성의 존재자의 중간 지점에 잇다. 영원성의 존재자란 인간 삶의 현존을 외부의 심미적, 종교적 준칙과 관련시켜 열어놓은 무한한 가능태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현존성의 모든 시공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의 출구를 찾게 된다. 죽음과 종말을 행해 가는 현존재자의 삶의 언어가 주조를 이룬다.
이상호와 최승호 시인은 각각 서로 다른 위치에서 인간실존의 이편과 저편을 보여주고 있다. 적멸의 안과 밖의 세계로 지칭할 수 있는 이 양편은 인간 실존의 문제를 각기 변화하는 현상과 불변하는 본질이라는 차원에서 조망한 것이다.
그리움을 사는 언어
안도현의 시세계에서는 아련한 그리움의 정감이 배어 나온다. 그가 다듬어놓은 정교하고 섬세한 시의 무늬 결에는 그리움의 언어가 안주하는 삶의 풍경과 화음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그가 독자들에게 주는 독특한 흡인력과 친화력도 바로 여기에 잇다. 그리움의 상상력은 부재하는 것을 현존시킨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는 지난 삶의 역사, 추억의 풍경, 미지의 연인 등이 실감 있게 살아난다. 그의 시가 전하는 미적 쾌감은 일종의 부재의 감동이다.
안도현의 시세계에서 기억의 시간은 화석화된 유적이 아니라 늘 현재적 삶을 또렷하게 깨어 있도록 인도하는 중심 음으로 소생한다. 그가 지나간 삶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은 현존하는 삶의 실체를 깊이 있게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응전 양상은 직접적인 반역과 대결의지가 아니라 삶의 진정성의 복원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기다림의 역설적인 긴장과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방법 찾기에 있다. "바닷가 우체국"을 발견한 시기는 이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자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바닷가 우체국>
우체국은 그리움과 그리움, 기다림과 기다림이 교신하는 영원한 정거장이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애틋한 긴장이 지속적으로 살고 있는 집이다. 우체국의 상상력에 이르러 일단 안주의 공간을 찾은 셈이다. 그의 이러한 창작방법론이 근자에 올수록 과거, 현재, 미래형에 걸친 시간 의식의 깊은 심연에까지 육박하지 못하는 모습을 노정 시킨다. 그의 섬세하고 유려한 그리움의 언어는 우리들의 실존적인 삶의 본질을 반사시키면서 더욱 아름답고 서늘한 무늬 결을 이루어낼 것이다.
신성의 위기와 재생
고진화의 시 세계는 신화적 상상력의 지형도에 비견된다. 시 세계에 등단하는 타락한 세속의 현장에는 역설적으로 거룩한 성현(聖賢)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그에게 인간현실의 비속화의 극단은 충만한 신성의 도래를 준비하는 전재조건이다. 신화의 세계는 생명과 풍요의 원천으로서 태초의 시간이래 탈 신성화의 늪으로 추락해온 인간의 역사가 꿈꾸는 가장 대표적인 전범이다. 인간세계의 종말론적인 탕 신성화의 시대와 이에 대한 성현을 통한 생명력 재생이라는 종교적 구원론을 토대로 한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빈들> 전문
위시는 외부세계의 황량함과 그로 인한 서늘한 실존적 우수가 주조임을 이루고 있다. "희망"과 "사람"과 "내일"이 없음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무연한 태도는 빈들을 더욱 허황한 적요의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여기에서의 "빈들"은 "아무도 들려 하지"않는 버림받은 고통의 땅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 철저한 부재의 공간에서 아득하게 비치는 절대적인 "당신"의 환영을 감지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경이로운 목소리가 진공관 같은 빈들의 고요를 깬다. 행간을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함으로써, 신의 묵시적인 부재의 언어를 더욱 웅숭한 깊이로 감싸고 잇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적인 여백의 언어, 그 없음의 있음에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활동하는 무의 언어에 의해 거듭 확산되고 깊어지는 자기 조직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시인이 부단히 추구하고 잇는 것은 직선적인 초월이 아니라 타락한 세속의 정화와 갱생을 통한 현실 세계의 삶의 구원과 성화이다.
그늘 깊은 노래
박해석의 첫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어 있는가>는 40대 중반에 이르는 고단한 삶의 시련과 상처로 엮어진 간곡한 세월의 나이테이다. 그의 삶과 시의 관계상을 응축적으로 드러내준다.
술고래나 거렁뱅이나 도적놈이나 무심코 눈맞추는 별
나 같은 사람들 하늘 향해 침을 뱉는 늦은 귀가 시간
지퍼로 입을 봉한 별들이 울고 있구나
쌀뜨물같이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비목이
말뚝처럼 박혀 있는 밤하늘에 -<별을 보는 밤>
이 시의 배경은 행인들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귀가 시간"의 거리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어둠으로 뒤덮인 밤거리는 수선스럽다. 술고래, 거렁뱅이, 도적놈들도 거리로 나와 활보하기 시작한다. 지상의 어둠이 짙어지면서 낮의 일과에 지친 귀가 길의 행인들이 망연히 먼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의 별들이 지상의 어둠을 위무하고 밝혀주는 등불이 되지 못한다. "나 같은 사람들 하늘 향해 침을 뱉는"다. 희망의 출구가 봉쇄된 절망적인 세상에 대한 분노와 배반감 때문이다. 하늘이 정신적으로나마 지상의 꿈과 염원을 펼쳐주는 열린 공간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울고" 있고, "이름 없이 죽어 간 사람들의 비목"이 "쌀뜨물같이" 흩어져 잇다. 고난한 낮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에게 밤의 어둠이 평온한 안주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생활의 절망감을 더욱 참담하게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고 있다. 시인에게서 세계는 여전히 "아우슈비츠 가스실"처럼 철저히 폐쇄된 절망의 시각지대인 것이다.
길 없는 길의 시학
박세현은 길의 시인이다. <치악산>이라는 시집은 헤매듯이 길을 찾아가는 여로의 풍경이 중심을 이룬다. 1990년대는 이른바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로 자주 언급된다. 가깝게 이념의 불꽃을 향해 질주하던 80년대와 뚜렷하게 변별되는 이러한 시대인식의 저변에는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 현실이 후기 산업사회의 거대한 회로망에 완전히 나포되었음을 승인하는 허무와 좌절의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길 없는 길 달려가기
잘게 부서진 물방울 속에 환상처럼 보여지던 길
현실과 환상을 가볍게 맞바꾸면서
길 없는 길속으로 달려가기
호법 지나 영동고속도로에 내려서면
새로 길 만드는 인부들의 분주한 손놀림
없는 길을 흘끔거리며 좁은 마음을 펼쳐
길을 만들고 스스로 감읍하다
아득한 마음이
한 가닥 내 길일 줄이야 -<마음이 내 길이다>
마음으로 통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길을 간다. 길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길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침울하게 갇혀있는 상태로부터 길을 찾아 나서는 도정은 삶의 존재와 당위와의 간극이 가장 근접한 순간이다. 존재와 당위 사이의 분열이 지양되는 듯 하는 순간은 "환상처럼 보이던 길"에 가장 근접한 때이다. 시인은 이제 "현실과 환상을 가볍게 맞바꾸면서" 달려간다. 스스로 "아득한 마음이/ 한 가닥 내 길"임을 발견한다. 마음의 내면적 울림의 메아리가 길을 만든 것이며, 동시에 그 길이 불연속적인 몸과 마음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삶과 욕망과 죽음의 충동
박주택은 죽음의 세계까지 파고드는 에로스적 욕망의 언어를 섬광처럼 뿜어내고 있다. 그의 에로스적 욕망의 본능은 외부 세계의 과잉억압과 단절의 회포성에서 비롯된다. 현실 원칙의 폭력, 고통, 결핍의 삶의 욕망의 분비물을 활성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한 것이다. 그가 다채로운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노래하는 환상적인 축제의 세계는 실상 고통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현실의 질서 체계에 대한 부정과 위반의 상상력은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고통의 도정이다. 죽음의 세계야말로 현실의 삶의 지배원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때 죽음은 파괴를 파괴가 아니라 고통과 억압의 현실에 대한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죽음의 충동으로 가로 질러가는 그의 삶의 욕망은 먼저 우주적 영역으로 확산하는 원심력적 상상력을 통해 드러난다.
저 산의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한 주먹의 물방울을 그의 이마 위로 보냈다.
아침의 소나무 숲과 살을 섞은 뒤
그의 젖줄을 세차게 빨아대는 것을 느낀다.
머리 위로 잎이 돋는다.
나무가 손바닥을 흔들고 있다.
발굽으로 돌이 모여들고 둘이 열어주는 숨.
나는 나무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숲이 떨리는 것을 본다.
식물들, 그들은 한 마리의 물고기로 헤엄쳐왔다.
맨발로 반짝여 오는 산과
이슬로 받쳐들고 서 있는 나무.
나는 내 곁에 앉아 있는 아침의
등거죽을 만진다. -<아침나무 그림자가 나의 오른손 부위를 지날 무렵> 전문
시인의 상상력이 모든 우주의 정령들을 깨우고 있다. 우주의 사물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소통하고 교감한다. 식물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미분화된 신화적 세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박주택이 노래하는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의 경직된 지배 담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초월의 의미를 지닌다. 문명적인 현실계의 밖으로 아득히 거슬러 올라가 조화와 합일의 신화적 세계에 대한 꿈꾸기는 역설적으로 닫힌 현실의 억압 상황을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그가 노래한 꿈의 세계에서 느끼는 정서적 일탈과 해방감은 역으로 현실의 속박과 결핍의 모습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간월도가 소나무 숲 사이에 떠 있다
안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길이 있어
자꾸 미끄러지는 운명을 불러
그 속을 바다에 재우게 하고
달이 훤히 떠, 바다를 이루는 밤이면
섬도 몸을 열어 교교한 달빛을
쐬게 되는 것이리라.
철새들의 떼가 바다 위를
가로질러 갔다가는 다시,
제 곳으로 되돌아간다
멀리, 아이의 가족들이 간월도를 향해
하얗게 걸어가고 있다. -<간월도>
간월도의 풍경은 극락처럼 아름답고 다채롭다. 그의 육체적 에로티시즘이 도달한 환희의 세계의 한 모습이다. 그가 마련한 악마적인 세계의 종말 이후의 땅이 바로 "간월도"가 아닐까. 그가 삶의 평화와 안식의 사원에 해당하는 "간월도"에 정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닫힌 공간과 폐허 의식
이윤학의 시세계는 시간성이 휘발된 닫힌 공간의 언어이다. 그의 시적 공간은 변화와 개방성의 출구가 막혀 있다. 그의 시에서 과거는 경험된 현재이며 망각된 미래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입체 속에 정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적 삶을 이토록 폐쇄적인 무 시간성의 공간 속에 감금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단한 기억의 상처이다. 세 권에 걸친 그의 시집은 공통적으로 고통스런 기억의 흡반으로 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폐허와 비관의 정조 속에 갇혀 있다. 그의 자신과 세계의 실체에 대한 시적 인식은 한결같이 어두운 기억의 범주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창문은 서쪽으로 나 있다. 떠나려는 노을이
붉어지는 집, 창문에
거꾸로 씌어진 글씨를 읽는다.
먼지의 집, 창문 안엔 멎은 지 오랜
벽시계가 걸려 있다. 엎어놓고 간
귀떨어진 대접들이 있다. 빈병에도
채워지는 먼지가 있다. 세월은 먼지를 먹고
배부르다. 소주병의 학은 날개를 펴고 있을 뿐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병마개들 흙 속에 박혀
녹슬어가고, 덥수룩한 수염들 탁자에 둘러앉아
기침을 한다, 목을 적신다.
별 볼일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판교리8 -먼지의 집>
시적 화자는 "벽시계" "대접" "빈병" 등이 헝클어진 어둡고 음침한 폐가를 찾아온다. 화자가 과거에 살았던 곳으로 여겨지는 이곳은 빈 병에 채워진 자욱한 먼지만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줄 뿐, 아직 모든 기억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정적의 공간이다. "소주병의 학"이 날개만 편 채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지난 삶의 편린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정지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다른 화법으로 바꾸면, "먼지의 집"은 시적 화자에게 지난 삶의 현상들을 있었던 그대로 재현해 보이고 있다.
비극적인 세계 인식과 내성의 견인력
이대흠의 시세계는 어둡다. 마치 견고하게 쌓아놓은 황폐한 회색벽돌집들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시세계는 그의 삶의 일상성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세상을 비극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란 고통과 경락의 자리에서 움트는 것이 그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비극의 땅은 희망의 하늘과 대칭을 이루며 균형을 회복한다. 시를 읽는 일이 절망에서 희망을, 어둠에서 빛을 호흡하는 역동적인 행위에 비유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이대흠의 시세계에서 대지의 어둠은 꿈의 하늘로 열려져 있지 않다. 그는 과거의 삶이 비극적이었듯이 미래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꿈이란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유예되는 것, 영원한 부재가 그 숙명임을 이미 냉정하게 인식한 채, 삶의 길을 떠난다.
첫눈 오지 않았지만 일산 신도시 건설 현장은 겨울입니다 이 집다 지어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절망은 겨울로 서둘러 들어섭니다 바람은 차고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웁니다 합판 쪼가리며 각목을 부러뜨려 우리는 잠시 따스합니다 태양은 모닥불보다 작게 멀리서 자신의 언 손에 입김을 불고 있습니다 누구도 태양이 뜨거워질 날을 기다리며 쪼그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믿고 싶은 건 일당처럼 동그란 모닥불입니다(......) -<율도2>
이 작품은 비감 어린 노동자 시이지만 그러나 노동시는 아니다. 시적 주체의 측면에서는 노동자 시이지만 그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속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집 다지어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절망," 나의 노동의 성과물이 나로부터 떠나서, 나를 소외시키는 울분 앞에서도, 그러나 우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닥불을 쪼이고 있다. "누구도 태양이 뜨거워질" 그날의 벅찬 희망을 기다리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 것은 "일당"뿐인 것처럼 그들에게 노동의 소외감은 쉽게 적응해야 할 일상이 된다.
사는 게 수행이지만 땡추는
깨달음 없이 정을 친다
깰 것 다 깨지지 않았는데
정 끝이 툭 부러지고
패배가 주는 가르침이여 -<율도3>
시인은 "사는 게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정 끝이 툭 부러지"는 패배에서도 가르침을 얻는다. 삶의 일상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계속된다. 이를테면 그는 가을 들판을 향해 모든 "땀방울 단단히 익어 열매" 되는 것에 환호성을 보내기도 하고,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자아와 세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 자신이 힘겨운 노동의 과정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를 추구하는 수행의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특이한 양상이다. 오늘날 근원적인 존재론의 문제를 추적하는 많은 시인들이 현실의 갈등. 모순. 부조리 등을 화해의 방식으로 미화시켜 현실의 신비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노정 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수행의 길을 노래하기 시작한 이대흠 시인 역시 앞으로 신비주의 문학의 유혹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여백의 사유
장철문은 겨울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무성했던 나뭇잎을 모두 떨군 채 텅 빈 허공 속을 침묵으로 지키는 고졸한 겨울 나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의 시의 캔버스는 채움보다 비움, 말하기보다 보여주기의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는 선명한 색채의 구상화가 아니라 무채색의 수묵화에 가깝다. 그의 시편에서는 어디에서도 자기 주장에 대한 설명과 강조의 어사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고 기운 생동할 수 있는 창조의 여백을 열어놓는다. 그의 시의 완성은 여백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내밀한 생명의 기운의 비선형적인 활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시에서 여백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없음, 즉 활동하는 무의 산 공간인 것이다. 그에게 시적 언어의 형체는 여백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시의 창작 주체는 바로 여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과정은 그가 펼쳐놓은 섬세한 여백의 사유와 선율의 연주를 듣고 교감하는 일이 된다.
산책로 삼거리 나무 그늘 사이로
햇살 밝고
개미들 분주하다
어떤 녀석은 제 키보다 더 긴 벌레를,
제 덩치보다 큰 씨앗을 끌고 간다
아까 올라간 뚱뚱한 아주머니는
벌써 꼭대기까지 돌아 내려온다
플라타너스 높은 가지에 노랑새가 울고
하루살이는 떼지어 난다
비로자나는 쉬지 않는다
아기는 아빠 손을 놓고
아장아장 걷고
쪽찐머리 할머니가 쥘부채를 쥐고
아카시아 그늘 아래 자빵하게 서서
숨을 고른다
아카시아 푸른 가지가 장삼자락을 치켜든다 -<비로자나는 쉬지 않는다> 전문
시인의 시선은 뚜렷한 지향점을 지니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공간이나 영성스런 비로자나의 세계인 점에서는 근원 동일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삼거리 나무, 개미, 씨앗, 아주머니, 플라타너스, 노랑새, 하루살이의 제각기 분주한 움직임 모두가 쉬지 않는 "비로자나"이다. 이 점은 아기, 아빠, 할머니, 아카시아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마지막 연의 "장삼자락을 치켜"드는 주체는 비단 아카시아 가지뿐 아니라 1행에서 15행까지의 시상에 등단하는 모든 개체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승하, 박태일, 이영진의 근작 시 세계에서 꽃은 대지의 램프이며 대지의 생명의 재질이 식물의 줄기를 통해 피워낸 불빛이 꽃이다. 꽃은 대지의 심연에 응축된 생명성의 찬연한 현시이며 정점이다. 개화와 함께 우주의 생명적 기운의 묘접(妙接)의 산물이다. 꽃의 내밀한 심연은 아득한 우주적 깊이로 열려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실존하는 꽃의 실체를 통해 그 속의 은밀한 내성의 울림에 기울이고 이를 언어로 재현하고자 한다. 현존하는 꽃에 대한 노래이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시, 공간적인 비밀스런 교감의 질서에 대한 꿈꾸기이다. 꽃은 노래하는 시인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며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성격에 따라 꽃은 서로 다른 빛깔로 채색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인들의 섬세한 운명의 빛깔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승하의 시세계에서 꽃은 찰나적인 생명에 대한 허무와 공포의 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죽음과의 처연한 싸움이 이토록 패배적으로 기운 것은 그의 가족사와 사회사적인 주변 정황이 죽음에 직접적으로 가위눌려 잇기 때문이다. 소멸하는 꽃으로 표상되는 생명의 노래는 오늘날 급박한 속도로 치달리는 시간의 회로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찰나적 실존을 아프게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박태일의 시세계에서 꽃은 존재와 비 존재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누가 모르나 봄 한철
벌통에 애벌 들고 땅 밑 사람 드는 일
삼월 건너 사월 붉게 내려앉은 등성이마다
앞서 묻힌 이들이 기어 나와
시름시름 배꽃 멍석을 편다. -<배꽃> 전문
태연히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하겠다며 주의를 모은다. 생명의 시간은 순환하는 동심원의 형상을 띠기 때문에, 그가 인식하는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수렴과 확산의 통로이다. 현존하는 꽃의 실체를 통해 자유롭게 깊은 추억의 여행길을 떠난다.
이영진의 꽃은 열혈의 80년대를 관통하면서 생긴 상처 난 몸에서 피어나고 있다. 시간은 일회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 퇴적되어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생성시키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몸의 "휴어가 환한 분꽃"<장성역>으로 피어난 시점에서 시인은 이제 "하늘을 헤아리지 않아도" "임종하는 법"과 "바람이 스쳐 가는 인연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진 시인에게 과거의 시간은 늘 현재의 어둠의 길을 따스하게 밝히는 내장된 빛의 입자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은 이상이다. 꽃은 대지와 천상에서 전 방위적으로 운동하는 생명의 기운들의 내밀한 묘합(妙合)의 결정체이다. 이 세 시인의 꽃의 노래에 귀기울이는 일은 현재의 삶의 지평 속에 뿌리내리고 서 있는 서로 다른 삶의 산조를 감상하는 일이다. 꽃은 각각 그들의 세계에 대한 시, 공간적 질서와 가치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적 이미지이다.
어둠의 주술, 신성한 적의
김정란의 시 세계에서 <스. 타. 카. 토 내 영혼>이 서랍 속의 어둠을 열어제치고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현실 원칙의 검열로부터 감금되고 거세되었던, 그래서 자신의 육체를 갖지 못한 말들의 그림자가 이제 세상 속에 존재의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1970~80년대의 억압적인 역사의 터널 속에서 광기와 이성, 영혼과 향식, "역사와 탈 역사의 꼭 가운데에서/팥죽으로 끓"(나의 詩), <다시 시작하는 나비>던 말들의 기억이 십 수 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문학적 제도의 중심 지대에 시의 집을 지은 것은 그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은 문제적 사건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의 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부재의 주술력이 권력적인 이성의 해체와 억압된 욕망의 복권으로 요약되는 199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타고 넘으면서 돌파해낸 결과물로 해석된다.
적멸의 안과 밖
이상호의 <뉴욕 드라큘라>와 최승호의 <눈사람>이 시적 주제 의식은 제각각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이냐 하는 실존적 선택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딸이 나갈 때뿐만 아니라
아들이 뉴욕 밤거리를 나가도
겁이 난다
선글라스를 쓰고 눈초리를 감춘다
쳐다보면 안돼
권총하나
(......)
뉴욕에서는
두려워요 어머니 내가 어디서 총탄에 죽음을 당할지
그 두려움을 총성 같은 록음악으로 이겨요
아버지 레논이 저격 당한 아파트 앞길
아들 레논은 어머니 오노의 비명을 반주한다 -<뉴욕 드라큘라>
이 시는 청각적 이미지를 절묘하게 끌어들여서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삶의 세계가 죽음의 소리에 압도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상호에게 외부세계는 인간 생명을 붕괴시키는 횡포적인 대상으로 파악된다.
눈사람이 녹는다는 것은
눈사람이 불탄다는 것,
불탄다는 것은
눈사람이 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
재가 물이다
하얀 재
더 희어질 수 없는 재가 물이다
시냇물
하얀 재 흐른다
눈사람들이 둥둥둥 물 북을 치며
강으로 바다로 은하수로 흘러간다
흘러간다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 -<눈사람의 길> 전문
거대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쉼 없이 걷는 것이 우주의 삼라만상의 숙명이라는 전언이다. 생명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탄생하는 이치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거대한 순환원리에서 이해하면 죽음이란 삶의 허물벗기이고 탄생이란 삶의 허물 입기이다.
인간실존은 현상적으로 유한하고 구체적인 현 사실로서의 존재자와, 이를 해체하여 경이로운 가능성의 영역으로 도약한 영원성의 존재자의 중간 지점에 잇다. 영원성의 존재자란 인간 삶의 현존을 외부의 심미적, 종교적 준칙과 관련시켜 열어놓은 무한한 가능태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현존성의 모든 시공간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의 출구를 찾게 된다. 죽음과 종말을 행해 가는 현존재자의 삶의 언어가 주조를 이룬다.
이상호와 최승호 시인은 각각 서로 다른 위치에서 인간실존의 이편과 저편을 보여주고 있다. 적멸의 안과 밖의 세계로 지칭할 수 있는 이 양편은 인간 실존의 문제를 각기 변화하는 현상과 불변하는 본질이라는 차원에서 조망한 것이다.
그리움을 사는 언어
안도현의 시세계에서는 아련한 그리움의 정감이 배어 나온다. 그가 다듬어놓은 정교하고 섬세한 시의 무늬 결에는 그리움의 언어가 안주하는 삶의 풍경과 화음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그가 독자들에게 주는 독특한 흡인력과 친화력도 바로 여기에 잇다. 그리움의 상상력은 부재하는 것을 현존시킨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는 지난 삶의 역사, 추억의 풍경, 미지의 연인 등이 실감 있게 살아난다. 그의 시가 전하는 미적 쾌감은 일종의 부재의 감동이다.
안도현의 시세계에서 기억의 시간은 화석화된 유적이 아니라 늘 현재적 삶을 또렷하게 깨어 있도록 인도하는 중심 음으로 소생한다. 그가 지나간 삶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은 현존하는 삶의 실체를 깊이 있게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응전 양상은 직접적인 반역과 대결의지가 아니라 삶의 진정성의 복원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기다림의 역설적인 긴장과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방법 찾기에 있다. "바닷가 우체국"을 발견한 시기는 이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자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바닷가 우체국>
우체국은 그리움과 그리움, 기다림과 기다림이 교신하는 영원한 정거장이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애틋한 긴장이 지속적으로 살고 있는 집이다. 우체국의 상상력에 이르러 일단 안주의 공간을 찾은 셈이다. 그의 이러한 창작방법론이 근자에 올수록 과거, 현재, 미래형에 걸친 시간 의식의 깊은 심연에까지 육박하지 못하는 모습을 노정 시킨다. 그의 섬세하고 유려한 그리움의 언어는 우리들의 실존적인 삶의 본질을 반사시키면서 더욱 아름답고 서늘한 무늬 결을 이루어낼 것이다.
신성의 위기와 재생
고진화의 시 세계는 신화적 상상력의 지형도에 비견된다. 시 세계에 등단하는 타락한 세속의 현장에는 역설적으로 거룩한 성현(聖賢)의 그림자가 스며 있다. 그에게 인간현실의 비속화의 극단은 충만한 신성의 도래를 준비하는 전재조건이다. 신화의 세계는 생명과 풍요의 원천으로서 태초의 시간이래 탈 신성화의 늪으로 추락해온 인간의 역사가 꿈꾸는 가장 대표적인 전범이다. 인간세계의 종말론적인 탕 신성화의 시대와 이에 대한 성현을 통한 생명력 재생이라는 종교적 구원론을 토대로 한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빈들> 전문
위시는 외부세계의 황량함과 그로 인한 서늘한 실존적 우수가 주조임을 이루고 있다. "희망"과 "사람"과 "내일"이 없음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무연한 태도는 빈들을 더욱 허황한 적요의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여기에서의 "빈들"은 "아무도 들려 하지"않는 버림받은 고통의 땅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 철저한 부재의 공간에서 아득하게 비치는 절대적인 "당신"의 환영을 감지한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경이로운 목소리가 진공관 같은 빈들의 고요를 깬다. 행간을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함으로써, 신의 묵시적인 부재의 언어를 더욱 웅숭한 깊이로 감싸고 잇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적인 여백의 언어, 그 없음의 있음에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활동하는 무의 언어에 의해 거듭 확산되고 깊어지는 자기 조직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시인이 부단히 추구하고 잇는 것은 직선적인 초월이 아니라 타락한 세속의 정화와 갱생을 통한 현실 세계의 삶의 구원과 성화이다.
그늘 깊은 노래
박해석의 첫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어 있는가>는 40대 중반에 이르는 고단한 삶의 시련과 상처로 엮어진 간곡한 세월의 나이테이다. 그의 삶과 시의 관계상을 응축적으로 드러내준다.
술고래나 거렁뱅이나 도적놈이나 무심코 눈맞추는 별
나 같은 사람들 하늘 향해 침을 뱉는 늦은 귀가 시간
지퍼로 입을 봉한 별들이 울고 있구나
쌀뜨물같이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비목이
말뚝처럼 박혀 있는 밤하늘에 -<별을 보는 밤>
이 시의 배경은 행인들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귀가 시간"의 거리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어둠으로 뒤덮인 밤거리는 수선스럽다. 술고래, 거렁뱅이, 도적놈들도 거리로 나와 활보하기 시작한다. 지상의 어둠이 짙어지면서 낮의 일과에 지친 귀가 길의 행인들이 망연히 먼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의 별들이 지상의 어둠을 위무하고 밝혀주는 등불이 되지 못한다. "나 같은 사람들 하늘 향해 침을 뱉는"다. 희망의 출구가 봉쇄된 절망적인 세상에 대한 분노와 배반감 때문이다. 하늘이 정신적으로나마 지상의 꿈과 염원을 펼쳐주는 열린 공간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울고" 있고, "이름 없이 죽어 간 사람들의 비목"이 "쌀뜨물같이" 흩어져 잇다. 고난한 낮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에게 밤의 어둠이 평온한 안주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생활의 절망감을 더욱 참담하게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고 있다. 시인에게서 세계는 여전히 "아우슈비츠 가스실"처럼 철저히 폐쇄된 절망의 시각지대인 것이다.
길 없는 길의 시학
박세현은 길의 시인이다. <치악산>이라는 시집은 헤매듯이 길을 찾아가는 여로의 풍경이 중심을 이룬다. 1990년대는 이른바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로 자주 언급된다. 가깝게 이념의 불꽃을 향해 질주하던 80년대와 뚜렷하게 변별되는 이러한 시대인식의 저변에는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 현실이 후기 산업사회의 거대한 회로망에 완전히 나포되었음을 승인하는 허무와 좌절의 의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길 없는 길 달려가기
잘게 부서진 물방울 속에 환상처럼 보여지던 길
현실과 환상을 가볍게 맞바꾸면서
길 없는 길속으로 달려가기
호법 지나 영동고속도로에 내려서면
새로 길 만드는 인부들의 분주한 손놀림
없는 길을 흘끔거리며 좁은 마음을 펼쳐
길을 만들고 스스로 감읍하다
아득한 마음이
한 가닥 내 길일 줄이야 -<마음이 내 길이다>
마음으로 통하는 길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길을 간다. 길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길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침울하게 갇혀있는 상태로부터 길을 찾아 나서는 도정은 삶의 존재와 당위와의 간극이 가장 근접한 순간이다. 존재와 당위 사이의 분열이 지양되는 듯 하는 순간은 "환상처럼 보이던 길"에 가장 근접한 때이다. 시인은 이제 "현실과 환상을 가볍게 맞바꾸면서" 달려간다. 스스로 "아득한 마음이/ 한 가닥 내 길"임을 발견한다. 마음의 내면적 울림의 메아리가 길을 만든 것이며, 동시에 그 길이 불연속적인 몸과 마음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삶과 욕망과 죽음의 충동
박주택은 죽음의 세계까지 파고드는 에로스적 욕망의 언어를 섬광처럼 뿜어내고 있다. 그의 에로스적 욕망의 본능은 외부 세계의 과잉억압과 단절의 회포성에서 비롯된다. 현실 원칙의 폭력, 고통, 결핍의 삶의 욕망의 분비물을 활성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한 것이다. 그가 다채로운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노래하는 환상적인 축제의 세계는 실상 고통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의 현실의 질서 체계에 대한 부정과 위반의 상상력은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고통의 도정이다. 죽음의 세계야말로 현실의 삶의 지배원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때 죽음은 파괴를 파괴가 아니라 고통과 억압의 현실에 대한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죽음의 충동으로 가로 질러가는 그의 삶의 욕망은 먼저 우주적 영역으로 확산하는 원심력적 상상력을 통해 드러난다.
저 산의 짐승에게 이름을 주었다.
한 주먹의 물방울을 그의 이마 위로 보냈다.
아침의 소나무 숲과 살을 섞은 뒤
그의 젖줄을 세차게 빨아대는 것을 느낀다.
머리 위로 잎이 돋는다.
나무가 손바닥을 흔들고 있다.
발굽으로 돌이 모여들고 둘이 열어주는 숨.
나는 나무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숲이 떨리는 것을 본다.
식물들, 그들은 한 마리의 물고기로 헤엄쳐왔다.
맨발로 반짝여 오는 산과
이슬로 받쳐들고 서 있는 나무.
나는 내 곁에 앉아 있는 아침의
등거죽을 만진다. -<아침나무 그림자가 나의 오른손 부위를 지날 무렵> 전문
시인의 상상력이 모든 우주의 정령들을 깨우고 있다. 우주의 사물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소통하고 교감한다. 식물과 동물, 인간과 자연이 미분화된 신화적 세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박주택이 노래하는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의 경직된 지배 담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초월의 의미를 지닌다. 문명적인 현실계의 밖으로 아득히 거슬러 올라가 조화와 합일의 신화적 세계에 대한 꿈꾸기는 역설적으로 닫힌 현실의 억압 상황을 부정적으로 드러내는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그가 노래한 꿈의 세계에서 느끼는 정서적 일탈과 해방감은 역으로 현실의 속박과 결핍의 모습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간월도가 소나무 숲 사이에 떠 있다
안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길이 있어
자꾸 미끄러지는 운명을 불러
그 속을 바다에 재우게 하고
달이 훤히 떠, 바다를 이루는 밤이면
섬도 몸을 열어 교교한 달빛을
쐬게 되는 것이리라.
철새들의 떼가 바다 위를
가로질러 갔다가는 다시,
제 곳으로 되돌아간다
멀리, 아이의 가족들이 간월도를 향해
하얗게 걸어가고 있다. -<간월도>
간월도의 풍경은 극락처럼 아름답고 다채롭다. 그의 육체적 에로티시즘이 도달한 환희의 세계의 한 모습이다. 그가 마련한 악마적인 세계의 종말 이후의 땅이 바로 "간월도"가 아닐까. 그가 삶의 평화와 안식의 사원에 해당하는 "간월도"에 정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닫힌 공간과 폐허 의식
이윤학의 시세계는 시간성이 휘발된 닫힌 공간의 언어이다. 그의 시적 공간은 변화와 개방성의 출구가 막혀 있다. 그의 시에서 과거는 경험된 현재이며 망각된 미래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입체 속에 정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적 삶을 이토록 폐쇄적인 무 시간성의 공간 속에 감금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단한 기억의 상처이다. 세 권에 걸친 그의 시집은 공통적으로 고통스런 기억의 흡반으로 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폐허와 비관의 정조 속에 갇혀 있다. 그의 자신과 세계의 실체에 대한 시적 인식은 한결같이 어두운 기억의 범주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창문은 서쪽으로 나 있다. 떠나려는 노을이
붉어지는 집, 창문에
거꾸로 씌어진 글씨를 읽는다.
먼지의 집, 창문 안엔 멎은 지 오랜
벽시계가 걸려 있다. 엎어놓고 간
귀떨어진 대접들이 있다. 빈병에도
채워지는 먼지가 있다. 세월은 먼지를 먹고
배부르다. 소주병의 학은 날개를 펴고 있을 뿐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병마개들 흙 속에 박혀
녹슬어가고, 덥수룩한 수염들 탁자에 둘러앉아
기침을 한다, 목을 적신다.
별 볼일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판교리8 -먼지의 집>
시적 화자는 "벽시계" "대접" "빈병" 등이 헝클어진 어둡고 음침한 폐가를 찾아온다. 화자가 과거에 살았던 곳으로 여겨지는 이곳은 빈 병에 채워진 자욱한 먼지만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줄 뿐, 아직 모든 기억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정적의 공간이다. "소주병의 학"이 날개만 편 채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지난 삶의 편린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원래의 모습대로 정지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다른 화법으로 바꾸면, "먼지의 집"은 시적 화자에게 지난 삶의 현상들을 있었던 그대로 재현해 보이고 있다.
비극적인 세계 인식과 내성의 견인력
이대흠의 시세계는 어둡다. 마치 견고하게 쌓아놓은 황폐한 회색벽돌집들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시세계는 그의 삶의 일상성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세상을 비극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란 고통과 경락의 자리에서 움트는 것이 그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비극의 땅은 희망의 하늘과 대칭을 이루며 균형을 회복한다. 시를 읽는 일이 절망에서 희망을, 어둠에서 빛을 호흡하는 역동적인 행위에 비유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이대흠의 시세계에서 대지의 어둠은 꿈의 하늘로 열려져 있지 않다. 그는 과거의 삶이 비극적이었듯이 미래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꿈이란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유예되는 것, 영원한 부재가 그 숙명임을 이미 냉정하게 인식한 채, 삶의 길을 떠난다.
첫눈 오지 않았지만 일산 신도시 건설 현장은 겨울입니다 이 집다 지어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절망은 겨울로 서둘러 들어섭니다 바람은 차고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웁니다 합판 쪼가리며 각목을 부러뜨려 우리는 잠시 따스합니다 태양은 모닥불보다 작게 멀리서 자신의 언 손에 입김을 불고 있습니다 누구도 태양이 뜨거워질 날을 기다리며 쪼그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믿고 싶은 건 일당처럼 동그란 모닥불입니다(......) -<율도2>
이 작품은 비감 어린 노동자 시이지만 그러나 노동시는 아니다. 시적 주체의 측면에서는 노동자 시이지만 그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속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집 다지어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절망," 나의 노동의 성과물이 나로부터 떠나서, 나를 소외시키는 울분 앞에서도, 그러나 우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모닥불을 쪼이고 있다. "누구도 태양이 뜨거워질" 그날의 벅찬 희망을 기다리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 것은 "일당"뿐인 것처럼 그들에게 노동의 소외감은 쉽게 적응해야 할 일상이 된다.
사는 게 수행이지만 땡추는
깨달음 없이 정을 친다
깰 것 다 깨지지 않았는데
정 끝이 툭 부러지고
패배가 주는 가르침이여 -<율도3>
시인은 "사는 게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정 끝이 툭 부러지"는 패배에서도 가르침을 얻는다. 삶의 일상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계속된다. 이를테면 그는 가을 들판을 향해 모든 "땀방울 단단히 익어 열매" 되는 것에 환호성을 보내기도 하고,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전철은 나를 수행자로 만든다 )고 말하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자아와 세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 자신이 힘겨운 노동의 과정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를 추구하는 수행의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특이한 양상이다. 오늘날 근원적인 존재론의 문제를 추적하는 많은 시인들이 현실의 갈등. 모순. 부조리 등을 화해의 방식으로 미화시켜 현실의 신비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노정 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수행의 길을 노래하기 시작한 이대흠 시인 역시 앞으로 신비주의 문학의 유혹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여백의 사유
장철문은 겨울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무성했던 나뭇잎을 모두 떨군 채 텅 빈 허공 속을 침묵으로 지키는 고졸한 겨울 나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의 시의 캔버스는 채움보다 비움, 말하기보다 보여주기의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그의 시세계는 선명한 색채의 구상화가 아니라 무채색의 수묵화에 가깝다. 그의 시편에서는 어디에서도 자기 주장에 대한 설명과 강조의 어사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고 기운 생동할 수 있는 창조의 여백을 열어놓는다. 그의 시의 완성은 여백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내밀한 생명의 기운의 비선형적인 활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시에서 여백은 없음이 아니라 있음의 없음, 즉 활동하는 무의 산 공간인 것이다. 그에게 시적 언어의 형체는 여백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시의 창작 주체는 바로 여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과정은 그가 펼쳐놓은 섬세한 여백의 사유와 선율의 연주를 듣고 교감하는 일이 된다.
산책로 삼거리 나무 그늘 사이로
햇살 밝고
개미들 분주하다
어떤 녀석은 제 키보다 더 긴 벌레를,
제 덩치보다 큰 씨앗을 끌고 간다
아까 올라간 뚱뚱한 아주머니는
벌써 꼭대기까지 돌아 내려온다
플라타너스 높은 가지에 노랑새가 울고
하루살이는 떼지어 난다
비로자나는 쉬지 않는다
아기는 아빠 손을 놓고
아장아장 걷고
쪽찐머리 할머니가 쥘부채를 쥐고
아카시아 그늘 아래 자빵하게 서서
숨을 고른다
아카시아 푸른 가지가 장삼자락을 치켜든다 -<비로자나는 쉬지 않는다> 전문
시인의 시선은 뚜렷한 지향점을 지니지 않는다. 우주의 어느 공간이나 영성스런 비로자나의 세계인 점에서는 근원 동일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삼거리 나무, 개미, 씨앗, 아주머니, 플라타너스, 노랑새, 하루살이의 제각기 분주한 움직임 모두가 쉬지 않는 "비로자나"이다. 이 점은 아기, 아빠, 할머니, 아카시아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마지막 연의 "장삼자락을 치켜"드는 주체는 비단 아카시아 가지뿐 아니라 1행에서 15행까지의 시상에 등단하는 모든 개체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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