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1.14 09:55

길버트 한 조회 수:326 추천:11

이재복 문학 평론집 '몸'을 보면서 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신체의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재복의 표현하고자 하는 '몸'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제1부 '몸-클리토리스의 춤'은 여성시인들의 성 찾기와 연결되어 있다.
김혜순론의 몸과 구멍과 프랙탈의 시학에서는 시인이 <몸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고 직접 <몸으로> 노래한 시인이라는 점이 다른 시인들과 다르다. 몸과 시가 하나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몸시>를 말하는 것이다. 구멍이 몸의 존재성을 담보한다면 그녀의 몸처럼 구멍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적인 차원에서 왕성한 상실과 보충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구멍난 몸은 구멍난 언어를 생산한다. 구멍난 몸이 시속으로 들어오면서 존재의 집인 언어는 구멍난 언어 혹은 구멍난 언술이 되기에 이른다. 김혜순이 보여주는 이러한 시 쓰기를 <존재의 카니발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니발적 상상력을 통해 그녀는 존재를 가로지르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승자론의 자궁, 시투성이 피투성이에서는 시의 토대와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언술이다. 몸이 <시투성이>라는 것은 그녀 시의 토대가 몸에 있다는 것을 , 몸이 <피투성이>이라는 것은 그 몸의 성격이 치열한 실존성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시는 철저하게 몸으로 사유한 흔적의 기록이다. 그녀의 시는 곧 그녀의 몸이다. 배고픔이란 정신적인 것이나 이데아적인 것이 아닌 철저하게 생리적이고 생물적인 몸의 징후이다. 자궁은 <피투성이> 그 자체로 일종의 비극적인 세계 인식을 환기한다. 끊임없이 세계와 싸우는 증거가 광기의 언어이다. 싸움 속에서 비극성은 이미 자궁이라는 모태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자궁으로의 회귀 혹은 자궁에 대한 재현은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현실이나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형태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자궁은 죽음의 문맥을 거느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 속의 몸>을 그녀가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 몸 속의 몸이 겹을 이루고, 그 겹이 어떤 형상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집이 되는 것이다.
김언희론의 천박한 몸(Adject body)의 반란에서 <트렁크>는 몸을 상징적으로 수렴하고 잇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그 매혹은 더 커질 것이다. 트렁크로 표상되는 시체의 이미지로 <수취거부로 반송>한 존재는 상징계의 아버지의 법이 된다. 상징계의 의해 추방된 몸이 귀환하면서 그녀의 텍스트는 안정과 연속성을 토대로 하는 상징계적인 질서 체계가 해체되고, 불안정과 불연속적인 율동과 리듬이 지배하는 기호적인 코라의 세계로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그녀의 시가 상징게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상징적 재현 체계를 교란하고 파괴하려는 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방가르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선영론에서 글자 혹은 살의 노래로 일상과 몸에 대한 상상에 몸은 일상에 갇혀있다. 낮과 밤, 수면과 깨어 있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상이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정치적인 색조가 일상 속에 들어와 일정한 변화와 굴절을 겪어 그 생경함이 무디어지거나 무화되어 구체성을 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가 끌어들인 몸 속의 몸, 모보다 더 존재의 지평이 확장된 살, 상이 일상을 드러낸다고 할 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누의 소멸에서처럼 순간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정체성 찾기와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몸에 무수한 구명을 내고 그 구멍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또 싸운다. 그것은 반란이며, 그것은 클리토리스의 혁명이다.

제2부 몸-존재의 집은 몸을 통한 세계 내 존재에 대해 미학적인 탐색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들의 사유를 읽어낸 글이다.
송찬호의 시의 출발은 말이다. 말이 존재함으로써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고, 이 도구를 이용한 하나의 거대한 상징 체계는 체계에 대한 체계라는 현기증 나는 자기 증식성을 통해 <세계네 존재>로서의 <말의 집> 혹은 <언어의 집>을 지어왔던 것이다. 말이 익히 알려진 것처럼 존재 자체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말의 투명함을 강조할수록 존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더 왜곡되고 은폐된다고 할 수 있다.시인은 말을 전경화하고 있지만 그 말이 가지는 결핍된 부분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인식했으며, 그것이 몸이라는 사유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 것은 시의 현대성에 대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면 바로 이 부분에서 일 것이다. 송찬호 시의 급격한 말의 변화에 대해 단순히 말의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경우는 잘못되었다. 말로부터의 자유, 몸으로의 회귀를 욕망하는 그의 시의 새로움은 본질적으로 말의 해체와 몸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지만 그 해체가 아름다운 것은 은유적 치환 기법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 변이의 신선함 때문이다. <붉은 눈, 동백>에서 동백이 흘린 그 붉은 빛이 산경을 만나면 그 빛은 붉음을 더 강하게 드러낼 것이다.
송재학론의 풍경과 몸의 연대에서 다른 어떤 시에서보다도 시적 자아와 대상과의 자기 동일화된 정서적 교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송재학이 풍경을 몸의 연대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창출하고 잇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근대성 혹은 현대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잇다. <산유화>에 드러난 자연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시적 자아의 내면(이성과 정신에 의한 내적 논리)에 의해 재창출된 자연이다. 자연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하게 된다. 풍경과 몸의 연대는 틈(사이, 경계)이 있어야 가능하다. 인간의 몸에 구멍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이 구멍을 통해 풍경과 몸이 만나게 된다. 시적 자아는 푸른빛을 가로질러 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법이 곧 푸른빛 혹은 물이 흐르는 틈새를 발견하고 그 길을 터주는 일일 터이다. 틈이 있다는 것은 고정과 정체를 거부하고 경계의 해체와 넘어섬을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기택론의 몸, 리얼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그의 몸은 정신이 배제된 상태에서 물질의 양태로만 드러나는 몸이다. 정신이 배제된 물질만으로 존재하는 그의 몸은 첫 시집<태아의 잠> (1991) 이후 <바늘구멍 속의 폭풍>(1994)을 거쳐, 최근의 <사무원>(1999)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 경향이다. 언어로 몸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신을 배제한 채 물질성의 차원에서 몸을, 아니 물질성을 획득한 몸의 동함을 엑스레이 투시기 같은 투시력으로 자세하게 해부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첫 시집부터 시인이 동물의 몸에 민감한 자의식을 보인 것이 아닌가. 동물의 몸의 동함을 통해 드러나는 이 리얼한 생명의 형식을 토대로 하여 시인은 그것을 일정하게 변주하기도 하고 또 해체하기도 하면서 <육체의 현상학> 혹은 <물질의 현상학>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미학 세계를 구축해 온 것이다.
채호기론의 색과 욕의 미학에서 채호기의 시는 몸과 언어사이에 있다. 언어가 가지는 불완전함에 대해 생산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보충.대리>의 논리를 들어 해체한 데리다의 입장이다. 발화의 주체는 몸이되 그 발화가 모두 몸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면 언어와 몸 사이에는 단절로 인한 존재의 심연이 생기고 이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려본 사람이라면 언어와 몸 혹은 몸의 언어에 대한 천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채호기의 일련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도 바로 언어 직전의 몸, 그 몸에 의한 체화된 언어에 대한 강조이다. 몸과 언어 상이의 심연을 넘어서기 위해서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수련에게 몸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수련과 글자, 몸과 언어 사이의 경계 해체는 몰라도 최소한 몸과 언어 사이의 <겹침>내지 <스침>정도는 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유하론의 몸과 공간의 상상력에서 공간은 시적 자아와 세계가 맞부딪치는 실존의 장인 동시에 상상과 표현의 원형질을 담고 있는 그런 곳이다. 무림의 공간을 산책하면서 시인의 의식이 집중적으로 투사되고 있는 것은 영화(포르노, 엽기), 만화, 광고, 무협소설, 프로 레슬링 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기술 복제 양식에 의해 생산된 가치적인 것으로 곧바로 소비되고 마는 그런 운명을 지닌 것들이다. 압구정동이라는 공간이 <욕망의 통조림공장>으로 표현될 만큼 욕망의 정도가 크다는 것은 그 공간이 환상이 아니라 환멸로 바뀔 수 있음을 말해준다. 몸의 언어가 탄생이 가지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3부 몸-문명의 그늘은 사회. 역사적인 문맥에서 몸을 성찰하고 있는 시인들에 관한 글이다. 몸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다. 몸은 그 안에 광기와 폭력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토대를 둔 문명이 야기한 상처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김지하론의 회음부의 사상, 생명의 꽃에서 김지하의 몸은 실존적이다. 그의 몸이 어느 한 순간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무궁한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몸이 상황에 따라 생존 양식을 달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와 감각에서보다 영성과 감성에서 심화,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계기는 감옥체험이다. 신생에는 반드시 중심에 대한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단순한 언어로 명중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신생은 존재하는 것으로 시인은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도 우주삼라만상의 살아 있음에 대한 대 긍정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자신의 혼과 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하의 우주적 영성과 동양적 감성을 지닌 몸은 <지금>, <여기>에서의 실존적인 위기 상황을 비판하고 반성하게 할뿐만 아니라 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임에 틀림없다. 몸 운동은 몸 사상을 통해 그가 끊임없이 강조했듯이 죽어 있는 몸이 아니라 살아 잇는 몸을 하나의 사상에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일상(현실)의 차원에서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문재론의 마음의 오지, 느림의 언어에서 몸은 문명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생태적으로 보면 몸은 자연이다. 몸은 스스로 느끼고 지각하는 살아있는 생물, 생명체이다. 문명과 몸(자연)의 상생 내지 그 문명의 폭력 및 파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시인이 들고 나온 것은 속도이다. 문명의 가속도에 대해 가지는 시인의 부정의식이 투영된 민감한 자의식을 통해서이다. 문명의 가속도에 대한 이 부정적 자의식은 실질적인 대항 담론 형성에 중요한 동기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가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문명에 대항해 느림의 한 방식인(산책)이라는 실질적인 대안을 들고 나온다. 마음의 오지로의 탐색과 여기에서 기인하는 몸의 무위는 문명사회에서 실존하기 위한 시인의 대항담론의 성격이 강하다. 문명 속에 있으면서 그 문명 밖으로 자유롭게 떠나기도 하고 또 그 문명 속으로 자유롭게 되돌아오기도 하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은 불일이불이의 차원에서 마음과 몸을 해석함으로써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이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박노해론의 손무덤의 기치(旗幟), 부드러운 페니스의 힘에서 시인의 시에 대한 놀라움으로 받아들인 노동자라는 신분과 노동현실의 생생한 체념이라는 점은 치열하게 부딪힌 체험이 온전히 언어로 되살려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몸의 언어란 곧 언어의 몸을 말하는 것이다. <노동의 새벽>에서 박노해는 노동자의 훼손된 몸을 보여줌으로써 노동 현실의 억압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려는 시 쓰기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부드러운 페니스>라는 말이 딱딱하고 강한, 다분히 폭력적인 그러면서도 우월함을 내장한 기표였다. 페니스의 반대편에는 자궁이 놓이고 자궁의 미덕은 페니스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 이러한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페니스도 부드러울 수 잇다는 발상은 그것이 남성성뿐만 아니라 여성성도 가지고 잇다는 그런 의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남성성에 대한 반성의 형식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드러운 페니스로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려는 시인의 욕망은 그의 세계인식의 방법과 시 쓰기 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광수론의 수음과 배설의 언어에서 몸은 디오니소스의 몸과 닮아 있다. 그의 몸이 이성이나 정신보다는 감성이나 육체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은 배제와 금기의 대상으로서 이성이나 정신이 생산한 제도적인 이데올로기와 상징화된 체계에 도전하는 저항의 담론으로 존재해온 것이다. 디오니소스든 마광수든 배설을 통해 어떤 쾌감과 해방감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하느냐 혹은 간접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문제는 달라진다. 그의 시의 모토인 수음에서 <자연스러운 것>인 동시에 <자유로운 것>으로 성적인 욕구와 욕망을 억제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배설한다는 사실이다.
이승하론의 폭력과 광기의 역사에서 그의 시에서 엿보이는 고통은 누이가 제공하는 것이지만 보다 더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누이에 대한 시인의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미친 누이를 통해 시인이 들추어내려고 한 것은 피해자인 누이의 상처와 함께 그녀를 미치게 한 가해자인 아버지의 폭력성이다. 광기에 가득 찬 폭력성을 감성으로 맞서게 되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은 이성의 눈으로 보면 발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아이러니적인 양상이다. 이승하의 시가 광기와 폭력에 병든 몸을 넘어 생명의 몸을 사적(史的)으로 통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좀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 역시 누이 못지 않게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고통을 제대로 읽어낼 때 시인은 비로서 온전한 생명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연주론의 죽음 혹은 제3의 살에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속죄양 유다에다 비유하고 있다. 그녀의 죄지음은 일종의 열병과 같은 것이다. 일상적인 문맥에서 보면 상대의 <살을 핥는다>는 것은 몸을 통한 상호신체성의 극치이다. 시인의 죽음보다 무거운 병의 뿌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의식, 무의식, 전의식의 토대로 작용하는 <아버지-나-어머니>를 연결하는 삼각관계의 파탄에서 비롯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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