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음모
2005.04.26 08:44
즐거운 음모
김 세 희
학원으로 향하는 길인데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다. 발걸음이 무거워 아스팔트 길 위에 내 발자국이 새겨질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든다. 얼굴에 붙어있는 살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면, 혹은 몸 안에서 돌고 있던 피가 손끝과 발끝으로 모조리 모이는 듯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극성스럽다 못해 사람을 옥죄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강요하는 원장님의 성화를 오늘은 또 어떻게 견뎌야 될지 막막하다.
“오늘도 수업 끝나기 전에 꼭 쪽지시험 보세요. 쪽지시험은 날마다 봐야 됩니다. 그리고 한 문제라도 틀린 아이들은 틀린 개수만큼 호되게 때려주세요. 맞아야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죠.
“……. 네. 그럴게요.”
이렇게 늘 반복되는 원장님과 나의 대화. 매일 쪽지시험을 봐야하는 아이들도 힘들겠지만, 매일 쪽지시험에 낼 문제를 준비해 놔야하고 틀린 개수대로 매를 들어야 하는 나도 힘에 부친다.
“선생님, 오늘도 또 시험 봐요? 맨날 시험만 보고……. 너무 힘들어요. 선생님.”
“…….”
흐릿한 눈으로 하소연하는 아이들의 지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잠시 머리가 멍해진다. 나는 과연 어떤 선생님인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비춰질까. 꽉 짜여진 학교수업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가 다시 학원으로 이동한 아이들에게 더 큰 부담감만 주는 인정머리 없는 선생님이다. 원장님과 학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무런 군소리 없이 스파르타식 교육에 동참해야 하는 줏대 없는 선생님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내가 그려왔던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은 이게 아니다.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화기애애한 교실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교사의 모습을 그려오지 않았던가. 마치 가족처럼 서로의 개인사를 잘 알고 있다가 때맞춰 알맞은 위로의 말 한 마디로 아이들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모습이지 않았던가. 분명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흥미는 매번 뒷전이고, 아이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들어주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내 뜻대로 자유롭게, 신념을 고수하며 수업을 진행하자니 그것은 내 발로 학원을 뛰쳐나오는 처사가 아니던가.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나인지라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얘들아, 매일매일 시험 보니까 힘들지?”
미안스런 나의 말에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아이들의 고갯짓은 왜 이리도 느리고, 지쳐 보이는지……. 잠시 동안의 침묵 후, 갑자기 나는 한 가지 음모가 떠올라 아이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오늘은 원장님 딱 한 번만 속여 볼까?”
아이들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우리 오늘은 쪽지시험 본 걸로 치자. 예린이는 두 대, 장겸이는 한 대, 도담이도 한 대 맞은 걸로 하자.”
“선생님, 정말요? 하하하하!”
이렇게 아이들과 나는 작지만 재미있는 음모를 짜고서, 옆 강의실에 우리들의 비밀 이야기가 새어나갈세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들은 마치 내가 호되게 때린 것처럼 손바닥이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내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이토록 활짝 피어난 웃음을 보일 수 있는 아이들인데……. 이토록 생기발랄한 몸짓을 하며 귀여움을 보여줄 수 있는 아이들인데…….
오늘만큼은 아이들의 얼굴에 분홍빛이 감도는 듯하다. 그리고 나도 왠지 어깨가 쫙 펴진다. 내내 축 처져만 있던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 세 희
학원으로 향하는 길인데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다. 발걸음이 무거워 아스팔트 길 위에 내 발자국이 새겨질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든다. 얼굴에 붙어있는 살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면, 혹은 몸 안에서 돌고 있던 피가 손끝과 발끝으로 모조리 모이는 듯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극성스럽다 못해 사람을 옥죄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강요하는 원장님의 성화를 오늘은 또 어떻게 견뎌야 될지 막막하다.
“오늘도 수업 끝나기 전에 꼭 쪽지시험 보세요. 쪽지시험은 날마다 봐야 됩니다. 그리고 한 문제라도 틀린 아이들은 틀린 개수만큼 호되게 때려주세요. 맞아야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죠.
“……. 네. 그럴게요.”
이렇게 늘 반복되는 원장님과 나의 대화. 매일 쪽지시험을 봐야하는 아이들도 힘들겠지만, 매일 쪽지시험에 낼 문제를 준비해 놔야하고 틀린 개수대로 매를 들어야 하는 나도 힘에 부친다.
“선생님, 오늘도 또 시험 봐요? 맨날 시험만 보고……. 너무 힘들어요. 선생님.”
“…….”
흐릿한 눈으로 하소연하는 아이들의 지친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잠시 머리가 멍해진다. 나는 과연 어떤 선생님인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비춰질까. 꽉 짜여진 학교수업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가 다시 학원으로 이동한 아이들에게 더 큰 부담감만 주는 인정머리 없는 선생님이다. 원장님과 학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무런 군소리 없이 스파르타식 교육에 동참해야 하는 줏대 없는 선생님이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내가 그려왔던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은 이게 아니다.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화기애애한 교실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교사의 모습을 그려오지 않았던가. 마치 가족처럼 서로의 개인사를 잘 알고 있다가 때맞춰 알맞은 위로의 말 한 마디로 아이들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모습이지 않았던가. 분명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니었다. 아이들의 흥미는 매번 뒷전이고, 아이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들어주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내 뜻대로 자유롭게, 신념을 고수하며 수업을 진행하자니 그것은 내 발로 학원을 뛰쳐나오는 처사가 아니던가. 밥벌이를 걱정해야 하는 나인지라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얘들아, 매일매일 시험 보니까 힘들지?”
미안스런 나의 말에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아이들의 고갯짓은 왜 이리도 느리고, 지쳐 보이는지……. 잠시 동안의 침묵 후, 갑자기 나는 한 가지 음모가 떠올라 아이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오늘은 원장님 딱 한 번만 속여 볼까?”
아이들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우리 오늘은 쪽지시험 본 걸로 치자. 예린이는 두 대, 장겸이는 한 대, 도담이도 한 대 맞은 걸로 하자.”
“선생님, 정말요? 하하하하!”
이렇게 아이들과 나는 작지만 재미있는 음모를 짜고서, 옆 강의실에 우리들의 비밀 이야기가 새어나갈세라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키득키득 웃었다. 아이들은 마치 내가 호되게 때린 것처럼 손바닥이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하며 내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이토록 활짝 피어난 웃음을 보일 수 있는 아이들인데……. 이토록 생기발랄한 몸짓을 하며 귀여움을 보여줄 수 있는 아이들인데…….
오늘만큼은 아이들의 얼굴에 분홍빛이 감도는 듯하다. 그리고 나도 왠지 어깨가 쫙 펴진다. 내내 축 처져만 있던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94 | 풍요로운 나라 프랑스 | 김정자 | 2005.05.17 | 53 |
| 93 | 운조루 객담 | 양용모 | 2005.05.15 | 48 |
| 92 | 가슴앓이 | 김영옥 | 2005.05.14 | 51 |
| 91 |
봄 바람이 소곤 거리내요
| 김기덕 | 2005.05.13 | 48 |
| 90 | 보리밭의 눈물 | 이은재 | 2005.05.12 | 125 |
| 89 | 피터팬처럼 영원히 | 최화경 | 2005.05.11 | 40 |
| 88 | 내가 사는 이야기 | 유영희 | 2005.05.09 | 41 |
| 87 | 그리운 나의 어머니 | 박은희 | 2005.05.09 | 47 |
| 86 | 줄타기 하는 세상 | 김재희 | 2005.05.07 | 40 |
| 85 | 우물 | 김정자 | 2005.05.07 | 87 |
| 84 | 수필,그 30초 전쟁 | 김학 | 2005.05.06 | 342 |
| 83 | 봄의 뜨락을 서성거리며 | 김학 | 2005.05.04 | 103 |
| 82 | 우리의 자존심,장보고 대사 | 이광우 | 2005.05.02 | 42 |
| 81 | 지리산 산행기 | 신영숙 | 2005.05.01 | 43 |
| 80 | 어느 봄날 이야기 | 최선옥 | 2005.04.29 | 56 |
| 79 | 참회문 | 몽생이 | 2005.04.26 | 49 |
| » | 즐거운 음모 | 김세희 | 2005.04.26 | 49 |
| 77 | 오디의 추억 | 배윤숙 | 2005.04.25 | 52 |
| 76 | 추억의 여고 동창회 | 신영숙 | 2005.04.23 | 51 |
| 75 | 자전거의 소망 | 이영열 | 2005.04.23 | 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