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뜨락을 서성거리며
2005.05.04 11:44
봄의 뜨락을 서성거리며
김 학
뜨락의 진달래가 이운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간밤의 비바람에 시달린 탓인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던 선인의 가르침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천여 평이나 됨직한 직장의 뜨락에는 50여 종이나 되는 갖가지 화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른 봄부터 이 나무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조촐한 화원을 방불케 한다.
잔설이 채 걷히지도 않은 이른 봄이면 늙은 백매(白梅)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겨울의 찌꺼기를 씻어내라고 조른다. 매화가 지는가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 담장 가에 총총히 선 개나리가 노란 손수건을 흔들어 댄다. 노란색 제복을 잎은 유치원 어린이들의 소풍행렬마냥 앙증스런 모습이다. 이 무렵이 되면 아름드리 종가시나무는 낙엽을 떨구고, 그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참새들은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봄이 한 발짝 성큼 다가섰음을 찬미하는 새들의 축제다.
4월이 오는가 하면 어느덧 백목련이 설화 같은 꽃을 마련한다. 게으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짧은 일정의 만개다.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을 독살한 여인의 헛된 꿈처럼 허무하다. 이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수유, 벚꽃, 골단초, 모과, 밥풀꽃, 오동나무꽃이 핀다. 저마다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양하며, 향내도 다르건만 벌 나비를 유혹하려 안달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벌 나비의 인기를 끄는 꽃은 벚꽃이다. 30년쯤 되었다는 두 그루의 벚꽃이 만개하면 백설(白雪)이 뒤덮인 듯 찬란하다. 겹꽃이어서 더욱 푸짐하다. 바람이 건듯 불면 흰 꽃잎이 쏟아진다. 눈 내리는 겨울을 연상케 한다.
벚꽃나무 밑을 서성거리면 잉잉거리는 벌들의 탄성소리 때문에 고막이 따가울 지경이다. 어디서 찾아 왔는지 꽃보다도 벌이 더 많이 보인다. 꽃이 지자 꿀벌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며칠 전 고관대작과 부잣집만을 골라 값비싼 보석을 훔치다 붙잡혔다는 도둑 이야기가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요란하게 장식한 적이 있다. 심심찮은 화젯거리를 제공해 주던 그가 도망쳤다가 총을 맞고 붙잡혔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끝내고 다시 구치소로 끌려갈 때 벌떼처럼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어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러고 나서 사진기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 광경을 보며 벚꽃에 엉겨 붙어 굴을 따던 꿀벌을 생각해 냈다.
4월 중순 무렵이 되자 뜨락의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진달래꽃 주변을 맴돌곤 한다. 꽃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불행한 꿀벌을 돕고 싶은 마음에서다.
작년 봄의 일이다. 나는 진달래꽃을 살펴보다가 꿀벌의 시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진달래의 꽃받침 부근에는 찐득찐득한 물기가 있어서 벌이 그 물기에 발을 헛딛게 되면 헤어나지를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백합처럼 진달래도 벌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그 때에 나는 처음 목격했던 것이다. 올 봄에도 역시 그런 비극은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벌이야 살릴 방도가 없다. 그러나 금방 발을 헛딛었던 벌은 구해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제비다리 고쳐주고 보은의 박씨를 얻은 흥부의 행운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나는 진달래꽃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벌을 보았다. 꽃을 송이 채 따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K양은 말없이 그 꽃을 L씨 책상 위로 옮겼다. 벌은 더욱 버둥거렸다. 우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L씨도 바람기가 잠잠해 지려는지.
요즘은 예닐곱 그루의 철쭉이 빨갛게 피었다. 핏빛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정유재란 때 남원 성을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선열들의 흘린 피가 저렇게 꽃으로 피어난 것은 아닐까?
올봄에 나는 뜨락의 구석구석에다 나팔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맨드라미 등 여러 가지 꽃씨를 뿌렸다. 이들 꽃모종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흐뭇하다. 이 꽃들이 피기를 기다리며 사는 맛도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높은 곳을 향하여 어기차게 줄기를 뻗어가는 나팔꽃의 기개도 좋고, 코스모스의 끈질긴 생명력도 나에겐 위안이 되리라. 맨드라미에서는 꽃씨를 전해 준 효자 K씨의 효심을 거듭 음미할 수가 있을 것이고, 해바라기에서는 수필가 교수의 러브스토리를 연상하게 되리라. 그 교수는 총각시절 펜팔로 사귄 아가씨로부터 해바라기 씨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사랑이 깊어져 결혼을 했고, 신혼시절에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해바라기만큼은 식구처럼 사랑의 마스코트로서 데리고 다녔다지 않던가.
청아한 까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음성이다. 올해는 어디에 둥지를 틀어야 할 것인지 까치 부부가 상의를 하는 모양이다. 올해에는 무언가 반가운 소식이 있을 듯한 기대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김 학
뜨락의 진달래가 이운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간밤의 비바람에 시달린 탓인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던 선인의 가르침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천여 평이나 됨직한 직장의 뜨락에는 50여 종이나 되는 갖가지 화목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른 봄부터 이 나무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조촐한 화원을 방불케 한다.
잔설이 채 걷히지도 않은 이른 봄이면 늙은 백매(白梅)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겨울의 찌꺼기를 씻어내라고 조른다. 매화가 지는가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 담장 가에 총총히 선 개나리가 노란 손수건을 흔들어 댄다. 노란색 제복을 잎은 유치원 어린이들의 소풍행렬마냥 앙증스런 모습이다. 이 무렵이 되면 아름드리 종가시나무는 낙엽을 떨구고, 그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참새들은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봄이 한 발짝 성큼 다가섰음을 찬미하는 새들의 축제다.
4월이 오는가 하면 어느덧 백목련이 설화 같은 꽃을 마련한다. 게으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짧은 일정의 만개다.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을 독살한 여인의 헛된 꿈처럼 허무하다. 이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수유, 벚꽃, 골단초, 모과, 밥풀꽃, 오동나무꽃이 핀다. 저마다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양하며, 향내도 다르건만 벌 나비를 유혹하려 안달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벌 나비의 인기를 끄는 꽃은 벚꽃이다. 30년쯤 되었다는 두 그루의 벚꽃이 만개하면 백설(白雪)이 뒤덮인 듯 찬란하다. 겹꽃이어서 더욱 푸짐하다. 바람이 건듯 불면 흰 꽃잎이 쏟아진다. 눈 내리는 겨울을 연상케 한다.
벚꽃나무 밑을 서성거리면 잉잉거리는 벌들의 탄성소리 때문에 고막이 따가울 지경이다. 어디서 찾아 왔는지 꽃보다도 벌이 더 많이 보인다. 꽃이 지자 꿀벌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며칠 전 고관대작과 부잣집만을 골라 값비싼 보석을 훔치다 붙잡혔다는 도둑 이야기가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요란하게 장식한 적이 있다. 심심찮은 화젯거리를 제공해 주던 그가 도망쳤다가 총을 맞고 붙잡혔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끝내고 다시 구치소로 끌려갈 때 벌떼처럼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어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러고 나서 사진기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 광경을 보며 벚꽃에 엉겨 붙어 굴을 따던 꿀벌을 생각해 냈다.
4월 중순 무렵이 되자 뜨락의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진달래꽃 주변을 맴돌곤 한다. 꽃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불행한 꿀벌을 돕고 싶은 마음에서다.
작년 봄의 일이다. 나는 진달래꽃을 살펴보다가 꿀벌의 시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진달래의 꽃받침 부근에는 찐득찐득한 물기가 있어서 벌이 그 물기에 발을 헛딛게 되면 헤어나지를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백합처럼 진달래도 벌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그 때에 나는 처음 목격했던 것이다. 올 봄에도 역시 그런 비극은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숨을 거둔 벌이야 살릴 방도가 없다. 그러나 금방 발을 헛딛었던 벌은 구해줄 수가 있다. 그렇다고 제비다리 고쳐주고 보은의 박씨를 얻은 흥부의 행운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나는 진달래꽃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벌을 보았다. 꽃을 송이 채 따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K양은 말없이 그 꽃을 L씨 책상 위로 옮겼다. 벌은 더욱 버둥거렸다. 우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L씨도 바람기가 잠잠해 지려는지.
요즘은 예닐곱 그루의 철쭉이 빨갛게 피었다. 핏빛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정유재란 때 남원 성을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선열들의 흘린 피가 저렇게 꽃으로 피어난 것은 아닐까?
올봄에 나는 뜨락의 구석구석에다 나팔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맨드라미 등 여러 가지 꽃씨를 뿌렸다. 이들 꽃모종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흐뭇하다. 이 꽃들이 피기를 기다리며 사는 맛도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높은 곳을 향하여 어기차게 줄기를 뻗어가는 나팔꽃의 기개도 좋고, 코스모스의 끈질긴 생명력도 나에겐 위안이 되리라. 맨드라미에서는 꽃씨를 전해 준 효자 K씨의 효심을 거듭 음미할 수가 있을 것이고, 해바라기에서는 수필가 교수의 러브스토리를 연상하게 되리라. 그 교수는 총각시절 펜팔로 사귄 아가씨로부터 해바라기 씨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사랑이 깊어져 결혼을 했고, 신혼시절에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해바라기만큼은 식구처럼 사랑의 마스코트로서 데리고 다녔다지 않던가.
청아한 까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음성이다. 올해는 어디에 둥지를 틀어야 할 것인지 까치 부부가 상의를 하는 모양이다. 올해에는 무언가 반가운 소식이 있을 듯한 기대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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