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존심,장보고 대사
2005.05.02 17:33
우리의 자존심, 장보고 대사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광우
날씨가 쾌청하여 문학기행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4월 그믐을 하루 앞 둔 오늘은,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이 완도와 해남을 찾아가는 날이다. 8시 조금 지나서 출발한 일행은 11시 반쯤에 완도에 도착하였다. 완도 시내 곳곳에 장보고축제를 알리는 광고문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장보고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 것 같다.
청해진이던 섬을 바라보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엎어놓은 전복' 모양의 장도(將島)를 바라보며, 현지 문화해설사(文化解說士)의 설명을 들었다.
안개가 자옥하게 깔려, 바다 저쪽 섬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장도에는 건물 세 채가 3각 구도로 세워져있었다. 초가집 한 채는 사택이고, 나머지 두 집은 사무실과 전망대란다. 이 섬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유물로 봐서 저 장도가 청해진 자리가 확실하단다.
다도해이면서 한려수도인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정말 크고 작은 섬들과 눈이 시리도록 맑고 파아란 바다는 포근한 안정감을 주었다. 맑은 날 바라보면 멀리 토말(土末)도 보인단다.
육지와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200m이고, 하루에 두 번씩 썰물이 있어 바다 바닥이 드러나는데 그럴 때면 섬 서쪽에 300여 개의 목책이 보인다고 한다. 이는 방벽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외적의 침입방지용(侵入防止用)으로 추정된단다. 이곳에 대한 아홉 차례의 대대적인 유물 발굴작업을 통해서 우물과 많은 유물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잘 보관 전시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곳이 청해진(靑海鎭) 자리였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200년 전에 중국 서주(徐州)지방의 소장(小將)으로 있던 장보고는, 모았던 사재(私財)를 털어 그곳에 법화원(法花院)이라는 절을 지었다. 그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집단 거류지와 신라소(新羅所)라는 사무소가 있어 많은 신라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중국인 해적(海賊)들이 신라인(新羅人)들을 노략(擄掠)하여 노예로 팔고있는 광경을 보고 격분한 끝에 관직을 버리고 귀국했다. 당시의 신라왕인 흥덕왕께 고하여, 군사 만 명을 데리고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퇴치에 나섰다. 해적을 소탕한 그는 한편으로 무역에도 힘을 써 대규모무역선단(貿易船團)을 운영하였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그 뒤 신라왕의 총애를 받은 장보고 청해진 대사는 자기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기도 했다.
이곳 완도에서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장보고와 또 다른 두 명의 대사를 위한 당제(堂祭)를 지낸다. 당제와 비슷한 것으로 샘굿 선상굿 당산굿도 있었는데, 토속신앙으로 퍽 중요시하는 행사들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해신(海神)의 인기가 대단하다. 신라인의 긍지를 살리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다가 독도 문제로 일본과의 사이에 껄끄러운 갈등을 빚고 있는 때이니, 해상권을 휘두르는 장보고야말로 민족의 우상(偶像)이 아니겠는가? 장보고는 완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자랑이다. '장보고의 날' 축제가 해마다 5월 7일을 전후하여 완도에서 열리는데, 그 참뜻을 살리고 기려야 할 일이다.
오늘 우리가 완도를 찾아와 드라마 촬영세트를 구경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불목리 세트장과 소세포 세트장 두 곳이 있는데, 두 곳 다 지금 한창 촬영 중이어서 일반인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서 멀리서 바라만 보고 왔다. 수많은 차량들이 촬영장 근처로 몰려들어 멀리서 구경하고 있었다.
장보고 대사가 활동했던 그 당시의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의 정국은 말기현상(末期現狀)으로 불안하고 혼미하던 때였다. 공동영해(共同領海)인 서해 해상에도 그 영향이 있어서 불법이 난무(亂舞)했을 터였다. 그러니 해상 지배권을 장악했던 장 대사야말로 영웅이요, 태양이었을 게다. 그 후손인 우리는 뿌듯한 긍지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고금진을 설치했던 곳도 이 근처이고, 또 공이 노량해전에서 많은 적군을 물리치고 순국했을 때, 3개월 간 그의 시신을 모셨던 곳도 이곳이다. 장보고와 이순신 두 사람 다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인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고사가 생각난다.
돌아오는 길에 아홉 계단을 이룬대서 이름 붙여진 구계동(九階洞) 자갈 밭(큰 조약돌, 몽돌)을 밟아보고, 해남 땅도 구경했다. 딸그락 딸그락 자갈밭을 밟는 소리를 신나게 들으며, 수 천년 동안 모난 돌을 반들반들하게 갈아놓은 자연의 그 오묘하고 위대한 힘에 감탄하였다. 짧은 하루를 뜻 있게 보내고 나니 흐뭇했다. 장보고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완도 답사에서 '청해진의 해신'은 우리의 자존심임을 새삼 느꼈다.
(2005년 4월 30일)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광우
날씨가 쾌청하여 문학기행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4월 그믐을 하루 앞 둔 오늘은,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이 완도와 해남을 찾아가는 날이다. 8시 조금 지나서 출발한 일행은 11시 반쯤에 완도에 도착하였다. 완도 시내 곳곳에 장보고축제를 알리는 광고문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장보고의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 것 같다.
청해진이던 섬을 바라보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엎어놓은 전복' 모양의 장도(將島)를 바라보며, 현지 문화해설사(文化解說士)의 설명을 들었다.
안개가 자옥하게 깔려, 바다 저쪽 섬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장도에는 건물 세 채가 3각 구도로 세워져있었다. 초가집 한 채는 사택이고, 나머지 두 집은 사무실과 전망대란다. 이 섬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유물로 봐서 저 장도가 청해진 자리가 확실하단다.
다도해이면서 한려수도인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정말 크고 작은 섬들과 눈이 시리도록 맑고 파아란 바다는 포근한 안정감을 주었다. 맑은 날 바라보면 멀리 토말(土末)도 보인단다.
육지와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200m이고, 하루에 두 번씩 썰물이 있어 바다 바닥이 드러나는데 그럴 때면 섬 서쪽에 300여 개의 목책이 보인다고 한다. 이는 방벽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외적의 침입방지용(侵入防止用)으로 추정된단다. 이곳에 대한 아홉 차례의 대대적인 유물 발굴작업을 통해서 우물과 많은 유물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잘 보관 전시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곳이 청해진(靑海鎭) 자리였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200년 전에 중국 서주(徐州)지방의 소장(小將)으로 있던 장보고는, 모았던 사재(私財)를 털어 그곳에 법화원(法花院)이라는 절을 지었다. 그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집단 거류지와 신라소(新羅所)라는 사무소가 있어 많은 신라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중국인 해적(海賊)들이 신라인(新羅人)들을 노략(擄掠)하여 노예로 팔고있는 광경을 보고 격분한 끝에 관직을 버리고 귀국했다. 당시의 신라왕인 흥덕왕께 고하여, 군사 만 명을 데리고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퇴치에 나섰다. 해적을 소탕한 그는 한편으로 무역에도 힘을 써 대규모무역선단(貿易船團)을 운영하였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그 뒤 신라왕의 총애를 받은 장보고 청해진 대사는 자기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기도 했다.
이곳 완도에서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장보고와 또 다른 두 명의 대사를 위한 당제(堂祭)를 지낸다. 당제와 비슷한 것으로 샘굿 선상굿 당산굿도 있었는데, 토속신앙으로 퍽 중요시하는 행사들이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해신(海神)의 인기가 대단하다. 신라인의 긍지를 살리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다가 독도 문제로 일본과의 사이에 껄끄러운 갈등을 빚고 있는 때이니, 해상권을 휘두르는 장보고야말로 민족의 우상(偶像)이 아니겠는가? 장보고는 완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자랑이다. '장보고의 날' 축제가 해마다 5월 7일을 전후하여 완도에서 열리는데, 그 참뜻을 살리고 기려야 할 일이다.
오늘 우리가 완도를 찾아와 드라마 촬영세트를 구경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불목리 세트장과 소세포 세트장 두 곳이 있는데, 두 곳 다 지금 한창 촬영 중이어서 일반인 접근을 금지하고 있어서 멀리서 바라만 보고 왔다. 수많은 차량들이 촬영장 근처로 몰려들어 멀리서 구경하고 있었다.
장보고 대사가 활동했던 그 당시의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의 정국은 말기현상(末期現狀)으로 불안하고 혼미하던 때였다. 공동영해(共同領海)인 서해 해상에도 그 영향이 있어서 불법이 난무(亂舞)했을 터였다. 그러니 해상 지배권을 장악했던 장 대사야말로 영웅이요, 태양이었을 게다. 그 후손인 우리는 뿌듯한 긍지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 고금진을 설치했던 곳도 이 근처이고, 또 공이 노량해전에서 많은 적군을 물리치고 순국했을 때, 3개월 간 그의 시신을 모셨던 곳도 이곳이다. 장보고와 이순신 두 사람 다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인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고사가 생각난다.
돌아오는 길에 아홉 계단을 이룬대서 이름 붙여진 구계동(九階洞) 자갈 밭(큰 조약돌, 몽돌)을 밟아보고, 해남 땅도 구경했다. 딸그락 딸그락 자갈밭을 밟는 소리를 신나게 들으며, 수 천년 동안 모난 돌을 반들반들하게 갈아놓은 자연의 그 오묘하고 위대한 힘에 감탄하였다. 짧은 하루를 뜻 있게 보내고 나니 흐뭇했다. 장보고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완도 답사에서 '청해진의 해신'은 우리의 자존심임을 새삼 느꼈다.
(2005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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