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처럼 영원히

2005.05.11 08:16

최화경 조회 수:40 추천:11

피터팬처럼 영원히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최화경



오후가 되자 일기예보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 냉랭해진 탓인지, 콧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르고 재채기까지 나와 괴로웠다. 갑자기 모든 일정이 귀찮아졌다. 질척이며 젖어있을 난장을 구경하는 것도 을씨년스럽고 불편 할 것 같았고, 딸애가 먹고 싶다던 비빔냉면은 한기 드는 내 몸이 달가워하질 않는다.


어쩐다? 볼펜만 딱딱거리며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왔다."엄마 비 오는데 갈 거야?" 딸애가 난장에 갈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난 재빨리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딸애의 의견을 물었다. 비도 오니까 난장은 가지말고 동네에서 냉면이나 먹자고 했다. 상황 판단을 잘하는 딸애가 기특하고 예뻤다. 딸애의 마음과는 달리 내 마음이 식어 가는 듯해서 잠시 미안했지만 무엇보다 빗속의 난장을 찾지 않아도 되어 다행스러웠다.


딸애는 중학교 3학년이다. 어쩌면 딸애에겐 이번 어린이날이 마지막 어린이날이 될지도 모른다. 딸은 이젠 어린애가 아닌 듯 모든 게 의젓해졌다. 치킨 한 마리만 배달시키려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하고, 놀이기구 앞에서 목을 빼고 차례를 기다리다가 지치고, 어디를 가도 차가 막혀 움직일 수 없었던 지난 어린이날들이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작년만 해도 아이를 그냥 두는 어린이날은 생각할 수 없었다. 올해는 남편과 내가 출근해야 하기에 저녁에 냉면을 먹고 전주풍남제 행사인 난장을 구경할 계획이었는데도 별 불평이 없었다. 중간고사가 끝나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오래도록 잠만 자고싶어했다. 마치 피곤한 샐러리맨처럼.


딸애는 역시 냉면을 먹지 못했다. 다섯 살 때인가 냉면을 먹고 몹시 체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부터 냉면을 먹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며칠 전부터 냉면 타령이어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딸은 매운 냉면을 벌서는 사람처럼 억지로 먹었고, 난 콧물을 훌쩍이며 차가운 냉면을 먹으면서 감기가 도질 것 같은 예감에 불안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짐했다. 비 오는 날 다시는 냉면을 먹지 말자고.


딸애는 노래방에 가고싶어했다. 난 노래방이 싫었다. 그러나  오늘이 딸애의 마지막 어린이날일지도 모르니 딸애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휴일이라는 의미 외엔 그 찬란했던 어린이날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 노래방들은 거의가 지하에 있는 걸까. 지하 노래방으로 내려가면서 딸애는 벌써 흥이 나있었고, 난 온 몸에 한기를 느꼈다.


딸애는 마치 가수 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불렀다. 모르는 노래가 거의 없는 듯  소리 지르며 춤까지 추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난 탬버린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딸애의 몸짓과 표정은 물론 목소리마저 너무도 어른스러워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게 쓸쓸해졌다.

솜사탕을 들고 공원의 비둘기를 쫓던 아이, 하롱하롱 꽃잎이 지던 벚나무 아래서 꽃잎 보다 더 깨끗하게 웃던 아이, 회전목마 위에서 손을 흔들며 파도처럼 흔들리던 아이. 한순간, 딸애가 피터팬처럼 영원히 어린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선물도 없는 어린이 날이기도 했다. 딸애가 별로 원하는 것도 없었고, 나도 뭔가 특별히 준비할 생각도 못했다. 도리어 딸이 어버이날 선물걱정을 한다. 아마 용돈이 부족한가보다. 하기야 혼자서 아빠 엄마 선물 다 준비하려면 빠듯하기도 할 것이다. 형제가 있으면 같이 준비할 수 있어 부담도 없고 더 즐거웠을 텐데……. 외동이의 외로움이 버거워 보이는 딸에게 용돈을 올려 줄 구실을 만들어야겠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선물 걱정하는 딸이 이젠 더 이상 어린이는 아닌 것 같아 쓸쓸했다.



아아, 피곤해! 갑자기 딸애가 소리를 지르며 말괄량이처럼 소파에 벌렁 눕는다. 그리고 목마르다고 보채며 나에게 이것저것 시원한 것을 부탁한다. 이럴 땐 딸이 분명 아직도 어린애다. 그래, 그렇게 하여 네가 나에게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