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기

2005.05.01 11:52

신영숙 조회 수:43 추천:7

지리산에 산행기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신영숙


8월의 어느 무덥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본 뒤 안심하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친한 언니 한 분과 지리산 산행을 하기로 한 날이다.

터미널에서 만나 7시 버스를 타고 남원, 인월을 지나 백무동에 도착했다. 나이는 나보다 많지만 언제나 용감하고 씩씩하기가 남자 못지 않다. 자주 산과 들을 누볐지만 한 번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인 적 없이 늘 든든한 마음으로 따라나서곤 했다. 이번이 지리산 등반 세 번째다. 처음에 갔을 때는 나 자신을 못 믿어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지리산은 어떤 곳일까, 여러 가지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시작했었다.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산, 아무도 대신 해주지 않고,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 등산인 것 같다. 오늘은 등산코스를 알기에 두려움은 없지만 내 체력이 어느 정도 따라줄 지가 걱정이다.

언제나 하는 것처럼 '참샘'에 도착해 마실 물을 보충하고, 가다 지치면 쉬어서 과일 한 쪽과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가다 쉬다 반복하기를 수십 번, 마지막 봉우린가 하면 또 앞을 가로막는 높은 봉우리가 나왔다. 어쩌면 우리 인생살이도 등산과 같은 게 아닐는지……. 자기를 낮추며 상대를 염려해주는 겸손한 태도를 갖게 하는 게 지리산인 것 같다.
앞에서 오는 상대에게 늘 염려의 말을 건넨다. "수고하십니다!" "반갑습니다!" "조심해서 내려가십시오!" 전주 근교 등산로에선 보기 드문 광경들이다. 높은 산이니 만큼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염려할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과일 한 쪽 주면 안 잡아가지……." 마주 오는 청년의 익살에도 낯설어하지 않고 오를 길이 한참인데도 등산로에 주저앉아 과일 한 쪽을 나누는 한가로움, 산은 우리에게 고행의 대가로 베풀 줄 아는 넓은 마음을 안겨준다. 그곳에서는 시기나 질투, 욕심도 떨쳐 버리고 깨끗한 마음만 가져가리라 다짐해본다.

한참 오르다 어느 지름길로 들어섰다. 지리산 속에 이런 평원도 있을까? 완만하게 경사지고, 평원에 가까운 곳에 펼쳐진 눈부신 광경들!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 군데군데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이 비바람을 견뎌낸 주목나무들, 누군지 모를 수많은 등산객들이 쌓아 올렸을 돌탑들, 돌탑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마음속의 염원을 빌며 돌 하나를 올렸다. 유난히 눈에 띄는 주홍색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름이 '동자 꽃'이라고 했다. 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간 주지 스님이 쌓인 눈 때문에 오지 못하자 스님을 기다리다  추위와 굶주림에 앉은 채로  얼어죽은 동자 스님의 슬픈 전설을 안은 꽃이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고 신비하지 않은 게 없었다. 고행을 견딘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꿀맛 같은 행복이다.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산길을 오르니 마주 오는 어느 등산객의 기쁨에 찬 외침이 들렸다.
"나는 올라만 갈 줄 알았더니 내려올 때도 있구나!" 정말 실감나는 말이었다. '통천문'을 지나 정상이 가까웠다 '통천문'은 바위로 된 굴이었다. 하늘로 통하는 문 '통천문' 꼭 맞는 이름인 것 같았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이란 시구를 읊조리며 드디어 정상에 닿았다.
1915m 지리산 정상이다. 나는 지금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다는 지리산정상에 서 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지리산 천왕봉'이란 표지석을 양쪽에서 끌어안고 언니와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지리산정상을 다녀왔다면 믿지 않을 주위사람들에게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조심 또 조심하면서 자만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산하였다. 9시간에 걸친 우리의 산행은 긴 여름 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 끝났다. 길잡이가 되어준 언니는 지금 고향인 전라남도 해남 땅 끝 마을에 가서 몇 달째 머물고 있다. 퇴직 후 낙향을 꿈꾸는 남편을 따라 새집을 짓노라 여념이 없다. 언젠가 한 번 찾아가 긴 얘기를 나눠야겠다. 늘 길잡이가 되어주던 용감한 언니가 내 곁에 없으니 늘 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