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2005.05.07 07:19
잊혀져 가는 것들-①우물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정자
열아홉 살에 시집온 친정 어머니의 하루는 이른 새벽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부뚜막에 모셔놓은 조왕( 王)님께 새물을 갈아놓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물긷기는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 지속되었다. 겨울이 아닌 때는 좀 수월하였겠지만 집안일과 밭일 때문에 밤늦게 바느질이며 집안 치우기 등을 하던 농사철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된다.
겨울이면 서해안 쪽에 가까운 마을이라 밤사이에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신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물을 길러 우물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그 일이 며느리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를 재는 척도가 되어 다른 집보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 시절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쉬웠다니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더구나 나의 외갓집은 울안에 우물이 있고 집 앞에는 넓은 냇가에 빨래터가 있는 곳이어서 바뀌어진 환경에 더 고생스러웠으리라.
행정구역상 두 개의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는 우리 마을은 함께 사용하는 우물을 중심으로 큰 동네와 우리동네인 양지 뜸 그리고 갓 뜸, 새 갓 뜸이란 자연 부락이름이 따로 있는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같은 부락이라 해도 한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친밀감은 훨씬 강했다.
빨래를 하거나 채소를 씻으러 우물에 나온 동네사람들은 새로운 소식들을 들려주었고, 그 소식이 온 동네에 퍼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물은 떠들썩한 여인네들의 수다떨기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고, 소문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우리 마을엔 나만한 여자아이들이 유별나게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물은 내 또래 아이들의 차지가 되어 물동이로 우물물을 길어다 물 항아리마다 가득 채웠다. 빨리 모여 놀고 나물을 캐며 더 많은 우렁이를 잡으러 가기 위해, 자기 집 항아리를 채우고 난 뒤에는 우물에서 먼 친구 집 항아리까지도 함께 채워주었다.
여름이면 논밭에서 모내기, 콩밭매기, 보리타작 등을 하고 나면 타는 목마름과 더위 때문에 집보다도 먼저 우물에 들렀다. 어른들은 버들잎 띄울 겨를도 없이 두레박의 물을 단숨에 마시곤 남은 물을 등뒤에 끼얹어 땀을 식히기도 했다. 어머니들이 점심을 챙기는 동안 우리들은 시원한 물을 길어 왔다. 식구들이 마루에 앉아 보리밥에 찬물을 말아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는 그림 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그 힘든 시기가 그림 같은 풍경으로 떠오르다니…….
겨울이 되어 추워지면 우물가는 조용했다가도 햇살이 비치는 따뜻한 날이면 빨래하는 사람들로 우물가에 빙 둘러 놓여진 빨랫돌이 모자라고는 했다.
우리들도 물을 길어 주는 일로 한몫 거들곤 했는데 아무리 햇살이 따뜻하다고 해도 고무장갑도 없이 3m정도의 물을 길어 빨래를 하는 것은 큰일 중 큰일이었다. 손이 시려 견디기 힘들면 우물에서 가장 가까운 집 부엌에 들어가 짚 다발을 조금 꺼내 불을 지피고 손을 녹였다. 그 당시는 왜 그렇게 땔감도 궁했는지, 무엇하나 풍족한 게 없던 때였다. 재미있게 놀던 우리의 추억만을 빼고는…….
그 와중에도 우리는 즐거웠다. 동네 한가운데에는 꽤 넓은 텃밭이 있어 몇 집이 나누어 경작했었다. 그 텃밭은 겨울이면 우리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고, 여름이면 단 수수와 오이, 가지나 참외 같은 먹거리들이 그 곳에 있었다. 우물은 밭의 끝 부분에 있었고 마을은 텃밭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조성되어 있었다.
5학년 때쯤이던가? 친구들과 텃밭에 있는 단 수수를 서리하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달이 밝은 밤이어서 물을 긷는 뒷집 아주머니 때문에 밭에 들어가 단 수수를 베어 오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몇 명이 망을 보기로 하고 아주머니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끼리 정해진 무슨 노래인가를 부르곤 했다. 부모가 모두 마실 나간 친구 집에서 먹던 그 단 수수는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언제인가 친정어머니께서 어디서 마련하셨는지 단 수수를 먹기 좋게 준비해 오신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 주었더니 "에게게, 뭐가 이래, 이게 무슨 맛이야?"하며 입 속에 남은 찌꺼기를 뱉지 못해 쩔쩔매었다. 우리는 얼마나 아껴서 먹었는데, 먹고 난 뒤에는 껍질로 돗자리를 짜면서 놀기도 하고.
이제는 4개의 우물이 모두 메워져 주차장이나 작업장으로 쓰고 있다. 한 집 두 집 펌프로 물을 올려 쓰더니 상수도가 집집마다 부엌의 싱크대까지 들어가고, 어느 집이나 세탁기를 돌리며 편리하게 살고 있다. 분주하게 우물가를 오가던 동네어른들과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우물가에 심어진 팽나무만이 동네 사람들이 퍼가지 않는 물을 혼자서 다 빨아올리기라도 하는지 더 싱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빨래 방망이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모두 사라진 시골 고향마을은 이 화사한 봄날 나른한 춘곤증으로 졸고 있었다.
(2005. 4. 7)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정자
열아홉 살에 시집온 친정 어머니의 하루는 이른 새벽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부뚜막에 모셔놓은 조왕( 王)님께 새물을 갈아놓는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물긷기는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 지속되었다. 겨울이 아닌 때는 좀 수월하였겠지만 집안일과 밭일 때문에 밤늦게 바느질이며 집안 치우기 등을 하던 농사철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된다.
겨울이면 서해안 쪽에 가까운 마을이라 밤사이에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신을 모시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물을 길러 우물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그 일이 며느리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를 재는 척도가 되어 다른 집보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 시절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쉬웠다니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더구나 나의 외갓집은 울안에 우물이 있고 집 앞에는 넓은 냇가에 빨래터가 있는 곳이어서 바뀌어진 환경에 더 고생스러웠으리라.
행정구역상 두 개의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는 우리 마을은 함께 사용하는 우물을 중심으로 큰 동네와 우리동네인 양지 뜸 그리고 갓 뜸, 새 갓 뜸이란 자연 부락이름이 따로 있는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다. 같은 부락이라 해도 한 우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친밀감은 훨씬 강했다.
빨래를 하거나 채소를 씻으러 우물에 나온 동네사람들은 새로운 소식들을 들려주었고, 그 소식이 온 동네에 퍼지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물은 떠들썩한 여인네들의 수다떨기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고, 소문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우리 마을엔 나만한 여자아이들이 유별나게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물은 내 또래 아이들의 차지가 되어 물동이로 우물물을 길어다 물 항아리마다 가득 채웠다. 빨리 모여 놀고 나물을 캐며 더 많은 우렁이를 잡으러 가기 위해, 자기 집 항아리를 채우고 난 뒤에는 우물에서 먼 친구 집 항아리까지도 함께 채워주었다.
여름이면 논밭에서 모내기, 콩밭매기, 보리타작 등을 하고 나면 타는 목마름과 더위 때문에 집보다도 먼저 우물에 들렀다. 어른들은 버들잎 띄울 겨를도 없이 두레박의 물을 단숨에 마시곤 남은 물을 등뒤에 끼얹어 땀을 식히기도 했다. 어머니들이 점심을 챙기는 동안 우리들은 시원한 물을 길어 왔다. 식구들이 마루에 앉아 보리밥에 찬물을 말아 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먹는 그림 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그 힘든 시기가 그림 같은 풍경으로 떠오르다니…….
겨울이 되어 추워지면 우물가는 조용했다가도 햇살이 비치는 따뜻한 날이면 빨래하는 사람들로 우물가에 빙 둘러 놓여진 빨랫돌이 모자라고는 했다.
우리들도 물을 길어 주는 일로 한몫 거들곤 했는데 아무리 햇살이 따뜻하다고 해도 고무장갑도 없이 3m정도의 물을 길어 빨래를 하는 것은 큰일 중 큰일이었다. 손이 시려 견디기 힘들면 우물에서 가장 가까운 집 부엌에 들어가 짚 다발을 조금 꺼내 불을 지피고 손을 녹였다. 그 당시는 왜 그렇게 땔감도 궁했는지, 무엇하나 풍족한 게 없던 때였다. 재미있게 놀던 우리의 추억만을 빼고는…….
그 와중에도 우리는 즐거웠다. 동네 한가운데에는 꽤 넓은 텃밭이 있어 몇 집이 나누어 경작했었다. 그 텃밭은 겨울이면 우리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고, 여름이면 단 수수와 오이, 가지나 참외 같은 먹거리들이 그 곳에 있었다. 우물은 밭의 끝 부분에 있었고 마을은 텃밭을 가운데 두고 둥글게 조성되어 있었다.
5학년 때쯤이던가? 친구들과 텃밭에 있는 단 수수를 서리하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달이 밝은 밤이어서 물을 긷는 뒷집 아주머니 때문에 밭에 들어가 단 수수를 베어 오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몇 명이 망을 보기로 하고 아주머니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끼리 정해진 무슨 노래인가를 부르곤 했다. 부모가 모두 마실 나간 친구 집에서 먹던 그 단 수수는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언제인가 친정어머니께서 어디서 마련하셨는지 단 수수를 먹기 좋게 준비해 오신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에게 주었더니 "에게게, 뭐가 이래, 이게 무슨 맛이야?"하며 입 속에 남은 찌꺼기를 뱉지 못해 쩔쩔매었다. 우리는 얼마나 아껴서 먹었는데, 먹고 난 뒤에는 껍질로 돗자리를 짜면서 놀기도 하고.
이제는 4개의 우물이 모두 메워져 주차장이나 작업장으로 쓰고 있다. 한 집 두 집 펌프로 물을 올려 쓰더니 상수도가 집집마다 부엌의 싱크대까지 들어가고, 어느 집이나 세탁기를 돌리며 편리하게 살고 있다. 분주하게 우물가를 오가던 동네어른들과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우물가에 심어진 팽나무만이 동네 사람들이 퍼가지 않는 물을 혼자서 다 빨아올리기라도 하는지 더 싱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빨래 방망이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모두 사라진 시골 고향마을은 이 화사한 봄날 나른한 춘곤증으로 졸고 있었다.
(200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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