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편지
2006.04.16 07:19
어머니의 편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급) 황점숙
추억 속에는 자랑하고 싶은 여러 통의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시절 좁은 방벽에 매달아 둔 편지함에는 늘 새로 온 편지가 날 기다리기 일쑤였다. 편지봉투 한쪽에 붙은 우표를 잘 오려 보관했던 재미까지 잊을 수 없지만, 우표 없이 직접 받은 소중한 편지의 기억도 또렷하다. 짧지만 자서전 같은 어머니의 편지인 까닭이다.
5년 전 큰어머니께서 칠순 기념으로 어머니와 큰며느리를 대동하고 금강산 여행을 가시게 되었다. 잠깐 천안 동생 집에서 생활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서울에 모여 시장에 가서 붉은 색 등산점퍼도 사고 운동화에 모자까지 새로 장만하셨다며 몹시 흥분한 음성으로 전화를 주셨다. 65세를 넘기신 고령의 세 분이 멀리 여행을 떠나시는데 배웅할 수 없는 죄송함을 덜어 볼 생각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던 날, 어머니께서 집에 가서 읽어보라며 편지 봉투를 건네주셨다.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쓰신 처음 받아 본 어머니의 편지였다. 아마도 여행 날짜를 받아 놓고 설레는 맘으로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적으신 듯했다.
[나의 꿈]
처녀시절이었다. 좋은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것, 그 소원은 이루어지다가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왜냐고, 시집조카 질녀였다. 질녀가 나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내 마음 남편에도 정정당당한 말 한마디도 못하고 사라온 내 인생 참 한심했다.
나는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꿈을 이루기로 했다.
나는 아들과 질부가 딸을 가졌을 때 차이점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내가 맹세했다. 어렸을 때 차이점과 커서의 차이점을 만들겠다고 굳게 맹세하고 옆자리는 보지말고 내 앞길만 생각하자는 맹세를 하고, 아들, 딸 6남매를 지도할 때 나를 무시하는 사람하고 비교를 하면 살아온 내 인생 지금에 와서는 만족하다고 생각하면, 사는 인생 남보다 무엇이든지 앞장만 가고 싶은 내 마음 이만하면 앞서갔지 않니?
아버지 회갑도 남보다 앞장이 되고 내 회갑도 다른 아주머니가 부러울 정도니까 아버지 가실 때도 많은 사람이 와 주셔서 내 꿈을 이루었다. 내 아들딸이 그렇게 산다는 걸 보였기 때문이다.
막내가 천안으로 발령 났을 때 나는 기뻤다. 왜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나가 보기를 소원했는데, 내 딸이 소원을 이뤄주는구나 하면서 그 날을 기다린 기분 기쁘기만 했다.
왜 나를 괴롭힌 사람을 당분간이라도 멀리한다는 것이 마음 좋아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천안서 집에 갈 때 열차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간다. 동네 가서는 친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할까.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딸 저 딸집에 갈 때 천 원을 해주어도 만 원짜리라고 거짓말을 할 생각을 했다, 왜? 동네사람에게 아직까지는 자식자랑을 안 했기 때문에, 왜냐면 동네 사람이 보았기 때문에 고생 끝에 행복이 오는 것 같구나.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엄마가 외할아버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큰 엄마 일도 내가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속상한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생각도 하지 않은 여행이라니, 너무도 감사하구나. 옛 속담이 있듯이 밥을 안 먹어도 이는 쑤시면서 간다는 속담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남보다 먼저 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내 기분이 말로 할 수 없이 좋구나.
이 편지를 볼 때 너의 마음은 야속할지 안다. 왜 아버지 생각 안 한다고 어찌 생각이야 안 나겠니. 그러나 장하다 내 아들 딸 사랑한다. 내 아들 딸 엄마의 소원은 내 아들 딸 정말 우애하기 바란다. 끝까지 믿고 사랑하자. 안 되는 말 잘 살펴보거라. 나는 이만하면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고맙구나. 나의 아들딸아, 죽어 가는 엄마의 기가 이만하면 남보다 앞서서 말이야. 부디부디 행복하게 살아다오.
[엄마의 꿈]
어머니께서는 편지 말미에 우리 남매들을 "엄마의 꿈"이라고 표현하셨다. 우리가 어머니의 꿈이었다면 그 꿈들이 얼마나 만족하게 성장했을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 해 남원에 사셨던 어머니께서는 천안으로 발령을 받은 막내여동생을 따라 객지생활을 하고 계셨다. 농촌으로 시집오셨으니 도시로 이사 가서 사는 것이 꿈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완강한 고집을 꺾지 못하고 평생 농사일을 하시며 사셨다.
어머니가 새댁이었을 때 동네를 드나들던 보따리장사 아줌마가 어머니의 고운 모습을 보고 "새댁은 농사 일 하기 아깝다."고 하셨다니, 우리 어머니가 뛰어나게 인물이 고우셨던 것 같다. 그런데 막내며느리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층층시하 시댁 식구들 중에 하필 손아래 질녀에게 시집살이를 당하셨다. 시집오신 해 큰어머님의 첫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이것이 새사람 탓이라며 속 좁은 티를 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무릎에 종이를 놓고 붓으로 편지를 쓰시면 손 한 번 안 떼고 몇 장을 줄줄 쓰셨지. 그걸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이 동네엔 몇 안됐어."
질녀가 미워서였을까? 맵다는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생각도 안 나시는지 할머니의 학문이 깊으셨다는 자랑을 평생 침이 마르도록 하셨다. 어머니께서 신방을 차리시자 할머니께서는 육십갑자를 손수 써서 결혼사진 밑에 붙여주시면서 외우라고 하셨단다. 아마도 그때부터 어머니는 배움의 즐거움을 아셨고, 시집살이 설음을 자식들 교육시켜 벗어나겠다고 결심하신 것 같다.
방앗간을 하고 계시던 큰아버지의 큰며느리가 되신 질부는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동갑이셨다. 같은 해 결혼을 하셨고 똑 같이 첫아이를 얻으셨는데 당신의 아들보다 질부의 딸이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걸 보시면서 어머니께서는 아들만은 꼭 훌륭히 키우겠다고 결심하셨단다. 평생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 모습 밑바탕에 작은 아픔의 불씨가 숨겨있었던 것이다.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하려는 자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르치겠다던 어머니의 아들 딸 구별 없던 자식사랑도 그 작은 아픔에서 얻으신 깨달음인 듯싶다.
첫째인 큰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20리 길을 자전거로 통학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시간과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시계 하나 없던 가난한 살림에 새벽이면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깨셔야 했고, 멀리서 들리는 앞집 시계추 소리를 세면서 시간을 가늠하여 아침밥을 지어 아들을 등교시키셨다. 행여 졸기라도 하면 종소리를 놓치고 새벽 2시부터 밥을 해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도 하셨단다
둘째인 큰딸을 읍내에 자취시키고 한 주 동안 먹을 양식을 싸 보내야 하는데 흰쌀이 없어서 한 동네 부잣집을 찾아가 쌀을 꿔다 쌀밥이라곤 구경 못시키는 동생들 몰래 보따리에 넣어주시곤 했다.
"없는 집에서 무슨 덕을 보겠다고 빚내서 애들을 가르쳐?" 끼니 굶지 않으면 부자소리 듣던 시절에 끼니 챙길 양식보다 골목을 누비며 돈 얻으러 다니셨던 어머니 손에 돈보다 먼저 동네사람들의 질책이 귀에 들어왔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큰딸을 전주까지 올려 보내 공부를 시키셨고 나머지 동생들도 모두 큰 도시로 올려 보내 고등교육을 시키셨다.
그 고생 끝에 공무원으로, 대기업 중역으로, 사회 일원이 된 아들들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소중한 가정을 이끌고 있는 딸들까지 모두가 어머니께서 바라보면 넉넉한 행복주머니인 셈이다. 아버지의 회갑연 때 온 마을이 자가용 승용차로 주차장을 이룰 정도로 많은 손님이 와주어서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 어머니의 맘속에 그동안 고생을 씻어 주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니 알고 보면 효도하는 길이 거창한 일만도 아닌 듯싶다.
평생 소원이셨던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막내딸 집에서 고향집을 찾아 갈 때면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무엇부터 자랑할까 기쁜 마음으로 고향집으로 가신다는 속마음을 알고 다시 작아지는 건 큰딸인 나였다. 천 원을 받고도 만원을 받았다고 하고 싶다는 어머니께 만원을 드리면 십 만원을 받으신 것처럼 의기양양하실 텐데 변변히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하고 그저 교통비나 챙겨드려야 했던 내가 초라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셨는데 작은 아들을 혼자된 손위 동서에게 양자를 보내야 한다는 문중회의에 두말 않고 따르셨던 어머니,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셨고, 큰일에 대범하게 대처하셨던 성품은 외할아버지의 가정교육을 잘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뿌리깊은 효심에 한 번 더 고개가 숙여졌다.
"말로 해야만 아는 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깊은 정이지만 큰딸에게 감춰둔 속마음을 몇 십분의 일이나 옮기셨을지 안타깝기만 했다. 군식구 없이 고향집에 찾아가 하룻밤 새면서 어머니의 구두편지를 한 장 더 받아봐야 할 것 같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급) 황점숙
추억 속에는 자랑하고 싶은 여러 통의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시절 좁은 방벽에 매달아 둔 편지함에는 늘 새로 온 편지가 날 기다리기 일쑤였다. 편지봉투 한쪽에 붙은 우표를 잘 오려 보관했던 재미까지 잊을 수 없지만, 우표 없이 직접 받은 소중한 편지의 기억도 또렷하다. 짧지만 자서전 같은 어머니의 편지인 까닭이다.
5년 전 큰어머니께서 칠순 기념으로 어머니와 큰며느리를 대동하고 금강산 여행을 가시게 되었다. 잠깐 천안 동생 집에서 생활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서울에 모여 시장에 가서 붉은 색 등산점퍼도 사고 운동화에 모자까지 새로 장만하셨다며 몹시 흥분한 음성으로 전화를 주셨다. 65세를 넘기신 고령의 세 분이 멀리 여행을 떠나시는데 배웅할 수 없는 죄송함을 덜어 볼 생각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던 날, 어머니께서 집에 가서 읽어보라며 편지 봉투를 건네주셨다.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쓰신 처음 받아 본 어머니의 편지였다. 아마도 여행 날짜를 받아 놓고 설레는 맘으로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적으신 듯했다.
[나의 꿈]
처녀시절이었다. 좋은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것, 그 소원은 이루어지다가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왜냐고, 시집조카 질녀였다. 질녀가 나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내 마음 남편에도 정정당당한 말 한마디도 못하고 사라온 내 인생 참 한심했다.
나는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꿈을 이루기로 했다.
나는 아들과 질부가 딸을 가졌을 때 차이점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내가 맹세했다. 어렸을 때 차이점과 커서의 차이점을 만들겠다고 굳게 맹세하고 옆자리는 보지말고 내 앞길만 생각하자는 맹세를 하고, 아들, 딸 6남매를 지도할 때 나를 무시하는 사람하고 비교를 하면 살아온 내 인생 지금에 와서는 만족하다고 생각하면, 사는 인생 남보다 무엇이든지 앞장만 가고 싶은 내 마음 이만하면 앞서갔지 않니?
아버지 회갑도 남보다 앞장이 되고 내 회갑도 다른 아주머니가 부러울 정도니까 아버지 가실 때도 많은 사람이 와 주셔서 내 꿈을 이루었다. 내 아들딸이 그렇게 산다는 걸 보였기 때문이다.
막내가 천안으로 발령 났을 때 나는 기뻤다. 왜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나가 보기를 소원했는데, 내 딸이 소원을 이뤄주는구나 하면서 그 날을 기다린 기분 기쁘기만 했다.
왜 나를 괴롭힌 사람을 당분간이라도 멀리한다는 것이 마음 좋아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천안서 집에 갈 때 열차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간다. 동네 가서는 친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먼저 할까.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딸 저 딸집에 갈 때 천 원을 해주어도 만 원짜리라고 거짓말을 할 생각을 했다, 왜? 동네사람에게 아직까지는 자식자랑을 안 했기 때문에, 왜냐면 동네 사람이 보았기 때문에 고생 끝에 행복이 오는 것 같구나.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엄마가 외할아버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큰 엄마 일도 내가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속상한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생각도 하지 않은 여행이라니, 너무도 감사하구나. 옛 속담이 있듯이 밥을 안 먹어도 이는 쑤시면서 간다는 속담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남보다 먼저 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내 기분이 말로 할 수 없이 좋구나.
이 편지를 볼 때 너의 마음은 야속할지 안다. 왜 아버지 생각 안 한다고 어찌 생각이야 안 나겠니. 그러나 장하다 내 아들 딸 사랑한다. 내 아들 딸 엄마의 소원은 내 아들 딸 정말 우애하기 바란다. 끝까지 믿고 사랑하자. 안 되는 말 잘 살펴보거라. 나는 이만하면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고맙구나. 나의 아들딸아, 죽어 가는 엄마의 기가 이만하면 남보다 앞서서 말이야. 부디부디 행복하게 살아다오.
[엄마의 꿈]
어머니께서는 편지 말미에 우리 남매들을 "엄마의 꿈"이라고 표현하셨다. 우리가 어머니의 꿈이었다면 그 꿈들이 얼마나 만족하게 성장했을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 해 남원에 사셨던 어머니께서는 천안으로 발령을 받은 막내여동생을 따라 객지생활을 하고 계셨다. 농촌으로 시집오셨으니 도시로 이사 가서 사는 것이 꿈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완강한 고집을 꺾지 못하고 평생 농사일을 하시며 사셨다.
어머니가 새댁이었을 때 동네를 드나들던 보따리장사 아줌마가 어머니의 고운 모습을 보고 "새댁은 농사 일 하기 아깝다."고 하셨다니, 우리 어머니가 뛰어나게 인물이 고우셨던 것 같다. 그런데 막내며느리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층층시하 시댁 식구들 중에 하필 손아래 질녀에게 시집살이를 당하셨다. 시집오신 해 큰어머님의 첫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이것이 새사람 탓이라며 속 좁은 티를 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무릎에 종이를 놓고 붓으로 편지를 쓰시면 손 한 번 안 떼고 몇 장을 줄줄 쓰셨지. 그걸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이 동네엔 몇 안됐어."
질녀가 미워서였을까? 맵다는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생각도 안 나시는지 할머니의 학문이 깊으셨다는 자랑을 평생 침이 마르도록 하셨다. 어머니께서 신방을 차리시자 할머니께서는 육십갑자를 손수 써서 결혼사진 밑에 붙여주시면서 외우라고 하셨단다. 아마도 그때부터 어머니는 배움의 즐거움을 아셨고, 시집살이 설음을 자식들 교육시켜 벗어나겠다고 결심하신 것 같다.
방앗간을 하고 계시던 큰아버지의 큰며느리가 되신 질부는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동갑이셨다. 같은 해 결혼을 하셨고 똑 같이 첫아이를 얻으셨는데 당신의 아들보다 질부의 딸이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걸 보시면서 어머니께서는 아들만은 꼭 훌륭히 키우겠다고 결심하셨단다. 평생 우리를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 모습 밑바탕에 작은 아픔의 불씨가 숨겨있었던 것이다.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하려는 자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르치겠다던 어머니의 아들 딸 구별 없던 자식사랑도 그 작은 아픔에서 얻으신 깨달음인 듯싶다.
첫째인 큰아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20리 길을 자전거로 통학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시간과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시계 하나 없던 가난한 살림에 새벽이면 닭 울음소리에 잠을 깨셔야 했고, 멀리서 들리는 앞집 시계추 소리를 세면서 시간을 가늠하여 아침밥을 지어 아들을 등교시키셨다. 행여 졸기라도 하면 종소리를 놓치고 새벽 2시부터 밥을 해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도 하셨단다
둘째인 큰딸을 읍내에 자취시키고 한 주 동안 먹을 양식을 싸 보내야 하는데 흰쌀이 없어서 한 동네 부잣집을 찾아가 쌀을 꿔다 쌀밥이라곤 구경 못시키는 동생들 몰래 보따리에 넣어주시곤 했다.
"없는 집에서 무슨 덕을 보겠다고 빚내서 애들을 가르쳐?" 끼니 굶지 않으면 부자소리 듣던 시절에 끼니 챙길 양식보다 골목을 누비며 돈 얻으러 다니셨던 어머니 손에 돈보다 먼저 동네사람들의 질책이 귀에 들어왔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큰딸을 전주까지 올려 보내 공부를 시키셨고 나머지 동생들도 모두 큰 도시로 올려 보내 고등교육을 시키셨다.
그 고생 끝에 공무원으로, 대기업 중역으로, 사회 일원이 된 아들들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소중한 가정을 이끌고 있는 딸들까지 모두가 어머니께서 바라보면 넉넉한 행복주머니인 셈이다. 아버지의 회갑연 때 온 마을이 자가용 승용차로 주차장을 이룰 정도로 많은 손님이 와주어서 동네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 어머니의 맘속에 그동안 고생을 씻어 주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니 알고 보면 효도하는 길이 거창한 일만도 아닌 듯싶다.
평생 소원이셨던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막내딸 집에서 고향집을 찾아 갈 때면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무엇부터 자랑할까 기쁜 마음으로 고향집으로 가신다는 속마음을 알고 다시 작아지는 건 큰딸인 나였다. 천 원을 받고도 만원을 받았다고 하고 싶다는 어머니께 만원을 드리면 십 만원을 받으신 것처럼 의기양양하실 텐데 변변히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하고 그저 교통비나 챙겨드려야 했던 내가 초라하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슬하에 아들 둘을 두셨는데 작은 아들을 혼자된 손위 동서에게 양자를 보내야 한다는 문중회의에 두말 않고 따르셨던 어머니,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셨고, 큰일에 대범하게 대처하셨던 성품은 외할아버지의 가정교육을 잘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뿌리깊은 효심에 한 번 더 고개가 숙여졌다.
"말로 해야만 아는 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깊은 정이지만 큰딸에게 감춰둔 속마음을 몇 십분의 일이나 옮기셨을지 안타깝기만 했다. 군식구 없이 고향집에 찾아가 하룻밤 새면서 어머니의 구두편지를 한 장 더 받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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