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노릇을 하고싶은 사람

2006.04.20 19:52

박성희 조회 수:64 추천:19

대장노릇을 하고싶은 사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박성희



"딸 단속을 잘 하고 있는 거야? 요즘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여태 안 들어오느냐고? 전화 좀 해봐!"
"아휴, 제발 그만해요. 그렇게 궁금하면 당신이 해봐요. 나한테 시키지 말고……."
"내가 그런 일까지 다 하려면 뭐 하려고 돈 들여서 장가를 갔겠어? 그리고 딸 단속은 엄마가 해야지! 이 메주들이 하나는 안 들어와서 속 썩이고, 하나는 전화 좀 해보라고 하니까 꼬박꼬박 말대답이나 하고……." 우리 딸의 통행금지 시간인 저녁 8시만 지나면 시작되는 남편의 잔소리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아이고 웃기고 있네. 장가갈 때 자기가 뭐 돈을 썼다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집을 장만한 것도 아니고, 달랑 시계, 반지에 옷 몇 벌 해준 게 전부이면서…….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얘기지만, 딸 시집 보낸다고 기둥뿌리 빠진 사람은 있지만 아들은 주어도 모두 가지고 오니 횡재했으면서 무슨 소리야? 막내딸 시집 보낸다고 우리 친정 기둥이 두개는 빠졌을 걸. 흥!' 이렇게 시작되는 남편의 잔소리는 딸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다녀왔습니다." 딸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메주가 밤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어떻게 하냐?"
"아빠, 제발 이 메주 성형수술 좀 시켜주면 안될까?"
"아니, 이 메주들이 길에 내다놓아도 안 가져갈 것 같아 함께 살아 주니까, 성형수술하고 부작용까지 나가지고 나를 괴롭게 만들려고, 두 메주들 때문에 나 죽겠네. 동네사람들! 우리 집 메주들이 사람을 괴롭혀요!" 이렇게 딸이 집에 들어와야 나는 편안해진다.
"아빠, 그거 알아? 요즘 아빠처럼 그렇게 용감하게 얘기하고 살다가는 집에서 쫓겨나. 큰 엄마들 하는 거 못 봤어? 큰 아빠들이 얼마나 눈치를 보는데?"
"어디서 나뿐 것만 배워 가지고, 너 아빠를 협박하니?" 우리 집 부녀간의 대화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가 이런 내용들이다.

아빠와 딸의 세대차이를 좁히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다. 남편은 아빠로서 다 큰딸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고, 딸은 늦을 수도 있고 엄마한테 전화까지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지지 않으려고 한다.

남편은 내가 자기 역성을 하지 않았다고 또 잔소리를 하겠지만, 그래도 같이 잔소리 하기는 싫다. 나는 딸이 여러 사람들도 만나고 실수할 수도 있고, 아픔도 겪어보고, 실연도 당해 보면서, 생각이 커 가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은 온실 속에 화초처럼 그저 예쁘고 아름답게 키우려 한다. 아이들은 키우는 게 아니라 저절로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기면 아빠로서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지 원……. 다른 집 남자들도 다 이런 생각인지 정말 궁금하다.

남편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조그마한 마이크로 칩이 되어 남편 속으로 들어가서 말초신경에서 심장, 뇌까지 샅샅이 연구해 보았으면 좋겠다. 아니 자기는 술 마시고 늦게 와도 가족들이 모두 나와 반갑게 맞아주어야 기분이 좋고, 다른 식구들은 당신 말 한 마디에 로보트처럼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구 시대적 발상 자체가 이해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참고 지내지만, 아이들이 부모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나도 그랬고 지금 화를 내는 저 사람도 그랬을 테니까.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고, 나는 그만할 때 모내기를 했고, 지게로 나무를 해 날랐다는 등, 옆에서 듣고 있으면 어이없어 웃음이 난다. 하지만 아빠가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같이 맞장구는 못 쳐줘도 웃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할 때도 있다. 딸아이는 엄마가 아빠를 저렇게 현실을 모르게 만들었다고 가끔 나에게 투덜거린다.

"얘야, 엄마는 언제라도 이혼하고 시집가면 새 남편에게 사랑 받고 살 수 있지만, 너희들을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희 아빠 밖에 없을 것 같아 나도 마음에 안 들어도 참고 산다. 그러니 잔소리 듣는 것도 운명이거니 이해하고 항상 고맙게 생각해라."
"너나 시집갈 때 잘 선택해서 가거라." 이렇게 아이들의 불만을 정리한다. 나는 항상 이쪽도 저쪽도 아닌 회색분자가 되어 말을 해야 한다. 남편은 애들을 이해하라는 내 말에 언제나 불만이다. 함께 힘을 합쳐 단속을 해야 한다나?

음주단속도 아니요, 독립운동을 하거나 통일문제처럼 국가의 중대사도 아니며, 또 아이들의 장래를 결정해야하는 일도 아닌데, 부부는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면서 자기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단다.
"이러는 당신이 더 이해가 안 돼. 지금이 18세기도 아니고 우주여행을 가는 시대에 살면서, 공산주의 국가들도 개방하며 사는데, 왜 당신과 생각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 흥얼거리며 랩을 쏟아놓는다.

"누가 우리 남편 좀 말려줄 사람 없어요? 또 잔소리가 시작됐어요.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참고 산다고 전해주세요.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왕따 된다고 꼭 전해주세요."

내가 꼼짝 못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것은 평소 내가 집안 일을 힘들어하거나 귀찮다고 하면 가끔 청소와 설거지도 해주고,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니까, 잔소리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해주며 잘난 척해도 남편이니 어쩔 수없이 살아야 한다.

힘있는 내가 참아 주자.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남 앞에서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있다가 집에 와서 대장노릇 한 번 해보겠다는데 애교로 봐줘야지.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 내일도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겠어? 우리 집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 간다. 정말 늙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의 머리에 잔설이 하나씩 내려앉고, 주름이 생기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하다.
"그래요.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잔소리를 해가며, 비록 가난하지만 그렇게 행복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