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렴없는 4월의 노래

2006.04.20 07:59

최선옥 조회 수:70 추천:8

후렴 없는 4월의 노래
          _손자에게 들려주는 그 날의 노래 한 소절_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고급반) 최선옥

여린 나무들이 잎새에 녹색 물감을 들이느라 한창 바쁜 어느 해 4월 19일 그 날, 거리에서는 젊음의 함성과 분노의 고함이 오가고, 미친 총알이 빗발치는 처절한 전쟁이 벌어졌다.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온 나라 곳곳마다 백성들이 부정하고, 부패한 정부는 물러가라 외쳐대고, 도저히 참고 보기만 할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권력에 눈먼 집권층들은 물러나지 않겠다고 최후의 발악을 하며 드디어 발포명령을 내렸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하여 피를 흘렸던가.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

가슴에 단 배지에 꿈과 낭만이 배어있어 마냥 설레기만 하던 그 해 4월은 정말 잔인했다. 처음으로 훌훌 껍질을 벗듯 검은 색 교복을 벗을 때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줄 알았다. 모두가 처음이었고 시작이었다. 금지되었던 이성과의 교제가 공식적인 미팅이라는 이름으로 초대되었을 때의 마음을 설렘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어린 왕자 같은 시몽의 풋풋한 미소가 나를 위해서 아름다운 선율로 다가왔을 때, 처음으로 밤하늘엔 아름다운 별이 그리고 잎사귀엔 가녀린 바람에도 호르르 떨림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이 나라의 처절한 비극이 시작되고 있음을……. 차곡차곡 쌓여있던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지던 날, 서울 한 가운데에서 젊은이들이 무지막지하게 쏘아대는 경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나는 데모를 하는 그들을 따라 무작정 같이 뛰었다. 그 중에 있을 시몽을 향해 주문을 외면서.
"죽지 마!" 그러나 내 주문은 아무 효험도 없이 시몽은 갔다. 서럽게서럽게 우는 내 울음 속에  젊은 넋은 그렇게 갔다. 젊은 제자들의 피를 가슴에 안은 교수님들이 거리로 나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 교수들의 침통하고 분노에 찬 행렬을 향해 연도 시민들은 눈물의 박수를 보냈었다. 하늘도 땅도 모두모두 울었다.

결국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노(老)대통령 특유의 떨리는 음성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권력의 무상함이여!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긴 부통령당선자도 인생을 그렇게 마감했다. 항상 연 분홍색의 한복을 화사하게 차려입고 우리들에게 선망과 질시 그리고 미움을 동시에 받았던 박 마리아 스승님도 아들의 총에 맞아 가셨고, 대한민국의 국부라며 곳곳에 세워졌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들이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져 온 시내를 질질 끌려 다니다가 사라졌다. 심지어 분뇨차에 매달려 끌려 다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었다.

거리에는 승리한 젊은이들의 함성과 이날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많은 넋들을 애도하는 교회당의 조종이 널리 울려 퍼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제는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어 독재는 사라지고 참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려고 목이 터져라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는 메아리도 없이 무질서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토록 열망하던 모든 것들은 퇴색해져버리고 목숨을 바쳐가며 수호하려던 민주주의는 무능하고 굶주렸던 정치꾼들에게 어이없이 농락당하고 말았다. '4.19혁명'이라고 불리던 그 이름이 어느 틈에 '4.19의거'로 또 '4.19학생운동' 등으로 바뀌더니 그 정신도 변질되어갔다.

1년 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데 난데없이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탱크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단잠을 자고 있던 시민들은 미처 대항도 못하고 고스란히 모든 것을 그들에게 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 그나마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던 4월의 노래는 어느새 금지곡이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지고 말았다. 아직도 그 날 젊은이들의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 군인들의 군화소리에 숨을 죽여야만 했다.

그나마 그 날의 일들은 손수 유족들이 마련한 기금으로 수유리 한 골짜기에 조그마한 나무 팻말 비목과 어느 조각가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그 날의 젊은 함성을 그린 조각으로 쓸쓸히 묘지를 지킬 뿐이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옛 시몽의 비를 찾았더니 아이러니칼하게도 웬 새의 분비물이 묻혀져 있었다. 46년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비문마저 퇴색하여 잘 알아 볼 수도 없었다. 나는 다시는 시몽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다.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가슴 저 밑에서는 후렴도 없이 1절로 끝나버린 4월의 노래가 가슴을 저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