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추억
2006.04.17 10:39
어느 여름날의 추억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박행복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을 지나며 지금은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흑백 사진처럼 떠올리며 내 고향 그 골목길을 기억 속에서나마 거닐어 봅니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바쁜 일손으로 들에 나가시면 나의 유일한 친구는 옆집 정석이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보다 한두 살 위인 정석이에게 사이좋게 놀라는 부탁과 함께 감자며 옥수수를 삶아 나무그늘 밑의 평상에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들고 계시던 호미로 넓은 마당 가운데 긴 줄을 그어 놓으시고 해 그림자가 여기쯤 오면 "저기 저 노란 주전자에다 (부엌에 걸려있던 주전자를 마루 끝에 가져다 놓으시며) 동네 가게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 일꾼들 드리게 밭으로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정석이는 나무그늘에서 소꿉장난도하고 숨바꼭질도하며 노는 사이 어느덧 해 그림자는 어머니가 그어 놓으신 선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마루에 있던 양은주전자를 들고 우리는 동네가게로 향하였습니다. 가게에는 방학 때라 도시로 공부 나갔던 중학생 오빠가 뽀얀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였습니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런 오빠의 모습과 그을린 내 모습은 비교가 되어 몹시 부끄러워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습니다. 오빠는 내 손에 들린 주전자를 받아 들고 나무그늘 밑에 묻혀 있는 항아리로 걸어갔습니다. 긴 자루가 달린 나무됫박을 술항아리 깊숙이 집어넣고는 휘휘 저어 퍼 올린 막걸리를 주전자에 가득 담아주며 "여전히 두 사람은 형제처럼 잘 지내는구나? 심부름도 잘하고 착하니까 준다."며 알사탕을 하나씩 공짜로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로 사탕을 받으며 작은 목소리로,
"막걸리 값은 엄니가 나중에 준대."
"응 알았어. 어서 가봐. 더운디 엄니가 밭에서 지달리시것다."
무거워진 주전자를 나와 정석이는 같이 들고 입에서는 달콤한 사탕을 굴리며 길옆에 지천으로 어우러진 토끼풀을 뜯어 예쁜 꽃 목걸이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어 주며 사람들이 뜸한 골목을 돌아오고 있는데, 정석이가 갑자기 주전자 꼭지를 입에 물더니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캬~ 너도 한 번 빨아먹어 봐." 사탕하고 먹으니 달콤하고 시원하여 맛이 좋다며 나에게 주전자 꼭지를 들이미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정석이가 내 입가에 밀어 준 주전자 꼭지를 나도 모르게 빨아먹었습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그 맛은 정말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너 한 번 나 한 번, 웃고 빨아먹고, 서로 꼭지에 입을 맞추다 보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날씨는 더운데 몸은 자꾸만 늘어지며, 발걸음은 흔들흔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골목길을 걸어오는데 길바닥은 울퉁불퉁, 넓어졌다, 좁아졌다, 빈 주전자를 들고 겨우 집으로 돌아 와서 나란히 평상에 누워버렸습니다. 노란 하늘이 계속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며 초록빛 나뭇잎들은 온통 무지개를 펼치는 듯 신기한 세상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배도 아픈 것 같고, 속도 울렁거리고, 변소도 가고 싶었다.
"정석아, 나 변소 가고 싶은디."
"그려 내가 데려다 줄께 같이 가자." 우리는 손을 잡고 비틀비틀 겨우 변소에 이르렀습니다.
"너는 여기 서 있어." (시골변소가 그렇지 않아요? 커다란 항아리!) 나는 늘 다니던 곳이기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항아리에 두발을 나란히 벌리고 앉는다고 앉았는데 그만 한쪽 발이 휘청거리며 항아리에 빠져버렸습니다. (항아리는 제법 컸고 오물은 그득했던 것으로 기억 됨)
"정석아? 있는 힘을 다해 정석이를 부르고 정석이는 달려 와 내 팔을 끌어 항아리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그 모습이며 냄새는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똥통에 빠진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럽고 놀란 마음에 나는 그만 목을 놓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참 동안 시무룩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리 와. 씻자. 내가 씻어줄게." 하며 정석이는 나를 데리고 우물가로 갔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지하수 물을 내 머리 위에 품어 올리고 나는 펌프 꼭지에 몸을 맡긴 채 오돌오돌 떨며 폭포수 같은 물세례를 받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께서 "아이구야 누가 변소를 푸기에 이 더위에 이렇게 심한 냄새를 풍기는가?" 하시며 우물 쪽으로 오시더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는
"야들아, 아무리 여름이지만 그리 찬물로 씻으면 감기 걸린다." 옆 항아리에 받아 놓은 따뜻한 물을 퍼서 세숫비누로 씻고 또 씻으며
"너그덜 큰일 날 뻔했구나." 하시며 피부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씻어주셨습니다.
감기 들까 무서우니 이제 방에 가서 이불 덮고 누워 있으라는 할머니 말씀에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마당에 걸린 솥에서는 풋 호박에 감자까지 넣은 수제비가 구수하게 보글보글 끓고 있었습니다.
"막걸리 받아 오라니까 깜박 잊고 아직 자고 있었더냐? 그만 자고 일어나 어서 저녁 먹자" 하시며 하얀 대접에 김이 몽실몽실 나는 수제비를 상에 차려 놓으셨습니다.
"정석이도 여기서 한 그릇 먹고 가거라, 너희 어머니는 아직 들에서 안 오셨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나는 따끈한 수제비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온몸이 쫙 풀리고 울렁거리며 아프던 속이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둥그런 두레판에 빙 둘러앉아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어머니는
"아니 누구네 집에서 하필 저녁 먹을 시간에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냐?" 하시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붉으냐? 어디 아프냐?" 하시며 나를 안아 무릎에 앉히셨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이 냄새가 너한테서?"
정석이와 내가 겪었던 오후 일과를 눈치 챈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더욱 깊이 꼬옥 끌어안으시며
"어린것들이 얼마나 놀랐을꼬? 너희들만 남겨두고 들에 나간 어른들이 잘못이지."를 되뇌시며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그때 그 막걸리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다 해 저문 노을 길을 터벅터벅 걸어와 저녁을 지으셨던 어머님 생각에 더 없는 갈증을 느낍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박행복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을 지나며 지금은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흑백 사진처럼 떠올리며 내 고향 그 골목길을 기억 속에서나마 거닐어 봅니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바쁜 일손으로 들에 나가시면 나의 유일한 친구는 옆집 정석이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보다 한두 살 위인 정석이에게 사이좋게 놀라는 부탁과 함께 감자며 옥수수를 삶아 나무그늘 밑의 평상에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들고 계시던 호미로 넓은 마당 가운데 긴 줄을 그어 놓으시고 해 그림자가 여기쯤 오면 "저기 저 노란 주전자에다 (부엌에 걸려있던 주전자를 마루 끝에 가져다 놓으시며) 동네 가게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 일꾼들 드리게 밭으로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정석이는 나무그늘에서 소꿉장난도하고 숨바꼭질도하며 노는 사이 어느덧 해 그림자는 어머니가 그어 놓으신 선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마루에 있던 양은주전자를 들고 우리는 동네가게로 향하였습니다. 가게에는 방학 때라 도시로 공부 나갔던 중학생 오빠가 뽀얀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였습니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런 오빠의 모습과 그을린 내 모습은 비교가 되어 몹시 부끄러워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습니다. 오빠는 내 손에 들린 주전자를 받아 들고 나무그늘 밑에 묻혀 있는 항아리로 걸어갔습니다. 긴 자루가 달린 나무됫박을 술항아리 깊숙이 집어넣고는 휘휘 저어 퍼 올린 막걸리를 주전자에 가득 담아주며 "여전히 두 사람은 형제처럼 잘 지내는구나? 심부름도 잘하고 착하니까 준다."며 알사탕을 하나씩 공짜로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로 사탕을 받으며 작은 목소리로,
"막걸리 값은 엄니가 나중에 준대."
"응 알았어. 어서 가봐. 더운디 엄니가 밭에서 지달리시것다."
무거워진 주전자를 나와 정석이는 같이 들고 입에서는 달콤한 사탕을 굴리며 길옆에 지천으로 어우러진 토끼풀을 뜯어 예쁜 꽃 목걸이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어 주며 사람들이 뜸한 골목을 돌아오고 있는데, 정석이가 갑자기 주전자 꼭지를 입에 물더니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캬~ 너도 한 번 빨아먹어 봐." 사탕하고 먹으니 달콤하고 시원하여 맛이 좋다며 나에게 주전자 꼭지를 들이미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정석이가 내 입가에 밀어 준 주전자 꼭지를 나도 모르게 빨아먹었습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그 맛은 정말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너 한 번 나 한 번, 웃고 빨아먹고, 서로 꼭지에 입을 맞추다 보니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날씨는 더운데 몸은 자꾸만 늘어지며, 발걸음은 흔들흔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골목길을 걸어오는데 길바닥은 울퉁불퉁, 넓어졌다, 좁아졌다, 빈 주전자를 들고 겨우 집으로 돌아 와서 나란히 평상에 누워버렸습니다. 노란 하늘이 계속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며 초록빛 나뭇잎들은 온통 무지개를 펼치는 듯 신기한 세상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배도 아픈 것 같고, 속도 울렁거리고, 변소도 가고 싶었다.
"정석아, 나 변소 가고 싶은디."
"그려 내가 데려다 줄께 같이 가자." 우리는 손을 잡고 비틀비틀 겨우 변소에 이르렀습니다.
"너는 여기 서 있어." (시골변소가 그렇지 않아요? 커다란 항아리!) 나는 늘 다니던 곳이기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항아리에 두발을 나란히 벌리고 앉는다고 앉았는데 그만 한쪽 발이 휘청거리며 항아리에 빠져버렸습니다. (항아리는 제법 컸고 오물은 그득했던 것으로 기억 됨)
"정석아? 있는 힘을 다해 정석이를 부르고 정석이는 달려 와 내 팔을 끌어 항아리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그 모습이며 냄새는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똥통에 빠진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끄럽고 놀란 마음에 나는 그만 목을 놓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참 동안 시무룩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리 와. 씻자. 내가 씻어줄게." 하며 정석이는 나를 데리고 우물가로 갔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지하수 물을 내 머리 위에 품어 올리고 나는 펌프 꼭지에 몸을 맡긴 채 오돌오돌 떨며 폭포수 같은 물세례를 받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네 할머니께서 "아이구야 누가 변소를 푸기에 이 더위에 이렇게 심한 냄새를 풍기는가?" 하시며 우물 쪽으로 오시더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는
"야들아, 아무리 여름이지만 그리 찬물로 씻으면 감기 걸린다." 옆 항아리에 받아 놓은 따뜻한 물을 퍼서 세숫비누로 씻고 또 씻으며
"너그덜 큰일 날 뻔했구나." 하시며 피부에 생채기가 날 정도로 씻어주셨습니다.
감기 들까 무서우니 이제 방에 가서 이불 덮고 누워 있으라는 할머니 말씀에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마당에 걸린 솥에서는 풋 호박에 감자까지 넣은 수제비가 구수하게 보글보글 끓고 있었습니다.
"막걸리 받아 오라니까 깜박 잊고 아직 자고 있었더냐? 그만 자고 일어나 어서 저녁 먹자" 하시며 하얀 대접에 김이 몽실몽실 나는 수제비를 상에 차려 놓으셨습니다.
"정석이도 여기서 한 그릇 먹고 가거라, 너희 어머니는 아직 들에서 안 오셨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나는 따끈한 수제비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온몸이 쫙 풀리고 울렁거리며 아프던 속이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둥그런 두레판에 빙 둘러앉아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어머니는
"아니 누구네 집에서 하필 저녁 먹을 시간에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냐?" 하시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붉으냐? 어디 아프냐?" 하시며 나를 안아 무릎에 앉히셨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이 냄새가 너한테서?"
정석이와 내가 겪었던 오후 일과를 눈치 챈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더욱 깊이 꼬옥 끌어안으시며
"어린것들이 얼마나 놀랐을꼬? 너희들만 남겨두고 들에 나간 어른들이 잘못이지."를 되뇌시며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자리에 서서 이렇게 더운 여름이면 그때 그 막걸리를 기다리고 기다리시다 해 저문 노을 길을 터벅터벅 걸어와 저녁을 지으셨던 어머님 생각에 더 없는 갈증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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