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갈아끼우기 외 4편

2006.04.18 08:10

최복운 조회 수:49 추천:7

필름 갈아 끼우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최복운


  큰딸 효선이의 유치원 원비를 내고 가까운 은행에 잠깐 들렀다. 거기에서 뜻밖에도 대학 동창 M을 만났다. 내가 먼저 아는 체를 했더니 처음에는 못 알아보더니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몇 마디 안부가 오가던 끝에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지금 동창회를 하고 있는데 나올 수 있겠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여기에 전화번호 좀 적어 줘. 총무에게 모임이 있을 때 미리 연락하라고 할게.”
눈부시게 하얀 작은 메모지에 전화번호와 이름 그리고 효선 엄마라는 글씨를 쓰면서 짜릿한 전기가 내 몸에 흐름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만인가? 어언 15년이 흘렀다.


병든 몸, 황폐해진 마음, 그리고 생기 없어 보이는 내 얼굴!
아이 하나면 충분하다는 남편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고 때로는 협박(?)까지 하면서 둘째를 임신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임신 6개월이 되어서 하혈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산모만 살리겠노라고 했고, 그때부터 지옥 같은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다. 화장실도 가면 안 되니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남편은 회사까지 그만두고 큰 딸아이는 외할머니에게 맡긴 뒤 내 간호를 맡았다. 대소변도 받아 내면서 침대에 누워서만 지내자니 답답하기 그지없었고 없던 병까지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렵게 잉태한 아이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간신히 9개월을 채워서 제왕절개를 했는데 갑자기 수술 뒤 출혈이 계속되는 바람에 나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애 낳다가 산모 죽는다고 병원에서는 난리가 났다. 병원에 비축된 혈액을 다 수혈하고도 모자라 먼 곳에 있는 혈액원에 구원요청까지 했다.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누워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올라왔을 때 담당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아주머니 같은 환자 때문에 산부인과의사 못해먹어요. 어떤 약을 써서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는지 우리도 몰라요. 지금부터의 인생은 두 세상 산다고 생각하시고, 즐겁고 기쁘게 사세요.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 드리면서요!”


퇴원하고 집에 오자 내 마음의 병은 시작되었다. 오랜 투병생활로 몸은 몹시 쇠약해졌다. 내 나이 서른 여덟인데 이 아이를 과연 언제까지 내가 지켜줄 수 있을까? 공연히 아이 하나 더 갖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나도 아이도 힘들게 된 건 아닌지 하는 후회까지 겹쳐 산후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잠자는 아이를 볼 때마다 늙은 엄마여서 미안하고 안쓰럽기만 했다. 나는 점점 웃음과 말을 잊어버렸다. 가족과 이웃, 형제들과 담을 쌓으면서 매일매일 어떻게 죽을지를 연구(?)하면서 지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의 연속이었다.

  오늘 대학 동창생을 만났다. 우울한 내 마음 한구석에,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내 마음의 정면에 오래된 필름하나가 서서히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필름을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80년대 초, 그때의 대학생활은 어떠했던가?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래도 교정은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쳤다. 20대의 풋풋한 젊음과 낭만이 숨쉬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곳, 두려움 없이 당당했고, 인생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하는 동안, 세상은 바로 내 것 같았던 대학시절, 그곳에 내가 있었다.


빚만 잔뜩 남기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어려운 가정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왜 그토록 대학에 목숨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간신히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고 나면 다음 학기 학비를 걱정하느라 힘겨웠던 아르바이트 ······· ,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굶기를 밥먹듯 하면서도 한 번도 빼먹지 않았던 수업!
사계절 언제나 멋있고 예뻤던 교정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하고 지내야 했던 나는 야간반 학생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항상 부자였고, 마냥 행복했으며, 부러울 것이 없었다. 대학에 다닌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대학 4년 동안 힘겹고 고생스러웠지만 절대로 졸업하지 못하리라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는 당당하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러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 나누며 다니던 학우들! 오늘 바로 그들 중 한 명을 만난 것이다. 희미하던 필름이 점점 선명해지더니 내 몸에서는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쳤다. 갑자기 20대의 나를 찾아가고 싶었다. 학우들과 더불어 지냈던 그 시간 속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갑자기 나는 살고 싶었다. 대학 시절 처절한 어려움도 이겨냈는데, 그때는 티끌만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야? 온갖 어려움을 다 이겨냈던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가장의 의무를 초과 달성하고 있는 남편과, 목숨을 바꿀 뻔했던 소중한 아이들, 나에게는 가족이 있지 않은가. 시들시들 햇빛에 마르는 무 시래기 같던 나의 시간에 서서히 초록물감이 칠해지고 있었다.
‘그래 살자! 살아 보자!’


그 날 이후, 나의 우울증은 조금씩 사라졌으며, 귀찮고 싫었던 전화소리가 오히려 간절히 기다려졌고, 걸려오는 전화가 반갑기만 했다. 나는 오래된 필름을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한쪽에 놓아두고 새로운 인생의 필름으로 갈아 끼웠다.

  
   삐지기 없기/최복운


                                
남동생이 삐졌다.
피 같다던 술도 안 마시고 입을 꼭 봉한 채 컴퓨터 게임만 하더니, 밤 10시가 조금 넘자 작은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벌렁 누워버렸다. 어쩐지 집안 분위기가 어색하다. 작은언니 내외, 우리 내외, 그리고 여동생 내외와 동생 댁이 앉아 있었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방에서 남동생의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 틈을 타서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여동생 내외에게 낯에 큰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려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자는 줄만 알았던 동생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정미영! 그만해, 셋째 누나도 그만하고…….” 정미영은 동생 댁 이름이다.
  순간 분위기는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버렸다. 남편은 잔다고 방으로 들어가고, 여동생은 집에 간다고 일어섰다. 평소에 점잖고 말 없기로 소문난 조선시대 선비 같은 제부도 인상이 굳어지더니 한마디 던지면서 팽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처가 집 와도 별 볼일 없네.”
  가족들이 마주 앉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겸연쩍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음과 재치와 분위기 살리는데 명수인 작은 형부 역시도 피곤하니 그만 자자고 했다. 명절날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은 모였다 하면 이야기꽃을 피우며 밤을 새다시피 했는데 밤 11시도 못되어서 잠을 자다니! 우리 형제는 모두 칠 남매이다. 아들 셋, 딸 넷이다. 나를 중심으로 오빠 둘에 언니 둘 그리고 여동생과 막둥이 남동생이 있다.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남동생이 밉고 굉장히 섭섭했다. '나쁜 자식! 누나들은 어떻게 하라고 삐진단 말이야! 도대체 주최측이 삐지면 참가자는 어떡하란 말이야? 젠장, 다음부터는 친정에 오지 말까?’ 얼마나 뒤척거리다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이른 새벽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니 주방에서 남동생이 동생 댁에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영 씨! 내가 이렇게 용서를 청하는데 들어줘야지. 그리고 참 이 부침개 프라이팬에 데울 것이지? 내가 할게. 그리고 생선도 구워야지, 이리 줘, 오늘 아침상은 내가 다 차릴 테니까 당신은 푹 쉬어.”
  “당신은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으면 사과하고, 그럼 나는 당신이 그럴 때마다 다 들어줘야 되는 거야? 당신은 참 편리하게 사네!”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지금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에게 간절하게 용서를 청하고 있으니까, 제발 좀 용서해달라는 것이지.”
  어느새 남편과 작은언니 내외도 거실로 나와 있었다. 동생 말을 들은 작은 형부는 웃기만 하고 남편은 갑자기 ‘웩!’ 하면서 토하는 시늉을 한다. 그 모습을 본 작은 언니가 한마디  했다.
“야, 어지간히 해라. 셋째 매형 토하려고 한다.”
“토하라고  해,  매형은 조금 있다 가면 되지만 나는 평생을 살아야 돼”
“안 쫓겨나고 붙어살려고?”
“그럼 난 미영 씨 없으면 못살아. 내가 쫓겨나면 어디로 가? 갈 데 없는 몸, 나는 죽은목숨이야” 그러더니 동생이 전화기를 들었다.
“아, 막내 매형? 지금 뭐 하세요? 주무신다고요? 안돼요. 빨리 일어나서 오셔요, 지금 바로 어머님 생신 축하식 마치고 아침 먹을 거니까 10분 이내로 오셔요.” 조금 있으니 여동생 가족이 와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렇다. 오늘은 어머님 생신이다. 이 좋은 날 남동생이 삐진 연유는 이러하다.
  추석날인 어제, 아버지 산소를 다녀와서 우리는 큰집에 들렀다. 그런데 사촌오빠들이 작은 어머니 생신 상을 차려 드리고 싶으니 어머니랑 우리 모두 자고 가라고 붙잡았다. 뜻밖의 제의에 당황한 동생 댁과 나는 다른 형제들이 집으로 오기로 되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면서 큰집 오빠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쳤다. 모처럼 사촌형들과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던 동생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후 동생은 말이 없었다.
  다음날이면 어머니 생신인데 저녁때까지도 아무 연락 없는 두 형들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 그리고 생신 상을 차려 드리고 싶다고 붙잡는 사촌형들의 마음 씀씀이와 비교하면서 공연히 자신을 괴롭힌 것이었다.

  점심 무렵에 도착한 큰언니랑 우리는 어제의 어색함을 잊어버리고 즐겁게 웃으며 어머님 75회 생신 축하식을 마치고 드라이브를 했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라던가! 시골 들판은 풍성함이 넘치고 있었다. 여기저기 누렇게 익어 가는 이삭과 여문 콩 그리고 빨갛게 익은 사과와 황금색 감, 온갖 농작물과 과실이 농들의 노고에 보답하듯 결실을 맺고 있었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가냘프지만 한껏 자기의 색깔을 뽐내고 있는 코스모스, 가슴은 마냥 드높아져 푸른 하늘로 두둥실 흰 구름을 잡으러 올라가는 듯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지루함을 느꼈는지 작은 형부가 갑자기 자기 고향으로 가서 윷놀이를 하자고 했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가게에서 윷판을 빌려다가 늦게 도착한 사촌동생내외랑 편을 갈라서 윷놀이를 했다. 모가 나오고 윷이 나오고 그리고 상대편 말을 잡을 때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웃고 떠들었다.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떤가, 형제들이 모여서 즐거우면 되지!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다짐했다.‘어떠한 일이 있어도 삐지지 않기로!’
동생은 동생 댁을 어떤 감언이설로 꼬드겼는지 장인이 주셨다는 햅쌀 한 가마니를 내 차에 실어 놓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이 한가위 보름달보다 더 밝아졌다.


    
                                  홍삼/최복운
      
                                                                    
  
조심스럽게 뚜껑을 잡았다. 가장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 온 것이다. 잘 우러났을까? 불안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천천히 탕기(湯器)를 들어올리자 새까만 물이 눈앞에 가득 들어왔다.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내가 원한대로 된 것 같다. 기쁘다. 커다란 유리단지에 삼베 보자기를 깔고 홍삼 액을 걸러내었다. 단지에 채워지는 검은 액체를 바라보면서 입가에는 미소가 피었고, 콩알만했던 가슴이 애드벌룬처럼 커졌다.
  
작년 가을, 친구의 조언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본 건강진단 결과는 나와 남편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나 젊고 건강할 줄 알았는데, 당뇨와 고지혈증 그리고 고혈압……. 약을 먹으면서 꾸준히 운동하고 관리하면 위험하지 않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사람으로부터 홍삼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꾸준히 먹을 바에는 사먹는 것보다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훨씬 이익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건강해진다면…….' 주위의 부추김에 따라 백만 원이 넘는 홍삼 만드는 기계를 덜컥 샀다.
  
주위에서는 건삼(말린 삼)으로 하면 편하다고 했지만 기왕이면 수삼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수삼을 사러 충남 금산까지 갔다. 금산까지는 자가용으로 왕복 6-7시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한 번 갈 때마다 10채(수삼 센터에서는 차라고 하는데 1차는 750그램이다.)씩 사 가지고 왔다. 피곤하기는 해도, 시장 구경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남편과 오붓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기쁨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