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맞이하는 한글날

2018.10.01 11:11

김학철 조회 수:5

다시 맞이하는 한글날 

안골은빛수필문학회 김학철  

    

                                                 

                                            

 

  얼마 전 인문학강좌를 수강한 바 있다. 강사는 시내 ㅈ대학 여 교수였다. 그는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얼굴과 가냘픈 몸매인데 비해 강의기법은 좀 특이했다. 수강생은 6070대의 교직, 공무원, 회사원 등으로 정년퇴직한 듯한 남녀 60여 명이었다. 강사는 수강생들이 연령관계로 강의내용을 허투루 들을까봐 걱정되었는지 정신 차려 들으라는 듯 용모와는 달리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요부분마다 구둣발로 연단의 마룻바닥을 쾅쾅 내려 밟는 결기를 보여주었다. 이러다간 구두가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내용은 주로 조선의 근대사에 대한 강의였다.

  강의가 시작되자 강사는 먼저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지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야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권율 장군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있었고 국방력이 튼튼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말도 전혀 틀리지는 않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은 우리 조선을 36년간이나 강점하여 통치하지 않았습니까? 그 길다면 긴 세월동안 나라를 빼앗기고도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문화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정신을 목숨 걸고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선어학회》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모여 창제한 한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말의 문법에 맞게 최초로 정립한 주시경 선생을 거쳐 그 후학들인 33명의 국어학자들은 비밀리에 조선어학회를 조직, 민족의 숙원이며, 문화민족의 공탑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조선어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을 시작, 사전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표준어 사전」, 「외래어 표기」등을 제정하는 등 말과 글의 연구 및 정리보급작업을 계속하던 중 정보를 입수한 왜경에 적발되어 검거, 구속, 고문취조를 받았는데 함흥재판소에서 이극노 징역 6, 최현배 징역 4, 이희승 징역 2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과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등은 각각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씩 선고되었고, 불행하게도 이윤재, 한징 등 2명은 과도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사했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우리말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감옥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이 있었고, 심지어 우리의 이름도 창씨개명創氏改名 이라 하여 일본식으로 바꿔야 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각종 불이익을 주는 등 집요하게 강요하여 국민의 약 80%를 창씨개명토록 했는가 하면, 말과 글도 일본말과 일본글만 사용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빼앗은 우리 땅이나 주권도 양이 차지 않았는지 아예 우리의 말과 글, 심지어 사람이름 등 우리의 혼까지도 빼앗아 가려 악랄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맞서 우리의 선열들은 목숨을 바쳐 지켰던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계사를 보면 수많은 국가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간 사례가 많았다며 가까운 예로 고구려의 후예 발해나 여진족도 국토는 꽤 넓었으나 흔적 없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공통적으로 각각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며 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했다. 강의를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실 나도 이런 역사를 50여 년 전 국어시간에 들었으나 영어, 수학공부에만 매달려 집중하다 보니 《조선어학회》 사건도 까마득히 잊었다. 이번의 인문학 수강은 그간 나의 녹슬었던 머리를 씻어주는 시간이 된 셈이다.

 

  강의가 끝난 뒤 며칠 지나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중학생 때 읽었던 어느 소설책 이야기가 생각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소설가가 쓴 그 소설의 내용중 후반부에 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조선어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더니 전에 없이 심각하고도 슬픈 어조로 학동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조선어 마지막 수업 날'이다. 내일부터는 일본의 방침에 따라 '국어시간에는 조선어 대신 일본어'를 가르친단다." 라고 하며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니 그리 알고 내가 읽는 대로 따라서 열심히 복창하기 바란다고 했다. 이에 여기저기서 학동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선생님이‘가갸거겨 고교구규그기….’'무궁화 삼천리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선창하자 학동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복창했는데 복도에서 들으니 책을 읽는 소리라기보다는 버럭버럭 악을 쓰는 소리처럼 들렸다는 대목이 새삼스럽게 기억에 떠오른다. 당시 그 구절을 읽는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가슴 시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대목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잊었다. 나는 해방되던 해에 태어나 6.25 전쟁당시에는 57세로 전쟁의 참화도 피했고 8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안전하고 편하게 우리말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얼마나 행운이었던가?

 

  그렇게 지내던 중 KBS-1TV에서 방송한 《천상의 컬렉션》이란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시청한〈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이란 낡은 책에 관한 일화를 어느 연사가 무대에 나와 설명하는 것을 시청한 일이 있었다. 그 해례본은 서문에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라고 시작되는 한글창제 취지나 목적을 설명한 내용이 나오는 책이다. 일제강점기인 그 당시 일본은 그 해례본을 입수하여 없에버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단다. 한양에서 갑부 아들인 전형필全鎣弼 이라는 젊은이가 당시 한양에서 큰 기와집 한 채에 1,000원이던 시절, 무려 그 10배인 기와집 10채에 해당되는 거금 10,000원을 주고 낡은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안동에 내려가 기어코 샀는가 하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겸재 정선의 산수화,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 등을 비싼 금액으로 구입했는데 돈이 모자라면 한양의 자기 집과 1만 마지기, 200만 평이나 되는 문전옥답마저 팔아서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샀는가 하면,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의 문화재마져도 고액을 주고 다시 사가지고 귀국하는 열성을 보였다. 당시 그것을 보는 주위 사람은 그를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비아냥댔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낡은 책 훈민정음 해례본을 6.25 전쟁시 피난 갈 때는 품안에 품고 다녔는가 하면 잘 때는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베고 잘 정도로 소중히 간수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례본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의 취지 및 목적, 경위, 창제일자, 창제자, 반포일자 등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우리나라 문화재 국보 제70호로도 지정되었고, 현재는 서울의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에 소장되어 있다. 다른 그림이나 청자, 백자 등도 마찬가지로 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국보가 12, 보물 10, 지방문화재 4점 등과 그밖에 수많은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처럼 우리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바보라 놀림을 받던 간송 전형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옛날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어 학자들간에 설왕설래, 한글날이 여러번 바뀌어 오던 중 해례본이 발견된 뒤 그 책에 훈민정음 반포날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10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여 이어오고 있다.

 

  이 세상에는 6,500개 언어가 있고 그 언어 가운데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400개라고 한다. 유네스코가 이 400개 문자 가운데 문자가 없는 6,100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문자를 가르치면 좋을지 연구한 결과 우리 한글이 1위로 뽑혔다 한다. 그리고 모음, 자음 합하여 24자로 무려 50만 개의 뜻이 다른 어휘를 만들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공통어라고 불리는 영어도 알파벳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몇 만 개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일 하나만으로도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인물이 아닌 세계적 인물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해마다 109, 한글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파란 창공에 펄럭이는 태극기의 모습이 자랑스럽다.‘나의 문화유산답사기’총 8권을 집필한 유홍준은‘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하였다. 오랜 세월 한글날은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한 날로 으레 관공서나 학교 그리고 기업체가 하루 쉬는 등 공휴일 정도로만 알아 온 내 자신이 부끄럽다. 뒤늦게나마 우리의 조상이 만든 한글을 지켜낸 것은 피와 눈물 그리고 땀을 흘린 선각자들과 자신의 모든 걸 바쳐 문화재를 지켜낸 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되새겨 볼 때 한글날을 맞이하는 내게는 예전과는 달리 깊은 감회가 느껴진다.

                                                      (2018.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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